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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리만쥬 Dec 18. 2022

10일차 레오폴드 미술관

2020년 2월 23일, 오스트리아 비엔나

호스트 비비안과의 대화

아침을 챙겨 부엌으로 나왔다. 단정하고 비비안의 취향이 가득 묻어나는 예쁜 부엌의 소파에 앉아 아침을 먹고 있었다. 잠시 후 비비안도 나와 부엌 카운터에 앉아 아침을 먹었고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비비안이 한국에 왔던 얘기, 그때의 인상 등에 대해 얘기도 나누고, 에곤 실레를 무척 좋아한다고 했다. 비엔나에 온 지는 5년 정도 되었고. 독일 베를린은 활기찬 느낌인데 비엔나는 차분한 느낌이라서 좋다고 했다. 나도 공감했다. 베를린은 아직 안 가봤지만 왠지 힙하고 차갑고 활기찬 느낌일 것 같고, 비엔나는 정말 차분하고 따뜻한 느낌이다. 비엔나에 오기 전에는 스웨덴인가 스위스에 살았다고 한 것 같다. 유럽은 국경 간 이동도 자유롭고 국가 간 행정적, 사회적으로 통용되는게 많다 보니 한 국가에서 오래 살지 않고 원한다면 다른 국가에서 일하고 또 다른 국가에서 살고 이런 게 정말 좋을 것 같다. 비비안하고 얘기하느라 조금 늦게 출발해서 바쁘게 움직였다. 오늘 저녁 부다페스트로 가기 때문에, 비엔나 중앙역에 짐을 맡기고 마지막 남은 하루를 알차게 보내야 하는 아주 바쁜 날이 시작된다!



호프부르프 왕궁 미사에서 만난 빈 소년 합창단

중앙역에 짐을 맡겨두고 호프부르크 왕궁에 미사를 보러 갔다. 일요일 아침 미사에 빈소년합창단이 참여한다는 걸 알고, 일부러 부다페스트로 가는 버스를 늦췄다. 조금 늦었는데 이렇게 바쁠 때 꼭 트램을 거꾸로 탄다.. 동행을 만나기로 해서 많이 기다리게 할까 봐 초조했다. 역에 짐을 보관하고 엄청 뛰어서 다행히 늦지 않게 도착했다. 다행히 사람이 많지 않아서 15분 정도 기다린 후 입장할 수 있었다. 미사는 조금 지루했지만 빈소년합창단의 노랫소리 덕분에 견딜 수 있었고, 미사가 끝난 후에는 합창단이 내려와서 1곡 공연을 해주었다. 아침부터 귀와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 남은 여행 무사히 마치길, 한국에 코로나가 빨리 잠잠해지기를, 그리고 우리 가족의 건강을 바라며 성금도 넣었다. 물론 빈소년합창단의 공연에 대한 고마움도 보태서. 부다페스트로 가는 버스 시간 늦추길 정말 정말 잘했다!



세월이 느껴지는 투박한 카페, 하벨카

점심 먹으러 가는 길, 가려던 식당 바로 옆에 '하벨카 커피'가 있었다! 책에서 본 곳이라 망설임 없이 들어갔다. 세월이 느껴지는 공간이 참 근사하고 멋있었다. 흰머리가 지긋한 웨이터는 투박하지만 친절한 츤데레 스타일이었다. 한 곳에서 신문을 읽으며 커피를 마시는 노신사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 터줏대감인 것 같다. 나 빼고 모두 여기가 아주 익숙한 곳인 것처럼 보였다. 커피 맛도 훌륭하고, 왠지 센트럴보다 더 좋았다. 여기서는 오래된 카페에는 다들 나무 철을 한 신문을 비치해놓는데, 스타벅스에도 신문이 있을지 궁금해졌다. (나중에 가보려고 했는데 까먹었다.)


