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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명의 오소리 Oct 25. 2020

우리집 후라이팬에 휘영청 떠오른 보름달

집밥요정 오소리의 요리하는 글쓰기 (4)



살면서 지금껏 언니가 이렇게 취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회식을 마치고 고주망태가 된 언니가 대뜸 재워달라며 우리집 현관을 거칠게 박차고 들어온 날이었다. 대학생 시절 이후로 소주 한 병을 다 마신 게 12년 만이라고 했다. 형부에겐 걱정 말고 먼저 자라고 잘 말해 두었다- 를 시작으로 회사 생활에 대한 넋두리를 재잘대나 싶더니 화장도 안 지우고 꼬로록 잠들어 버린 게 아닌가. 이도 안 닦고 자면 술냄새 난다 민폐대왕아!!! 하고 등짝 스매싱을 날려 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언니를 재워 두고 칫솔과 상쾌환과 꿀물과 헛개나무차를 사러 편의점에 다녀오니, 그 와중에 동생 먹으랍시고 회식에서 남겨온 거대한 갈비탕 뼈다귀 한 대가 비닐봉지에 담긴 채 다소곳이 식탁위에 놓여 있었다. 라면에라도 넣어 먹으라고 신신당부하며 싸들고 온 것이었다. 




살다 보면 그런 날이 있다. 암만 열심히 살아 왔대도 자신이 하찮게 느껴지는 날. 통제가 안 되는 시끄러운 머리를, 아니 나의 전원을 꺼 버리고 싶은 날. 가을에서 겨울 넘어가는 이 계절이 암만 나에게 힘들다 해도 어찌나 서러움이 복받쳐 올라오던지, 바깥 산책을 하고 돌아오는 내내 고장난 테이프처럼 같은 생각만이 머리를 맴돌고 내 마음을 헤집어 놓고만 있었다. 모든 것을 잊기 위해 마냥 이불속에 파묻혀 잠드는 건 싫었다. 내 마음은 한결같이 몰두할 무언가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무엇에 푹 빠져야 깊은 수렁에서 허우적대는 내 마음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으려나. 간만에 책이라도 쌓아놓고 읽어야 하나, 이참에 넷플릭스를 결제해야 하나, 아니면 고전게임이라도 깔아야 하나.


집에 거의 도착해서야 깨달았다. 이렇게 마음이 허한 것은 결국 추위와 배고픔 때문이었음을. 

이 서글픔을 잠재우는 데에 필요한 것은, 내 안에서는 나올 수 없을 다른 온기였다.


새끼손가락만한 멸치 다섯 마리로 국물을 내서, 냉동실 한켠에 남아있던 비비고 만두 일곱 개를 넣고 소박한 만두국을 끓여 먹을 생각을 하며 냉동실 문을 열자, 

기억 한켠에 숨겨져 있던 '그것'이

떨어졌다.

만취한 언니가 소중히 싸들고 온 갈비탕 뼈다귀였다.


이 끼니를 대충 때워서는 안 되겠구나. 


마지막으로 가스불을 켰던 게 언제였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건 나도 우리집 가스렌지도 마찬가지였다. 족히 열댓 번은 가스불을 켰다 껐다 한 후에야 토도독- 하고 파란 불빛이 냄비 바닥을 데우기 시작했다. 다시백에 담긴 멸치 다섯 마리와 갈비탕 뼈가 푹푹 끓는 동안 편의점에서 계란을 사 왔다. 풀어놓은 계란물을 후라이팬에 샤샥 붓고 약불에 살금살금 지단을 부쳐내자 작은 부엌에 온기가 돌았다. 후라이팬에 보름달이 떴다. 

 

얼어 있던 만두를 국물에 담가 끓이는 동안 계란지단을 투박하게 썰었다. 흰색 노란색 나누어 곱게 썰어낸 가녀린 지단과는 달리, 도톰하게 썬 지단은 씹히는 맛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백에 담아 끓인 멸치는 건져 내고 다진 마늘과 잘게 썰어둔 파를 넣은 다음 소금과 후추로 간을 했다. 갈비탕 뼈와 만두 일곱 개, 끓는 국물에 계란지단과 김을 고명으로 얹었다. 한 그릇 해치우는 건 일도 아니었다. 따끈하고 뽀오얗고 짭조름하고도 포근한, 서러움을 조금이라도 보듬어줄 이 국물을 원했기에.


만취한 주제에 하나 남은 갈비탕 뼈다귀를 동생 주겠다고 싸들고 온 언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지금은 좀 어떤가 싶어 연락을 했다. 언니는 주말인데도 회사에 갇혀 있다고 했다. 그야말로 격무에 노고가 많은 처지였다. 차가운 반달이 뜬 코끝 시린 밤, 언니에게도 따끈한 국물이 건네는 소박한 위로가 필요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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