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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병찬 Feb 19. 2023

'마음이 편해지는' 인생 첫 책

91. 산이 할머니네 이야기

아이는 다행히 책에 관심이 많다. 특히 그림책에 대해선 차라리 욕심에 가깝다. 길동 할아버지가 ‘당근’에서 구입한 전집류를 포함해 이웃 아이들이 보고 준 책들을 지금까지 차곡차곡 쌓아두고 있다. 물론 열심히 읽기도 한다. 잠잘 때는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들어가지 않는 제 방을, 낮에는 풀방구리처럼 드나들면서 이 책 저 책 빼서 읽는다.

그런 그림책 읽기 버릇에서 비롯됐나 보다. 직접 책을 만들기 위해 애를 쓴다. 아이 책상에 가보면 A4 용지나 도화지를 오려서 제가 만든 책 겉표지나 속지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제 손으로는 절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아이의 눈에 안 띌 때만 볼 수 있다. 만들다가 만 것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제 마음에 들지 않아서인지는 모른다. 할아버지는 그저 브런치 영향이 아닌가 싶어 뿌듯하기만 하다.

쓰고

어제 가족 톡방에 사진 17장이 올라왔다. 아이가 짓고 편집해 완성했다는 책이다. 사진 한 장에 두 페이지씩 담겼으니 34쪽이다. 중철한 공책을 이용했으니 책 꼴도 제대로 갖췄다. 각 페이지마다 주제에 어울리는 사진이 붙어 있고 그림도 그려져 있다. 별 이야기에선 은하계 밖 성운 사진이, 사막 이야기에선 모래언덕 사진이, 바닷가 이야기에선 밀려오는 파도 사진이 있고, 아래쪽엔 상상의 별과 사막과 바다 그림이 있다. 질적 수준을 떠나 구색은 다 갖췄다.

제목은 <마음이 편안해지는 책>. 이런 안내까지 붙어 있었다. “곶 시작함니다. 안자서 읽어주세요.” 책은 ‘바다로 떠나보자’, ‘아침과 밤이 없는 사막’,

 마음 풀기, 마법의 성 등 4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돼 있다. 3화 대신 1장, 4화 대신 2화로 되어 있어 혼란스럽긴 하다. 1장, 2장으로 나눠 각 2개의 에피소드를 담으려 했는데, 착오가 있었나 보다.

그리고

처음엔 제목을 보고는 마음에 걸렸다. 아이에게 뭔가 마음이 불편한 게 있었던 걸까? 왜 그런 주제를 떠올렸을까? 이런 걱정은 아이의 미숙한 문장을 해독하느라 신경을 쓰다 보니 곧 사라졌다.

마음이 편해지는 요령은 요컨대 ‘복잡한 것을 풀어버리는’ 데 있었다. 그 방법이 첫째 바다를 생각하는 것, 상상 속에서 바다로 떠나는 것이었다. 둘째는 역시 상상 속에서 사람이나 동물 발자국이 하나도 없는 사막으로 떠나는 것이고, 세 번째는 조용히 마음을 들여 보는 것이고 넷째는 달과 별이 속삭이는 밤하늘을 새벽이 올 때까지 지켜보는 것이다. 그러면 구름처럼 물결처럼 자유롭고 편해진다는 것이다. 책은 이렇게 끝난다. “마음이 정말 좋다. 이게 이 책의 힘이다.”

붙이고

놀랍다. 다른 아이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해서 그런 건 결코 아니다. 세상의 모든 아이에겐 그런 상상력과 꿈이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놀라운 이유는 어른들이 상상하지 못하거나 포기한 것을 아이가 상상하고 꿈꾸기 때문이었다. 더 놀라운 것도 있다.

독해가 끝난 뒤 페이스톡을 했다. 할아버지를 보더니 다짜고짜 혀를 쭉 내민다. 매번 하는 짓이다. 할아버지는 아침이나 밤이나 그저 장난 혹은 놀이의 대상이다.

아이 엄마 얘기로는 한두 시간 머리를 콕 박고 있더니 이 그림책을 보여주더란다. 아이 엄마는 적잖이 흥분한 목소리였다. ‘우리 얘 천재 아니야?’ 그런 생각을 하는 듯했다. 내 입에서 ‘그런 걱정은 제발 하지 말라’는 말이 튀어나오려다 말았다.

바다로

사실 한두 시간 만에 글과 그림과 사진 편집을 완성했다는 건 놀라운 집중력이었다. 평생 신문 만드는 것으로 먹고 살아온 할아버지도 하루에 아이 이야기 한 꼭지를 완성하기 쉽지 않다. 우선 한 시간 이상 앉아 있는 게 힘들다. 그 시간 동안 주제에 집중하는 건 더 힘들다. 사진 고르고, 앉힐 자리 찾는 것 심지어 검색어 3개를 찾는 것까지도 귀찮다. 그래서 내일 또 내일로 미루기 일쑤다. 그런데 아이는 그 모든 과정을 한 자리에서 한 방에 처리한 것이다.