투박하지만 포근한 느낌이 참 좋다



할머니가 그리워지는 맛, 타펠스피츠

비엔나 가이드님이 추천해 준 요리인 '타펠스피츠'를 먹으러 왔다. 처음 먹어보는 요리였는데 이거 진짜 진짜 맛있다! 고기는 갈비탕 고기 같은데, 꽤 두께가 있고 엄청 연하고 장조림 찢기듯이 찢긴다. 국물은 약간 연한 스튜 맛이고, 하나도 안 짜고 간도 적절하고 무엇보다 고기 찍어먹는 소스가 정말 맛있었다. 겨자+유자 소스랑 마요네스 소스인데, 고기는 겨자 소스와 같이 먹고, 감자는 마요네스 소스랑 먹으니 환상적이었다. 식당에서 음식 기다리는 동안 할머니랑 영상통화를 했다. 할아버지 제사 때문에 할머니가 집에 오신 덕분에 영상통화를 할 수 있었다. 코로나 때문에 할머니 걱정이 어마어마하다. 음식 먹으면서 할머니 생각이 많이 났다. 할머니도 분명 좋아하시고 잘 드실 것 같아서, 나만 이렇게 맛있게 먹는 게 아쉬웠다.



사랑해요 레오폴드 미술관

밥 맛있게 먹고 미술관 가는 길, 갑자기 비가 떨어져서 빨리 미술관으로 피신했다. 역시 유럽의 날씨는 종잡을 수 없다. 어제 날 좋을 때 여기저기 돌아다니길 너무 잘했지~ 레오폴드 미술관에서 마침 훈데르트바서&에곤실레 전을 하고 있었다. 훈데르트바서는 원래 관심이 있었고, 에곤실레는 여기 와서 관심이 많이 생긴 예술가여서 딱 이 둘의 연계 전시를 보다니 정말 운이 좋았다! 작품의 양이 엄청나게 방대하다. 어린아이들이 체험학습인 듯 선생님과 단체관람을 하고 있었다. 소위 내로라하는 걸작들을 어릴 때부터 이렇게 쉽게 접하고 또 자유롭게 즐기고 이야기 나누는 환경이 참 좋아 보였다. 부러움! 연계전시만 둘러봐도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클림트 그림도 빠짐없이 보고, 4층과 3층을 차례대로 보니 다리가 너무 아파서 결국 1층은 보지도 못했다. 잘 모르는 작품들이기도 하고 대충 훑고 기념품 숍까지 구경하고 나왔더니 무려 다섯 시! 여기에 네 시간이나 있었다. 마지막날 보려고 여기만 남겨두길 정말 잘했다.


 훈데르트바서&에곤실레 전
빠질 수 없는 클림트



가슴이 벌렁벌렁 죄 짓고는 못살겠다(feat. 무임승차)

레오폴드 미술관 근처에 마침 'ANKER' 빵집이 있길래 들러 보았다. 가이드님이 추천해 준 가성비 갑 치즈케이크! 0.99유로에 이런 케이크라니 진짜 만족스럽다. 치즈케이크를 마지막으로 이제 부다페스트로 떠나야 한다. 비엔나카드의 교통권이 만료되어서 역까지 걸어갈 계획이었는데, 종일 서서 전시보고 왔더니 다리가 너무 아파서 도저히 못 걷겠는 거다. 원래 1일권을 사야 하는데 교통권을 사러 가기도 너무 힘들고 두세 정거장밖에 안되니 왠지 사기 아까워서 그냥 트램을 탔다.. 그랬더니 진짜 가슴이 벌렁벌렁하고 너무 마음이 불편하고 불안해서 빨리 내리고 싶어서 혼났다.. 난 진짜 죄짓고는 못 살겠다 싶어 당연한 거지만 그 이후에는 아무리 짧은 거리이고 아무리 비싼 교통권이라도 다 샀다. 비엔나 무임승차해서 정말 미안합니다..



