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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리만쥬 Dec 03. 2020

2일차 스프릿츠에 빠지다

2020년 2월 15일, 이탈리아 베니스



햇볕 좋은 식당 테라스에서 즐기는 점심


숙소 사람들이 다들 부라노섬에 가길래 잠시 나도 갈까 고민하다가 결국 안 갔다. 거기는 무엇보다 예쁜 사진을 찍으러 가는 곳인데, 사진 찍어줄 사람도 없이 굳이 가고 싶지 않기도 했고, 무엇보다 이번 여행은 혼자 유유자적 이곳저곳을 걸어 다니고 싶었다. 어제 본 베니스의 한적한 풍경, 이 곳의 일상이 벌어지고 있는 골목 곳곳을 돌아다니는 게 너무 좋았다. 느지막하게 나와 리알토 마켓과 리알토 다리를 구경하고 나서 다리 근처 햇살 좋은 테라스가 있는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었다. 스프릿츠를 처음 먹어봤는데 완전 내 스타일이었다! 달콤한데 약간 도수가 있어서 정말 맛있었다. 이 이후로 식사 때마다 사 먹었다. 아주 만족스러운 식사여서 팁까지 후하게 주고 약간 취기가 올라 기분 최고였다. 



스프릿츠에 빠지다



그 유명한 리알토 다리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에 들어서면 보이는 첫 작품, 르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과 알렉산더 칼더의 모빌


베니스에서 가장 사랑하는 장소,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


규모도 작고 4년 전에도 와봤던 곳이지만 베니스에 온다면 꼭 또 오고 싶었다. 피카소, 잭슨 플록, 칸딘스키, 몬드리안, 살바도르 달리 등 내로라하는 거장들의 작품들을 보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이 공간 자체가 정말 사랑스럽다. 베니스의 운하를 품은 정원과 커다란 창문 한가득 들어오는 햇빛, 수많은 현대미술 작품들에 둘러싸여 페기는 이 집에서 얼마나 행복한 나날을 보냈을까. 특히 4년 전에 여기서 보았던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이 무척 다시 보고 싶었다. 그 그림이 있던 위치까지 선명하게 내 기억에 남아있다고 믿었는데, 내 기억이 왜곡되었던 건지 생각했던 위치도 조금 다르고 심지어 생각했던 그림도 아니었다. 조금 충격이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또 새로운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입장하자마자 있는 르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과 그 앞에 매달린 거대한 알렉산더 칼더의 모빌이 인상 깊었다. 모빌은 아이 장난감 혹은 가벼운 인테리어 소품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이 작품은 웅장한 하나의 조각상 같았다. 천장에 매달려 있는 모빌이 처음 등장한 것은 매우 획기적인 일이었다고 한다. 조각이란 땅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라는 기존의 개념을 벗어나 천장에 매달아 움직이도록 만든 새로운 형태였기 때문이다.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에 들어서 가장 처음 보이는 이 공간에 자리 잡은 멋지고 웅장한 모빌, 그리고 앞에 있는 르네의 그림. 빛이 한가득 들어오는 이 공간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작품이다. 다음에 또 온다면 오늘 못 간 '카페사로 미술관'에 꼭 가봐야지, 다짐했지만 아마도 이 곳에 또 오고 싶겠지


 


베니스 카니발 맛보기


이번 여행의 가장 중요한 버킷리스트 중 하나는 바로 '베니스 카니발'이었다. 저녁 5시 어제 같이 바에 갔던 언니와 산마크로 광장에서 만나 카니발 축제를 구경하기로 했는데, 보조배터리가 고장 나서 배터리는 없고 갑자기 유심도 안 터지는 거다! 다행히 광장 근처 카페에서 와이파이가 잘 되어서 언니와 연락하고 무사히 만났다. 숙소 저녁 시간 전까지 한 시간 정도 광장에서 카니발 구경을 했다. 여기 주민들은 일 년 내내 이 축제만을 기다려온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코스튬을 차려입고 축제를 한껏 즐기고 있었다. 넓은 광장이 어마어마한 사람들로 가득 찼고 정말 황홀했다! 우리도 이 축제를 같이 즐기고 싶어서 작은 가면을 하나 샀다. 이렇게 모두가 참여하는 축제인 줄 알았다면 한국에서 뭐라도 준비해올 걸 아쉬웠다. 한복이나 갓 같은 전통의상을 챙겨 왔으면 훨씬 재밌었을 것 같다! 언젠가 꼭 한복을 입고 베니스 카니발에 다시 와서 즐겨야지



하늘까지 비현실적으로 황홀했던 산마르코 광장




활기찬 베니스의 밤


숙소에서 저녁을 먹고 다시 나와서 스프릿츠를 마시러 갔다. 베니스 곳곳을 엄청나게 돌아다니다 정말 동네 사람들만 갈 것 같은 작고 소박한 바를 찾았다. 스프릿츠가 2유로밖에 안 하고, 주인도 친절하고, 바 밖에 계단에서는 사람들이 소소하게 모여 스프릿츠를 마시고 있고, 바 안에는 우리밖에 없었다. 사진도 찍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꽤나 멀리 왔지만, 이제 어느 정도는 베니스의 지리에 익숙해져서 구글 지도 없이도 대략 숙소를 찾아갈 수 있었다. 여기의 골목들은 바로 물 옆에 나 있어서 술 먹고 발을 헛디디면 바로 저세상 갈 것 같다, 는 시시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걸었다. 생각해보니 수상버스 정류장에도 간단한 안전장치 하나 없는 게 조금 신기하기는 하다. 카니발 기간이어서 더 그럴 수도 있지만 역시나 베니스는 여느 유럽의 도시들과 달리 늦게까지 하는 가게도 많고 전체적으로 아주 활기찬 느낌이다. 숙소 주변에 작은 술집들도 늦은 시간까지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젊은 사람들로 가득하고 술집도 힙해서 이 동네에서는 꽤나 유명한 곳인가 싶기도 했다. 여행자이지만 이 곳 사람들만 아는 듯한 가게를 발견하면, 왠지 뿌듯하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이 생생함을 잊고 싶지 않아서




2020. 2. 14 ~ 3. 11 

퇴사 후 떠난 27일간의 유럽여행 일기를 꺼내 읽어본다. 

복잡한 마음을 가득 품고 간 '퇴사 후'여행이었는데, 

다시 꺼내 읽어보니 다신 없을 '코로나 이전' 여행기로 다가오는 27일간의 유럽 여행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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