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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병찬 Feb 23. 2023

졸업식 없었으면 좋겠어!

92. 산이 할머니네 이야기

“할머니, 어젯밤에 유치원 친구들이랑 노는 꿈 꿨어.”

“매일 만나는 친구랑 꿈에서도 놀았어. 그렇게 놀고 싶어?”

“응. 매일 놀아도 또 놀고 싶어.”

유치원 졸업식 날 아침이었다. 그것도 졸업식이라고, 축하의 뜻은 전해야겠는데 길동 할아버지 할머니가 졸업식에 참석한다고 하니, 전화로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나 때는’ 상상도 할 수 없었지만, 세상이 변했으니 적응해야 한다.

“그래, 친구들이랑 무슨 놀이 했어?”

“방 탈출 놀이!”

“엥?”

무슨 놀이인지 당최 알 수 없지만 어감은 왠지 불길했다. 건성으로 ‘재미 좋았겠다’라고 대답하고는 준비한 얘기만 했다. “유치원 졸업을 축하해, 그리고 초등학교 입학하는 주원이를 열심히 응원할게.” 아이는 좋고 나쁘고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영상통화 화면에서 나가버렸다.

빛나는 졸업장? 안타까운 졸업!

그렇게 설렜던 초등학교 진학이었는데 아이는 언젠가부터 기대감도 설렘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 비해 진학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유치원 졸업 이야기가 나오면 시무룩해졌다. 2월 들어서부터는 유치원 활동에 열성적으로 바뀌었다. 지난 연말 아무런 미련도 없이 1달 동안 유치원을 빼먹고 제주도로 떠났던 아이였다.

따져보면 아이가 초등학교 진학에 마음이 들떴던 것은 사실 한 달 남짓, 잠깐이었다. 연말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초등학교 입학 예정자라고 길동 세검정 할아버지 할머니로부터 옷과 가방 등의 선물을 받을 때부터 설레기 시작해, 한 달 뒤 설 때 가족과 친척에게서 축하와 함께 하는 세뱃돈을 두둑이 받을 때 절정을 이뤘다. 그 뒤엔 내리막이었다. 엄마 아빠의 친구나 회사에서 축하 선물이 와도 아이는 반색하지 않았다.

멋진 선물세트에도 감동은 없고

유치원 종강을 사흘 앞두고 ‘백주원님께’ 소포가 배달됐다. 과일 선물상자만큼 큼지막했다. 누가 보냈는지 알고 있는 엄마는 싱글벙글하며 아이에게 직접 열어보라고 채근했다. 테이프를 떼어내고 상자를 열자 핑크빛 백팩(책가방)이 나왔고, 밑에는 신발 주머니가 있었다. 책가방을 열자 먼저 하얀 실내화, 다음엔 열여덟 색깔의 사인펜과 크레파스 세트, 다음엔 필통, 다음엔 필통과 아이 이름이 새겨진 지우개, 다음엔 목에 매는 미니백이 나왔다. 모두 고급스러웠다. 보는 엄마나 아빠 할아버지 할머니는 감동했다. ‘요샌 회사에서도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까지 챙기나?’

가방 주머니에는 엽서가 한 장 들어있었다. “~주원이의 우아한 1학년을 부탁해요. 이국환 아저씨가.” 엄마가 다니는 회사 사장님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이는 그렇게 기뻐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선물들을 담담하게 꺼내서 진열하고 엽서를 읽은 뒤, 담담한 표정으로 선물들을 가방 속에 넣었다.

아이는 졸업식이 가까워지면서 진학 이야기만 나오면 이런 말을 하고는 했다.

“나, 유치원 졸업하고 싶지 않아. 졸업식이 없었으면 좋겠어.”

“유치원 졸업해야 초등학교 가지.”

“싫어.”

“초등학교에 가면 더 많은 친구랑 만나게 될 텐데.”

“그래도 싫어.”     

졸업하는 날 아침 아이가 꿈속에서까지 아이들이랑 실컷 놀았던 것은 그 연장이었던 것 같다. 헤어지는 게 얼마나 안타까웠으면~, 할아버지는 무감각했다.

봄이와의 여행도 포기했다

아이 반 친구들은 대부분 같은 학교에 들어간다. 18명 가운데 12명이 여의도초등학교 입학 예정이다. 일원초등학교, 목동의 초등학교에 각 1명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4명도 여의도의 다른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학원이든 식당이든 어디서든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아이는 정든 아이들, 선생님과 헤어지고, 정든 유치원을 떠나야 하는 것이 그렇게 가슴 아팠다.