아이의 집중력도 놀라웠지만 그런 집중력을 발휘하게끔 한 절실함은 더 불가사의했다. 아이는 도대체 어떤 절실함 때문에 놀고 보고 읽고 먹을 것도 많은데 ‘마음이 편해지는’ 책에 그렇게 몰입했을까?

아이 책을 처음 봤을 때 들었던 걱정이 떠올랐다.

사막으로

“주원아, 놀라운 그림책 고마워. 덕분에 할아버지 마음도 편안해졌어. 그런데 왜 ‘마음이 편안해지는 책’을 쓰게 된 거얌?”

아이는 듣는둥 마는둥 핸드폰 화면을 들락날락하며 장난만 쳤다. “할아버지 말씀에 대답해야지.” 엄마의 가벼운 지청구를 받고서야 화면에 얼굴을 디밀고, 더듬더듬 설명하기 시작했다.

“응~, 제주도에서 4.3 갔었잖아. 그때 일이 자꾸 떠오르는 거야. 나 울었잖아.”

내 마음 속으로

아이는 지난 11월 제주 한달살이를 하면서 4.3 유적지와 행사를 몇 군데 다녔다. 잊지 못할 경험도 했다. 4.3기념공원 상설전시관에서 설명을 듣다가 무섭다며 중간에 나갔고, 나가다가 빌레못 동굴의 비극을 재현한 곳으로 잘못 들어가 울음을 터트렸다. 너븐숭이 기념관에선 북촌 초등학교에서 저질러진 끔찍한 모습을 듣고 보다가 엉엉 울면서 나갔다. 눈앞에서 엄마가 차형당하는 걸 지켜봐야 했던 아이, 피살된 엄마의 품을 파고들던 젖먹이, 엄마와 함께 죽임을 당한 아기들~ 이야기가 나올 때쯤이었다.

마법과 같은

다행히 아이는 곧 마음을 진정했다. 그리고는 기념관 초입 소원지 판에 ‘잊지 않겠다’는 내용의 소원을 써서 남겼고, 너븐숭이 아이 무덤에 귤과 사탕을 올렸으며, 위령탑 앞에서 엄마랑 나란히 두 손 모아 기도하기도 했다. 어느 유족이 평생 숨겨온 4.3의 기억을 다룬 영화 ‘수프와 이데올로기’도 말없이 끝까지 관람했다.

숙소로 돌아와 그림일기에 그날의 슬프고 아팠던 마음을 표현했지만, 아이의 그 아픈 기억은 곧 마음속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을 거라고 믿었다. 실제 서울로 돌아와서는 유치원에 복귀했을 때 친구들이 ‘제주 한달살이 이야기’를 졸라 4.3공원, 너븐숭이 이야기를 잠깐 언급한 게 전부였다고 했다.

별과 달 속으로 산책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얼마나 자주 되살아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기억은 책장 귀퉁이에서도 튀어나왔고, 책상 서랍에서도 나왔으며, 침대 밑 혹은 캄캄한 천장에서도 불쑥불쑥 나타나, 빌레못과 북촌리의 그 현장 그리고 피살된 약혼자를 평생 가슴에 안고 살아온 영희 엄마(<수프와 이데올로기> 주인공)의 아픔 속으로 아이를 이끌었던가 보다. 아이는 그걸 두 달여 만에 저만의 소박한 치유 책으로 드러냈다. 할아버지는 참으로 미련했다.

아이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자주 가위 눌렸을까? 그러지 않고서야 여덟 살 코흘리개가 ‘마음의 병’을 고민하고, 치유 방법을 궁리했을 리 없다.

할아버지가 젊어서 설악산 백담계곡에서 야영할 때였다. 한밤에 마실 물을 뜨러 계류로 갔는데, 등산화 속으로 차디찬 물이 스며드는 걸 느끼고서야 비로서 물속 깊이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달빛 비친 개울이 너무나 투명해 물속인지 물가인지 구분하지 못했던 것이다.

평안 그리고 자신감

백담계곡 계류처럼 아이의 마음은 맑고 투명하다. 그래서 어른들은 아이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너무나 투명한 나머지 그 깊이를 알 수 없다는 것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한다. 그 깊고 깊은 마음속에 어떤 꿈과 소망, 어떤 상처와 아픔, 어떤 원망과 기억이 깃들어 있는지, 그것들이 어떤 물결 어떤 파장을 일으키는지 알 수 없다.

밤하늘은 맑고 투명할수록 더 아름답고 신비롭다. 은하수 너머 또 다른 은하수로, 동화를 넘어 또 다른 동화로 깊어진다. 그런 밤하늘처럼 아이의 마음은 언제나 깊고 또 신비롭다.

할머니가 아이에게 물었다고 한다.

“주원아, 할아버지가 왜 좋아?”

“재미있잖아.”

“그거 말고.”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대답을 하지 않더란다.

‘재미있으면 됐지, 더 바랄 게 무어람? 할머니가 이상해.’ 아마도 그런 표정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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