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18일, 오스트리아 운터스베르크
사랑스러운 호텔에서의 아침
이 호텔은 정말이지 너무나 사랑스럽다. 조식 구성도 괜찮을 뿐만 아니라 식당도 아기자기하니 정말 예쁘다. 식당에 들어서면 인상 좋은 할머니께서 '차 혹은 커피' 중 고르라고 물어보시고, 원하는 걸 말씀드리면 예쁜 티팟에 한가득 갖다 주신다. 기분 좋은 아침이다. 오늘은 날씨도 너무 좋아서 잘츠부르크 근교에 위치한 '운터스베르크'에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기대했던 유럽의 겨울 풍경
올 겨울 한국은 유독 따듯해서 눈을 한 번도 못 봤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서 이렇게 눈 쌓인 풍경을 꼭 보고 싶었는데, 잘츠부르크에서 볼 수 있을 줄이야! 정말 근사하고 멋졌다. 잘츠부르크 카드로 케이블카도 무료로 타고, 진짜 혜자 카드임! 케이블카가 중간에 갑자기 속도가 빨라지는 구간이 있는데 진짜 무서워서 주저앉을 뻔했다. 케이블에 내려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눈밭을 산책했다. 역시나 혼자 온 사람은 나뿐이었다. 한국인 한 그룹이 있었는데, 개인으로 신청해서 소규모 그룹으로 매칭 해주는 형태의 여행을 하는 것 같았다. 그중 한 여자분이 나한테 혼자 온 거냐며 대단하다고 자기도 나중에 꼭 혼자 오고 싶다고 해서 괜히 뿌듯했다. 혼자 여행하는 사람을 보면 왠지 당당하고 멋져 보였는데, 지금 내가 그런 모습일까 싶어서 약간 우쭐하고 기분이 좋아졌다. 운터스베르크의 짧은 겨울여행을 마치고, 피곤했는지 시내로 돌아오는 길에 버스에서 엄청 졸았다. 이 좋은 날 아름다운 풍경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 어떻게든 눈에 담고 싶었지만, 그야말로 꾸벅꾸벅- 해드벵잉 하며 졸았다. 점심은 맛집을 가보자 싶어서 트립어드바이저 순위가 높은 식당에 찾아가 굴라쉬를 먹어보았다. 한국 갈비찜 같기도 한데 약간 향신료 맛이 나서 이국적인 맛이 꽤 괜찮았다.
싸구려 글뤼바인과 함께한 잘츠 강 일몰
오늘은 강변에서 일몰을 보고 싶어서 잘츠부르크 강을 따라 쭉 걸었다. 한 남자가 강변에 자리 잡고 앉아 혼자 담배를 피우며 와인을 먹고 있었다. 운치 있어 보이기보다 왠지 사연 있고 쓸쓸해 보였다. 너무 쓸쓸해 보여서 지나쳐 갔다가도 괜히 뒤돌아서 보게 되었다. 나는 마카르트 다리가 보이는 곳에 앉아 일몰을 보고 싶었다. 강변을 따라 자전거 타는 사람, 조깅하는 사람이 참 많았다. '여행지에서 조깅하기'도 이번 여행 버킷리스트 중 하나인데, 베를린 에어비앤비에 가면 꼭 해야지 다짐했다. (하지만 못 했다. 평소 조깅에 전혀 취미가 없었기 때문인지, 조깅이 버킷리스트였다는 것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날씨가 쌀쌀해서 따뜻한 글뤼바인을 먹고 싶었다. 가게가 많은 강 반대쪽으로 다리를 건너갔다. 이제 무단횡단은 식은 죽 먹기. 싸구려 글뤼바인 한잔을 들고 다시 강변으로 돌아오니 가로등이 켜지기 시작하고 멀리서 종탑 소리가 들려온다. 오늘은 여기가 좋겠다! 한 벤치에 앉아 글뤼바인을 마시며 해가 완전히 질 때까지 한참을 앉아있었다. 근사한 노을은 아니었지만, 서서히 어둠이 깔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꽤 좋았다. 늦은 시간에도 새소리가 들려왔다. 벤치에 앉아 한참을 멍 때리면서 종탑의 종소리를 몇 번이나 듣고서야 일어났다.
Wild world
숙소로 돌아오는 길, 강 반대편에 아까 그 남자가 여전히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한 여자와 함께. 왠지 내가 안심이 되었다. 함께해줄 사람이 있는데 괜히 내가 쓸쓸하게 봤구나 싶어 웃기기도 하고. 어둠이 깔린 잘츠부르크 골목을 걸으며 숙소로 가는 길에 좋아하는 노래인 'Wild world'를 흥얼거렸다. 마치 내가 스킨스 시즌1 마지막 엔딩 장면의 주인공이 된 느낌이었다.
이 여행을 마치고 나면
어제부터 감기 기운으로 컨디션이 안 좋아서 그런지 밥이 먹고 싶어서 숙소 근처 마트에서 연어롤을 사 왔다. 마침 호텔 해피아워 시간이어서 로비에서 와인도 하나 샀다. 그리고 근사한 내 방에서 저녁을 즐겼다. 5일간의 여행을 돌아보며 정리를 해봤는데, 혼자 여행하는 건 처음이어서 온갖 사소한 것들에서 '내가 이걸 혼자 해냈다니!' 하면서 뿌듯함과 행복을 느끼고 있다. 혼자 야간열차를 타고, 서툰 영어로 체크인도 하고, 밤길도 잘 다니고, 횡단보도가 없어도 잘 건너고, 마트에서 눈치껏 셀프 결제도 하고, 호텔에서 와인을 주문하고, 근사한 방에서 나 홀로 시간을 보내고 이런 모든 사소한 것들. 어렵다고 느끼는 일들도 막상 해보면 사실은 별거 아닌 일들이 대부분인 것 같다. 이번 여행을 마치고 나면 그것만으로도 앞으로 뭐든 부딪쳐볼 만한 자신감이 생길 것 같다. (그랬으면 좋겠다.)
도시가 익숙해질 무렵 떠난다는 것
내일이면 '할슈타트'라는 새로운 도시로 떠난다. 각 도시가 조금 편해질 때쯤, 각 나라의 인사말이 조금 익숙해질 때쯤 다시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 '봉조르노'에서 '할로', '그라찌에'에서 '당케' 뭐 이런 사소한 인사말을 하나씩 익혀둔다. '올라~'라는 인사말은 유럽 어디에서도 쓰이는 공통 인사인 듯하다. '올라~' 어감도 좋고 너무 귀엽다! 무엇보다 인사말은 바뀌어도 눈 마주치면 미소 짓고 인사하는 분위기는 모두 한결같아 정답고 좋다.
2020. 2. 14 ~ 3. 11
퇴사 후 떠난 27일간의 유럽여행 일기를 꺼내 읽어본다.
복잡한 마음을 가득 품고 간 '퇴사 후' 여행이었는데, 다시 꺼내 읽어보니 다신 없을 '코로나 이전' 여행기로 다가오는 27일 간의 유럽 여행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