졸업식 전주, 아이는 봄이와 시헌이가 제 부모들과 함께 가는 2박3일 속초 여행에 합류하기로 했었다. 엄마 아빠는 따라갈 수 없다고 하는 데도 봄이의 요청을 앞뒤 안 가리고 수락했다. 그러나 이틀 뒤 아이는 여행을 포기했다. 졸업을 앞두고 유치원이 마련한 행사 때문이었다. 아이는 지구 끝까지 같이 갈 것 같은 보미와의 여행 대신 머잖아 헤어질 유치원 아이들과 노는 것을 선택했다.

과자 파티를 한 날 아이는 얼마나 신났는지, 집에 와서도 흥분이 가시지 않았다. “아이들이 모두 한 가지 이상 과자를 가져왔어. 나는 뻥소리(뻥튀기) 가져갔는데. 전철방 가져온 아이도 있고 초코송이 잔뜩 가져온 아이도 있고. 나무 반 책상에 과자가 수북했어. 얼마나 먹었는지 아직 입에서 과자 냄새가 나. 후~.”     

'우리 다시 만나요' 합창하는 동안, 아이들은 시무룩한데 엄마 아빠만 신났다.

아이 엄마 이야기로는 아이는 졸업식에서 거의 웃질 않더란다. 예쁜 졸업식 예복을 입고서도 그랬고, 교장 선생님께서 주시는 졸업장을 받을 때도 그랬고, 아이들과 함께 ‘우리 다시 만나요’ 노래를 합창할 때도 그랬고, 아이들과 예복을 벗고 집에 돌아가기 전 빙 둘러서서 함께 인사를 나눌 때도 그랬다고 한다. 참관하러 온 엄마 아빠 혹은 할아버지 할머니만 싱글벙글 신나 하더란다.     

선생님, 안녕

유치원으로 올라가는 2층 계단 중간엔 이런 글이 걸려 있다. 레지오 교육의 창시자인 로리스 말라구찌의 철학과 신념을 요약한 내용이다.

“어린이는 가지고 있습니다.

백 가지의 언어, 백 가지의 손, 백 가지의 생각,

백 가지의 생각하는 방법, 놀이하는 방법, 말하는 방법을.

백 가지의 귀 기울여 듣고, 감탄하고, 사랑하는 방법,

발견해나갈 백 가지의 세상, 고안해낼 백 가지의 세상, 꿈꾸는 백 가지의 세상을.     

어린이는 백 가지의 언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아흔아홉 가지는 훔쳐가 버립니다.     

사람들은 어린이에게 말하기를;

손을 써서 생각하지 말라, 머리를 써서 생각하지 말라

듣기만 하고 말은 하지 말라, 기쁨은 느끼지 말고 이해만 해라

친구들아, 안녕

또 사람들은 어린이에게 말하기를:

작업과 놀이, 현실과 환상, 과학과 상상, 하늘과 땅, 논리와 꿈들은

같이 섞여질 수 없는 것들이라고 합니다.     

그러고 나서 사람들이 말하기를

아이들에게는 백 가지가 없다.      

하지만 어린이는 말합니다.

천만에요, 우리에겐 백가 지가 있어요.”

맞다. 배워야 할 사람은 아이가 아니라 어른이다.

어른은 아이를 가르친다면서 아이들의 신비한 능력을 하나둘 없애버린다. 예민한 감각을 무디게 하고 신비한 감수성을 눈멀게 하고, 공감과 연민을 없애고, 꿈과 소망을 하나둘 없앤다. 아이들이 저마다 아름다운 나무로 자라 숲이 되도록 하지 않고, 모든 아이를 벌목해서 쓸 재목으로 똑같이 키운다.

유치원을 떠나 정규교육과정으로 들어가면, 아이에 대한 전정 작업은 본격화한다. 학교 탓을 하지만, 앞뒤 따져보면 꼭 그것만도 아니다. 학교에 강전정을 요구하는 것은 우리 사회를 이끌어간다는 ‘배운 어른’들이고, 이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건 어쩌면 부모인지 모른다. 물론 아이가 그런 걱정까지 했을 리는 없다. 다만 아이의 예민한 감수성이 그 불길한 예감을 놓쳤을 리 또한 없다.


돌아보면(이건 할아버지 이야기다), 진학할 때마다 드는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현실이 되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나의 시간은 줄어들고, 시키는 일은 더 많아지고, 경쟁은 갈수록 심해졌다. 어느 순간 우리는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죽어라 달리고 있었다. 유치원을 나서는 아이는 이제 그 출발선에 서게 되는 건 아닐까? 할아버지는 불안하다.

유치원 입구 다른 벽면엔 이런 글그림도 걸려 있다. “사랑하는 아이들아,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이 되어라.” 할아버지가 꼭 하고 싶은 말이다. 한 마디 덧붙이고 싶다. “아이야, 네가 아름다워지면 세상도 아름다워진단다. 아름답게만 커다오. 우리도 노력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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