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리즈 애니메이션 10부작을 기획하며 시나리오를 쓸 때의 일입니다. 당시 업체의 대표님은 공장에서 찍어내듯 엉터리로 만드는 애니메이션이 아닌,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도 계속 기억되는 작품을 만들자고 했습니다. 창작자 입장에서도 이야기에 공을 들이자는 게 매우 반가웠던 저는 나름대로 자료 조사도 열심히 하고, 관련 인물을 인터뷰하는 등 시나리오에 공을 들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10편의 시나리오가 완성되었고, 저는 스토리보더, 그리고 어시스턴트 작가와 함께 스토리보드 회의에 들어갔습니다.(작가가 연출자도 아니도 무슨 스토리보드 회의냐 싶으시겠지만 현장에 따라, 프로젝트의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시나리오를 쓸 때 한 에피소드에서 인물의 내면적 변화가 조금 부족한 것 같아서 그것을 표편하는 플롯 라인을 추가했었습니다. 그리고 스토리보드 회의를 통해 이야기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봤을 때, 이 에피소드는 굳이 인물의 내면적 변화를 표현하지 않아도 이대로 충분하고, 오히려 내면적 변화를 제대로 표현하려면 커다란 수정이 불가피하며, 완성될 모습 또한 지금의 구성과는 사뭇 다를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인물의 내면적 변화를 표현하는 플롯 라인을 덜어내고자 했는데 반대 의견이 나왔습니다. 인물의 내면이 변화하는 걸 표현하지 않고 넘어가는 건 주인공의 매력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 너무 아깝다는 것이었습니다. 저 또한 인물의 내면이 변화하는 과정을 표현하는 작업이 매우 근사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내면이 변화하는 이야기는 때론 인물이 처한 상황이나 인물과 관계맺는 다른 인물과의 관계가 변하는 것보다 더 근원적이고 심층적인 변화를 그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만큼은 인물의 내면적 변화를 표현하는 게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제 생각은 변함이 없었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저는 설명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본 이유는 아래와 같습니다.
1.돈
이야기를 만드는 모든 과정은 시간, 시간은 인건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커다란 제약에서 자유롭다면 얼마든지 만든 것을 허물고 다시 만들 수 있지만 그런 경우는 많이 없습니다. 거기에 더해 만약 작업의 진행 과정이 시나리오 단계만 되었어도 저는 조금 더 진지하게 내면의 변화가 중심이 되는 플롯으로 이야기를 변경하는 걸 더욱 깊이 고려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때는 시나리오를 지나 스토리보드가 완성되었고 재차 수정이 되던 터라 이제는 정말로 이야기를 마무리해야 할 시점이었습니다.
2.내면의 변화가 없는 이야기도 필요하다
만약 이러한 수정 이슈가 발생한 이야기가 극장판 분량의 이야기였다면, 저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왕 만드는 거 디즈니나 픽사처럼 내면의 변화까지 표현하면 얼마나 멋지고 근사하겠습니까. 하지만 이것은 10편 짜리 기획 중 하나의 이야기이며, 저는 여러 개의 이야기를 만들 때 중요한 건 "다양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똑같이 양산한 10편의 에피소드를 소비하는 동안 감상자들이 피로감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10편의 이야기 모두 내면의 변화를 표현한다면 감상자들은 정확히 같은 이유로 이야기에 물리게 됩니다. 시리즈 애니메이션을 만들고자 할 때 양산형 구성을 피하고자 한다면 다양한 종류의 이야기가 필요하며, 다양한 종류의 변화를 표현하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저는 회의에서 음식을 통해 이를 비유했습니다. 사골국과 라면 둘 중 어떤 것이 더 좋은 음식인가. 끓이는 시간, 정성, 재료의 가치 등을 따져봤을 때 라면보다는 사골국에 점수를 더 주게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꼭 사골국이 라면보다 나은 음식인가 하면 그렇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저는 그 이유가 "음식이 좋은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음식 그 자체가 아닌,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사골국이 더 가치가 있고 비싸대도 사람은 사골국보다 라면을 더 먹고 싶을 때도 있기 마련입니다. 라면은 사골국에는 없는 영양소와 맛이 있고, 바로 그 때문에 사람들은 사골국이 아닌 라면을 먹기도 하는 것이니까요. 게다가 매일 같이 사골국을 만들어 먹어야 한다면 얼마나 공력이 많이 드는 일이겠습니까. 감정이든 음식이든 사람이라면 가리지 말고 골고루 먹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