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편지 _타인을 위한 바늘과 실
저는 소방관을 ‘뜨개질하는 사람들’이라 부릅니다.
평범했던 제가 소방관이 되면서, 손에 바늘 하나와 실이 쥐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 바늘은 살을 뚫지 않습니다. 대지를 뚫고 하늘을 가르지요.
세상에 얼룩진 아픔과 괴로움을 재단하고, 다시 원래의 시간과 공간으로 봉합합니다.
검게 불타고 빨갛게 물들었던 공간을 시간과 협력하여 다시 초록의 땅으로, 새파란 하늘로 채웁니다.
제가 소방관을 ‘뜨개질하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근무를 마친 뒤 쉬는 동안, 출동 때 사용했던 바늘과 실을 닦고 보기 좋게 정돈해놓습니다.
이 작업은 생각보다 꽤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합니다.
또 다른 출동을 위해 재정비하는 이 시간이 저는 출동보다 더 괴롭게 느껴집니다.
오히려 현장에서는 그리 많은 생각이 들진 않습니다.
사고 현장에서는 최대한의 집중력을 발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화재와 나, 현장과 나, 그뿐입니다.
그러나 모든 현장이 마무리되고 다시 돌아오면 수많은 물음표가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그때 이렇게 할걸, 왜 이렇게 못했지, 이랬으면 어땠을까, 하는 물음들이 부유합니다.
그러다 보면 이내 조용하던 머릿속이 금세 시끌벅적해집니다.
부족한 부분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면 아쉬움과 조바심에 뒤척이기도 하고, 이따금 자책하기도 합니다.
이때 손에 있는 바늘을 집어 상처 난 마음을 꿰매 보려고 애쓰지만, 바늘은 살에 스며들지 않습니다.
우리가 들고 있는 바늘은 제 몸에 쓰려고 하는 순간 닳아버리기 때문입니다.
소방관들이 쥐고 있는 바늘은 철저히 타인을 위해 만들어졌고, 타인을 위해 쓰입니다.
자신에게 쓰려고 하면 이내 닳아 없어져 버립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요.
자신에게 쓰기엔 과분해 보여서, 동료들을 뒤로하고 나만 아픈 척하는 것만 같아서, 강해야만 할 소방관이 타인의 시선으론 약한 사람으로 비칠 것 같아서, 그리고 혹시 가족들이 걱정하는 모습을 보게 될까 봐.
여전히 소방관의 불안 지수는 높고, 정신건강은 위험한 수준입니다.
2016년 시사저널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소방관의 우울증과 불안장애가 일반인의 15배에 달한다고 합니다. 실제로 저와 함께 일하는 구급대원 선배는 영아 심정지 상황을 맞닥뜨린 뒤 한동안 인형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때 그 긴박하고 어지러운 순간에 마주친 아이의 모습이 떠올라서 인형을 보면 괴로웠다고 토로했습니다.
우울한 환경에 빈번히 놓이는 이런 상황 때문인지 우리나라에선 현장에서 순직하는 소방관의 수보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소방관의 수가 더 많습니다. 자살이 순직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여러 가지 이유로 타인을 위한 바늘과 실은 가지런히 정돈하면서도
정작 제 몸은 보살피기 어려운 형국입니다.
저도 한동안 마음 앓이를 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달은 유난히 동물구조 출동이 많았습니다.
저는 인명구조 출동보다 동물구조 출동을 다녀오면 더 마음이 쓰입니다. 사람은 말을 할 수 있지만 동물은 말을 할 수 없지요. 현장에 도착하면 대부분 우리를 보고 안심하곤 합니다. 주황색 소방복을 입은, 노란색 방화복을 입은 우리가 ‘나를 구해줄 사람’이라는 인식이 무의식적으로 머리 깊숙이 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소방관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통증이 약간 완화되거나 딱히 어떤 치료를 제공하지 않았는데도 증세가 호전되는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하지만 동물은 우리의 모습을 보면 소스라치게 놀라 필사적으로 도망칩니다. 다가오는 우리를 끔찍한 적으로 간주하지요. 고양이의 경우 하악질을 하며 잔뜩 경계하곤 도망치며, 큰 동물의 경우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위협합니다. 안타깝지만 우리가 동물구조 현장에 도착하면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을 목격하는 경우가 다수입니다. 피를 뚝뚝 흘리고 있거나, 어디가 부러져 거동할 수 없는 심각한 상태 말입니다. 그런데도 동물들은 우리를 보자마자 마치 저승사자를 본 것처럼 부러진 다리를 질질 끌거나 몸을 이리저리 뒤집으면서까지 자리를 피합니다. 우리가 자신을 도우러 온 지도 까맣게 모른 채 말입니다.
