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범 Oct 30. 2024

다수결은 늘 옳을까?

다수결만 맹신하는 오늘날 민주주의

다수결이 늘 옳지는 않다. 고대 그리스의 대중은 "신을 부정하며, 청년을 타락시키고 있다"는 몇몇 소피스트의 선동에 속아 지혜로운 소크라테스를 죽였다. 냉전기 미국 공화당의 매카시 의원이 퍼트린 "사회 각계각층에 205명의 공산주의가 잠입해 있다"는 헛소문은 언론과 여론의 동조에 힘입어 미국 사회를 분열시켰다. 민주주의를 옹호하던 철학자들도 다수에 의한 폭정, 즉 중우정치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프랑스 자유주의 정치학자 토크빌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민주주의가 언제든 "다수에 의한 독재"로 치달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와 동시대 자유주의 철학의 중심에 서 있던 존 스튜어트 밀의 의견도 같았다. 밀은 저서 <자유론>에서 봉건 왕정 권력의 압제보다 여론권력의 압제가 훨씬 위험하다고 말했다. 압도적 다수가 소수의견을 침묵시키는 건 사회적으로 큰 손해라고 주장했다.


“사회는 그 자신의 명령들을 집행할 수 있고, 또 집행한다. 그리고 사회가 올바른 명령 대신 잘못된 명령을 내거나 혹은 간섭해서는 안 될 일에 명령을 낸다면, 사회는 많은 종류의 정치적 탄압보다 더 가공할 만한 사회적 압제를 실행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는 보통 정치적 탄압과 같은 극단적 처벌을 통해 지탱되지는 않지만, 도피 수단을 거의 남기지 않고 삶의 세세한 부분까지 훨씬 더 깊이 침투해 들어가 영혼 그 자체를 노예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행정 관리의 압제에 대한 방비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배적인 의견과 감정의 압제에 대해서도 방비가 있어야 한다.”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펭귄클래식코리아, 2010, p.74.


플라톤의 의견도 같았다. 플라톤은 <정치학>에서 민주주의가 극단적으로는 '중우정치'로 변질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고 훈련을 거친 철학자가 통치하는 '철인통치'가 '민주정치'보다 더 나은 정치체제라고 주장했다.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쓴 대화편 <파이돈>에서는 "다수의 의견을 지나치게 신뢰하면 안 된다"며 환자가 아프면 의사를 찾듯, 지혜를 요구로 하는 일이 생길 때에는 철학자를 찾는 것이 마땅하다는 식의 논변을 소크라테스의 말로 대신 드러낸 바 있기도 하다. 이처럼 철학자들은 시대와 상관없이 민주주의 위험성을 경고해 왔다. 다수결이 진리라는 믿음만큼 민주주의에 위험한 건 없다.


하지만 오늘날 민주주의는 다수결 만능론으로 흐르고 있다. 언제부턴가 '다수결이니깐 정당하다'는 논리가 팽배해지고 있다. 오늘날 국회는 더는 협치의 장이 아니게 되었다. 야당은 단독으로 법안을 처리하기 일쑤다. 정부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올해 2월, 국민 여론 중 90%가 의대 증원에 찬성한다는 통계를 통해 의대증원을 밀어붙이고, 병원 현장에서 이탈한 전공의들에게 칼날을 겨누었다. 다수결을 근거로 정책을 밀어붙일 시간에, 의사 측과 더 활발히 토의해야 마땅했으나 이미 때를 놓치고 말았다. 불통의 대가는 혹독히 치르고 있는 중이다.


국제 사회도 다르지 않다. 러시아, 북한, 중국 모두 형식적으로는 민주주의를 표방하나, 실질적으로는 권위주의 국가다. 이외에도 민주국가를 표방하던 다수의 국가들이 형식적인 민주주의만을 취한 채 권위주의로 돌아서고 있다. 이들 권위주의 체제 하의 '다수결'이라는 시스템은, 권력의 보장 수단일 뿐이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보자. 한국은 민주국가인가? 당연히 민주국가다. 영국 이코노미스트 지수에 따르면 한국은 '완전한 민주국가'에 해당한다. 전체 167개 국 중 22위로, 미국보다도 앞서는 수치다. 하지만 이걸로 만족할 수 있을까? 항목을 자세히 살펴보면, '선거 과정과 다원주의', '정부기능', '시민자유' 등 항목에서는 9.58, 8.57, 8.82로 높은 점수를 받았으나, '정치참여', '정치문화' 항목에서는 각 7.22, 6.25로 '결함이 있는 민주주의'에 속하는 정도의 점수를 받았다. 정치참여는 참여의 양적/질적 정도에 따라 채점되고, 정치문화는 권위주의 지도자에 대한 선호도, 정치 참여와 관심, 정치 약극화 등 척도에 따라 채점된다. '정치문화'의 영역에서는 아직까지 개선의 여지가 많은 민주주의라고 볼 수 있다.


다수결의 맹신에 빠져서는 안 된다. 다수결은 타협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동의가 이뤄진 상태에서의 최후의 선택지다. 다수결 전에는 토론이 전제되어야 한다. 나이, 지역, 성별, 학력, 계급 등 조건을 막론하고,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어야 한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한 사람을 제외하고 모든 인류가 한 가지 의견이라 하더라도, 인류가 이 한 사람의 의견을 침묵시키는 것은 부당하다"고 지적한다. 토론하지 않는다면 침묵을 당한 사람도 손해지만, 침묵을 가한 쪽이 더 손해라고 그는 주장한다. 이유는 이렇다.


"의견의 표현을 침묵시키는 것은 특별한 해악을 낳으니, 그것은 현세대의 인류는 물론 차세대의 인류를 강탈하는 셈이라는 것이다. 그 의견에 찬성하는 사람들보다 그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훨씬 더 그러하다. 그 의견이 옳다면, 인류는 오류를 진리와 바꿀 기회를 박탈당하는 셈이다. 그 의견이 틀리다면 인류는 거의 이에 못지 않게 큰 혜택을, 곧 오류와의 충돌에 의해 창조되는, 진리에 대한 더 분명한 지각과 더 선명한 인상을 잃는 셈이다."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펭귄클래식코리아, 2010, p.92.


브런치북 <민주주의 톺아보기>는 이러한 문제의식에 입각하여 기획됐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까? '다수결이 곧 민주주의'다와 같은 막연한 맹신에 가로막혀 민주주의가 필요로 하는 다양한 가치를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혐오를 양산하고, 폭력에 가담하고 있지는 않은가? 민주주의에 대한 단순한 믿음에까지 질문을 던짐으로써, 민주주의의 의미를 상기하고자 한다. 민주주의는 무엇일까? 민주주의의 다양한 가치들, 자유·평등·관용·존중·타협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가? 민주주의를 향한 여행을 떠나보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