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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병찬 Feb 14. 2023

"할아버쥐~ 안뇽"

90. 산이 할머니네 이야기

‘글쎄 말이야, 주원이가 날 보자마자 할아버지 안부부터 묻더라고. 그날 당신이 다리 아프다고 절뚝거리던 게 마음이 걸렸나 봐. 그래도 그렇지, 벌써 할아버지 용태까지 묻다니 참 주원인 알 수가 없어. 다 큰 애 같다니까.’

귀가한 아내의 첫 보고는 ‘주원이가 물었다는 할아버지 안부’였다. 아내도 귀를 의심했다고 하지만, 당사자인 할아버지는 입이 쩍 벌어졌다. 이렇게 좋을 수가! 잠시나마 다리 통증이 싹 사라지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지난주 화요일 오른쪽 다리 무릎 위 근육이 아파 한동안 쩔쩔 맸다. 아침부터 아프기 시작하더니 오후가 되어서는 다리를 들 수가 없었다. 펴고 구부리는 것은 물론 무릎을 굽힌 채 누워서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움직이기 힘들었다. 그럴 때마다 ‘악’ 소리가 날 정도로 아팠다. 다리를 꼼짝할 수 없었으니 그날 저녁 잠도 제대로 못 잤다. 뒤척일 수 없어 천정만 보고 꼼짝없이 있어야 했다. 

할아버지는 왜 아픈 거야? 난 이렇게 건강한데.

통증이 심했던 탓인지 오한에 몸살까지 찾아왔다. 하룻밤을 그렇게 지내자 이튿날 아침 다리를 겨우 뗄 수 있었다. 아내의 단골인 동네 한의원에 갔다. 사혈을 하고 침을 놓고 30여 분 비몽사몽 잠을 자고 났더니 걸을 만했다. 한의원에서 아이네로 직행한 것은 싸늘한 집에 혼자 남아 오한에 떨며 궁상을 떨기 싫어서였다. 

그러니까 목요일, 아내가 유치원으로 아이를 데리러 갔을 때였다. 

“할아버지는 어때?” 엥? 얘가 웬일이지? “응, 조금 나았어.” “오늘 뭐 하시는데?” “산이랑 산책도 가고, 일도 하고.” “그래? 아플 때 다니면 안 좋잖아. 어디로 가셨어?” “이번에도 산으로?” “아마 그랬을 거야. 할머니는 가까운 데 잠깐 다녀오라고 했는데, 아마 뒷산에 갔을 거야. ‘평소대로’가 할아버지 신조이거든.” “조심해야 하는데~.” 

아이가 그랬다는 것이다. 글로 옮기기 민망하지만, 나는 이런 손녀를 이렇게 자랑하고 싶다. ‘아이야, 너는 도대체 얼마나 똑똑하고 착하고 자상한 거야?’ 기왕에 자랑을 시작했으니 팔불출 소리를 들어도 나머지도 늘어놔야겠다.

아이가 뜬금없이 그 이야기를 꺼내더란다. 

“할머니, 왜 아기가 0살이야?” 

아이가 지독하게 싫어하는 산수 아니 아이의 치명적 약점인 수학의 기본인 수를 설명하던 중 나온 물음이라고 한다. 아마도 엄마한테 86화 이야기를 들었나 보다. 

아빠랑 산수 공부. 이럴 땐 조금 하는 것 같은데...

‘아주 오랜 옛날엔 요즘 쓰는 1, 2, 3, 4 같은 숫자가 없었어. 그러니 닭이나 돼지가 몇 마리인지, 집안의 숟가락이 몇 개인지, 쌀이 몇 되나 남아 있는지 그리고 옆집에 꿔주거나 꿔온 닭도 있고 달걀도 있을 텐데 그걸 기록해 둘 수 없었던 거야. 그걸 기억할 수도 없고. 그래서 나무토막이나 흙으로 만든 점토판에 달걀을 그리고 그 옆에 줄을 하나씩 그어놓아 기억할 수 있도록 했지. 아프리카 같은 곳에서는 개코원숭이의 긴 코뼈 같은 데다가 날카로운 돌칼 같은 거로 줄을 그어 표시하고. 그런데 개수가 많아지면 다 표시할 수가 없는 거야. 열 개, 백 개를 넘어봐, 그걸 어떻게 다 표시를 해.’ 

‘그래서 중국이나 그리스 로마 같은 데서는 줄긋기와 비슷한 걸로 숫자를 만들어 쓰기 시작했지. 중국에선 一, 二, 三, 四~ 같은 글자를 고안했고, 로마에선 I, II, III, IV, V, VI, VII, VIII, IX 같은 숫자를 만들어 썼어. 그런데 이들 문자는 천, 만, 십만, 백만으로 단위가 커지면 숫자가 너무 길어지고 복잡해지는 거야. 게다가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기가 너무 힘든 거야. 쓰기도 힘든 숫자를 더하고 빼봐, 얼마나 어려운가.’ 