온갖 생각에 잠기기 좋은 야간버스

부다페스트행 야간버스에 탔다. 오늘의 노래는 검정치마의 '틀린 질문'. "나에게 뭐든 물어봐. 틀린 질문도 괜찮아. 알잖아  항상 똑같아. 대답은 바르게 해줄게."라는 가사가  든든하고 따뜻하다. 노래를 듣는데 왠지 눈물이   같은 느낌이다. (눈물은 나지 않았지만) 검정치마와 짙은의 노래를  들으며 국경을 넘어 헝가리로 간다. 잠도 조금 자고, 자다가 깨면 노래도 듣고,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다. 쓸데 없는 생각을 한참 하다가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창밖 풍경을 보며  때리기도 하고. 여행의 좋은 점은 이런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도 죄책감이 없다는 . 마음 놓고  흘려보낸다. 이런 시간은 뜻밖에 여행  가장 좋았던 시간으로 오래오래 기억되기도 한다.


부다페스트행 야간버스에서의 단상

#훈데르트바서
훈테르트바서는 괴짜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자기의 말과 신념을 그대로 실천하며 살아간 진정 운동가이자 예술가였다. 실천하는 삶이 정말 멋지다. 특히 묘비명!

#부모님
훈테르트바서가 유학 중 자신의 어머니에게 쓴 편지 중 '엄마는 자랑스러운 아들을 갖게 될 거라고, 사실 이미 그렇다'라는 말이 인상 깊었다. 나도 우리 엄마, 아빠에게 해주고 싶은 말. 자신 있게 하면 좋겠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다. 건강한 몸과 마음을 갖게 해준 부모님께 항상 감사하다. 나는 행복한데 엄마 아빠도 행복할지 모르겠다. 엄마 아빠는 항상 나에게 미안해하는 것 같아서 엄마 아빠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엄마 아빠가 진심으로 행복했으면 좋겠다.

#베를린과 비엔나
오스트리아와 독일은 인접해서 같은 역사를 공유하고 사회문화적으로도 아주 유사하지만, 왠지 독일은 힙하고 차가운 느낌일 것 같은데(아직 안 가봐서 모르겠지만) 오스트리아는 차분하고 따듯한 느낌이다. 역사, 문화, 예술이 아주 자연스럽게 물결처럼 흘러 흘러 이어져 지금도 계속 새로운 것을 생산해 내는 건강한 예술 도시의 느낌. 차분하고 오래된 것들 투성인데 생명력이 가득한 힘 있는 도시다. 정말이지 이번 여행은 오스트리아의 재발견!

#비엔나에서 가장 좋았던 것
특히 제체시온이 아주 좋았다. 분리파에 대해 알게 된 후 제체시온이 워낙 상징적인 곳이어서 꼭 가고 싶었다. 클림트와 분리파의 혁신 정신도 멋있지만, 개인적으로 나도 많은 변화를 앞두고 있어서 제체시온의 기운을 받고 싶었달까!



부다페스트의 첫 인상

저녁 10시쯤 부다페스트에 도착했다. 점점 늦은 시간에 다니는 게 무섭지 않고 다니는 시간이 늦어지고 있다. 유럽의 트램이나 지하철은 한국과 다르게 마주 보는 좌석이 많은데, 거기 앉아 가까이서 눈을 맞추고 얘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왠지 정다워 보인다. 야간버스에서 내려 트램을 타고 숙소로 가는 길, 세체니 다리도 건너고 창밖으로는 그 유명한 부다페스트의 야경이 펼쳐진다. 야경 느낌이 잘츠부르크랑 많이 다르다. 어부의 요새, 국회의사당 같은 굵직한 랜드마크들이 도시의 무게중심을 탁 잡아주는 느낌이다. 그리고 잘츠부르크에 비해서 훨씬 노후하고 깔끔하지 않은 느낌. 부다페스트 트램에 타자마자 레알 찐 부랑자를 두 명이나 만났다. 잘츠와 비엔나에서 본 부랑자들은 마치 직업(?) 부랑자들 같았는데, 여기는 트램 내리자마자 쓰레기통을 뒤진다. 강렬한 부다페스트의 첫 인상.




2020. 2. 14 ~ 3. 11

퇴사 후 떠난 27일간의 유럽여행 일기를 꺼내 읽어본다.

복잡한 마음을 가득 품고 간 '퇴사 후' 여행이었는데, 다시 꺼내 읽어보니 다신 없을 '코로나 이전' 여행기로 다가오는 27일간의 유럽 여행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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