얼마 전, 도로에 고라니가 쓰러져있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했습니다.
2018년 도로 위에 개가 있다는 단순 구조 신고를 받고 출동한 대원 중 세 명의 소방관이 목숨을 잃은 안타까운 사고가 있었습니다. 사고 이후 생활안전출동에 대한 기준안이 개정되었습니다. 개정 이후, 국민의 안전을 해치지 않을 정도의 평범한 동물구조 출동은 생활안전출동에 해당하지 않아 출동 거절 사유에 포함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우리 센터에 들어온 신고 내용은 ‘고라니가 차선 한가운데 주저앉아 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경우엔 도로를 통행하는 차량에 추가 안전사고가 벌어질 수 있어, 출동을 하는 게 옳았습니다.
몇 분을 달려 현장에서 목격한 고라니는 몸을 심하게 부딪쳤는지 우리를 보고도 주저앉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눈만 끔뻑거렸습니다. 고요한 대치 상황이 이어졌습니다.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자 깜짝 놀라 일순간 몸을 벌떡 일으켰습니다. 일전에 차량에 머리를 심하게 부딪힌 모양인지 고라니는 8자를 그리며 기괴하게 걸었고, 철퍼덕 쓰러진 뒤 다시 여러 차례 반복했습니다.
그 끔찍한 노력에도 고라니가 우리를 피해 간 거리는 고작 10미터도 되지 않았습니다. 서너 발자국만 걸어도 고라니에게 바로 닿을 정도였습니다.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을 고라니에겐 끔찍한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동물구조협회에 연락하여 인계를 요청했더니 시간이 꽤 걸린다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우선 고라니를 센터로 데려오고, 센터에서 관계자가 다시 고라니를 실어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팀장님이 고라니를 뜰채로 잡으라는 명령을 내렸고, 저는 고라니를 다시 마주했습니다. 성큼성큼 걸어 고라니 쪽으로 향했는데 그러다 문득 고라니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고라니의 눈이 그렇게 예쁘게 생긴 줄은 그 순간 처음 알았습니다.
그때 바라본 고라니의 눈은 아름답고도 슬펐습니다. 아주 깊고 어두운 바다를 보는 듯했습니다. 고라니는 죽음을 직감이라도 한 듯 제게 몸을 맡겼습니다. 저는 고라니를 뜰채에 담으려 앞발과 두발을 양손으로 잡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고라니가 요동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별안간 좌우로 몸을 퍼드득 비틀었습니다. 불과 몇 초 전, 얌전했던 고라니는 다시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든 듯, 반드시 살아야겠다는 의지로 몸을 미친 듯이 흔들기 시작했습니다.
‘뚜두둑’
고라니의 발목이 끊어지는 느낌이 고스란히 손에 전해졌습니다. 이 순간이 얼마나 괴로우면 이렇게까지 필사적이었을까요. 저는 불쾌한 손끝의 느낌을 여태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눈도 문득 생각이 나곤 합니다.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날의 기억이 침전물처럼 가라앉아 있습니다. 다행히 심란했던 그날의 마음은 환절기 잠깐 머물다가는 감기처럼 앓다가 어느새 사라졌습니다. 언제 있었는지도 모르게 말이죠. 그때를 생각하면 왠지 모르게 하루 대부분이 지독하게 우울하고 힘들었습니다.
함께 출동했던 선배들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습니다. 혹시 저만 유난을 떠는 건 아닌가 싶어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함구하고, 억지로 고개를 숙이고, 기억 밑으로 푹 파묻었습니다.
그때 믿을 수 있는 선배에게 먼저 한마디 말을 건넸으면 어땠을까 생각합니다.
더 일찍, 그 길었던 우울의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곱씹습니다.
소방관의 바늘이 본인에게 작용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자신의 상처가 쉽게 아물지 않고 자꾸 덧난다면 말이죠.
혹시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저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곁에 있는 동료의 손을 빌려 그의 바늘로 살을 스미고, 그의 실로 상처를 꿰매 보는 건 어떨까요.
같은 순간을 함께 공유한 사람과는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감정적으로 더 많은 부분을 나눌 수 있습니다.
함께 호흡하고 현장에 출동하는 동료의 한마디는,
어쩌면 주위 그 어떤 사람의 말보다 큰 힘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나와 동료, 국민을 함께 구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대한민국 소방관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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