‘이런 문제를 해결해 준 게 주원이가 알고 있는 1, 2, 3, 4~로 되어 있는 아라비아 숫자야. 이 숫자로는 아무리 높은 단위의 숫자라도 쉽게 쓸 수가 있어. 주원이가 좋아하는 컵 떡볶이의 값이 천팔백오십오원이라고 해봐. 아라비아 숫자로 쓰면 읽는 대로, 1855원이라고 쓰면 돼. 한자나 로마자로는 힘들어. 한자로는 一千八百五十五 원인데, 천이 한 개, 백이 여덟 개, 십이 다섯 개, 일이 다섯 개라는 뜻이야. 한자를 모르는 사람은 쓸 수도 읽을 수도 없지. 로마자는 더 힘들어. 할아버지도 모르겠어. 어떻게 써야 할지. 사실 알 필요도 없고.’

혼자 하면 모르겠단 말이야

‘더 큰 문제는 그 길고 어려운 숫자를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는 문제야. 컵 떡볶이 두 개를 샀다고 해봐. 얼마겠어. 한자로 계산하면  一千八百五十五에 一千八百五十五를 더하는 건데 참 골치 아프지? 그런데 아라비아 숫자로는 쓰기도 쉽고, 요령만 배우면 계산하기도 쉬워. 1855+1855=?’ 

‘그런데 아라비아 숫자에는 문제가 하나 있었어. 천팔백 원이라고 해봐. 지금은 1800이라고 쉽게 쓰겠지만 0이란 건 없다는 표시이니까 숫자가 될 수 없었거든. 수는 있는 것을 세기 위한 거야. 없는 것을 셀 이유도 없고 셀 수도 없지. 그래서 처음에 아라비아 숫자에서도 0이 없었어. 그런데 쓰다 보니 너무 불편한 거야. 숫자를 제대로 쓰기도 힘들고. 그래서 만들어낸 게 영(0), 없다는 뜻의 0도 숫자에 포함시켰지. 1800이라고 하면 천 단위가 1개, 백 단위가 8개, 십 단위와 일 단위는 없다는 뜻이지. 0을 포함하고 보니 아무리 많은 소와 양과 돼지의 마릿수도 쉽게 표시할 수 있게 됐지. 그래서 지금은 모든 중국이나 로마나 미국이나 영국이나 모두 수는 아라비아 숫자로 기록해. 편하잖아.’ 

대충 이런 이야기인데 0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아이가 ‘만 나이’의 치명적인 약점을 지적한 것이다. 

“할머니, 엄마 배 안에 있는 아기를 왜 0살이라고 해. 0은 없다는 건데 아이는 엄마 배에 있는데 아이가 없다는 거야?” “그래, 할머니도 주원이랑 같은 생각이야. 배 안의 아기도 우리처럼 살아있는 생명인데 없다고 하면 안 되지.” “만 나이로는 1년이 안 되면 0살이라고 하는데, 그럼 돌이 안 된 아이는 나이가 없는 거고, 0살이면 있지도 않다는 거야? 이상해.” 

놀라운 반문이었다. 물론 개념을 이해하고 하는 말은 아닐 테고, 엄마한테 들은 이해할 수 없고 또 화나게 만드는 ‘만 나이’ 이야기를, 기억해 복기했을 것이다. 그래도 그게 어딘가. 이런 생각 속에서 아이는, 아무리 미숙하고 어린 생명이라도 모두 똑같이 존중하는 마음이 자라지 않겠는가. 

하나 더 있다.

싫다, 싫어

아마도 그날 피아노 학원 문을 나서면서였을 것이다. “할머니, 배는 고픈데 컵 떡볶이엔 질렸어.” 하긴 월화수목금 매일 먹다시피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면 뭘 먹고 싶은데.” “컵라면!” 그렇지, 네가 또 면이 땡기는구나.“ 그런데 가까이엔 편의점이 없었다. 마트에선 먹을 수 없고. “주원아, 지금은 다른 군것질이나 하고 라면은 보습 끝나고 집에서 먹자.” 아이는 초코송이를 선택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이는 라면을 노래했고, 일찌감치 일을 끝낸 엄마가 서둘러 라면을 끓였다. 아이는 그새 방에 들어가 책을 뒤적거린다. 

“주원아, 라면 다 됐어. 먹자.” 대답이 없었다.

“주원아, 빨리 와, 라면 불어 터진단 말이야. 안 오면 내가 다 먹어치운다.”

반협박에 아이가 쪼르르 나와서는 엄마를 빤히 쳐다보며 한마디 했다.

“그런 말 하지 마. 그런 말은 5살 때까지만 하는 거야.”

“불러도 나오지 않으면 뭐라고 해야 해. 라면이 불으면 맛이 없어지잖아.”

“그냥 ‘주원아 라면 불기 전에 같이 먹자’라고만 하면 좋잖아.” 

아이고, 요 조그만 게 엄마 머리 위에 앉아 있네.

금요일 저녁 아이와 ‘영상통화’를 했다. ‘할아버지 안부’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고 싶었다. 밖에 나갔는지 답이 없었다. 그날 늦은 저녁 음성 메시지가 왔다. 

“굿이브닝 할머니, 할아버쥐~. 주워니가” 

나도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 

“안녕, 우리 새앙쥐. 할아버쥐~가”.

아빠 출장 가는 날. 시무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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