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밥요정 오소리의 요리하는 글쓰기 (11)
다른 사람들이 당연하게 누리는 것이 나에게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다. 애정하는 동네의 작은 카페에서 아이스 라떼를 마시며 노트북으로 글을 쓰는 소소함이, 내게는 큰맘먹고 준비해야 하는 큰 이벤트다. 알콜보다도 카페인이 지지리도 안 받는 바람에 디카페인 커피조차 멀리해야 하는 특이체질이기 때문이다. 커피를 마시고 카페인이 돌기 시작하면 즉각적으로 심장이 뛰고 손이 차가워지며 긴장을 겪는 심각한 각성 상태가 된다. 밤잠을 설치는 것은 기본, 다음 날에는 머리가 아프고, 속이 안 좋고, 심한 갈증을 겪는다. 영락없는 숙취 증세인데, 정작 술을 마신 것도 아니니 숙취해소 드링크제니 L-아르기닌이니 하는 것도 소용이 없다.
2주 전의 일요일 아침도 그랬다. 전날 오후 카페에서 좋다고 신나게 달린(?) 탓에 부글부글한 속을 달랠 무언가가 필요했다. 밖에는 비가 왔고, 라면을 사러 가기도 귀찮았고, 배달음식은 지겨웠고, 냉장고에는 대충 풀떼기만 가득했다. '먹을 수 있는 재료'가 한 가지 더 있다면, 카레에 넣어도 회생 불가능할 만큼 허브 향이 너무 강해서 냉동실에서 굴러다니고 있는 닭가슴살 큐브였다. 뜨끈하고 개운한 무언가를 만들어볼까 싶어서, 해방촌 어느 카페에서 먹었던 토마토 칠리수프를 생각하며 있는 것 다 때려넣은 야채 수프를 만들어 보았다.
[재료]
- 생토마토 엑기스 2팩 (약 200g, 홀토마토나 일반 토마토, 방울토마토로 대체 가능)
- 셀러리 약 1줄기 + 적당량의 셀러리 잎
- 강려크한 허브향의 닭가슴살 큐브 1팩(100g) 닭가슴살 큐브에 오레가노 잎을 한주먹 뿌려 씹어먹는 느낌이다 처치곤란을 겪고 있다. 단독으로 먹기에는 많이 어려운 녀석인지라, 단백질 공급원 및 오레가노 대용으로(?) 사용. 다진 고기로 대체해도 무방하며, 그럴 경우 별도로 원하는 허브를 추가한다. 타임이 잘 어울린다고 한다.
- 다진 양파 1/4개, 1쪽 분량의 다진 마늘
- (액상) 치킨스톡 약간
- 소량의 버터
- 슬라이스 치즈 1-2장, 파마산 치즈가루 (생략 가능)
- 후추 약간
1. 토마토는 깨끗이 씻은 다음 깍뚝썰어 껍질째로 믹서기에 갈아낸다. (나의 경우 갈아놓은 생토마토 엑기스를 이용했다) 셀러리와 잎은 깨끗이 손질한 다음 1cm 정도로 썰어 둔다.
2. 닭가슴살 큐브는 해동하여 일정한 크기로 썰거나 다진다. (다진 고기를 사용할 경우 소금/후추로 밑간을 한다)
3. 냄비에 식용유를 두르고 2의 고기를 바싹 볶는다 (닭가슴살 큐브를 통째로 이용할 경우, 볶는 과정은 생략 가능)
4. 1의 토마토를 냄비에 담고 약불에서 저어 가며 끓인다.
5. 가장자리에서 기포가 올라오기 시작하면 셀러리, 다진 양파와 마늘을 넣고 끓여 준다. 치킨스톡으로 간을 하고, 소량의 버터도 넣고 녹인다.
6. 옵션: 좀 더 녹진한 무언가를 원한다면 치즈를 추가한다. 단, 슬라이스 치즈를 넣어 녹일 경우 비주얼은 과감하게 포기해야 하기에, 여건이 된다면 마지막 단계에서 고체형 치즈를 갈아서 뿌리는 것을 추천한다. (이제는 정말로.. 치즈 그레이터를 사야겠다!)
7. 완성된 스프를 그릇에 담고 기호에 맞게 후추 및 허브를 뿌려 완성한다.
속 달래기 + 냉장고 털이용으로 얼렁뚱땅 만든 야채수프일 뿐이었는데, 타임을 곁들이면 미네스트로네와 비슷해질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미네스트로네가 뭐지? 검색해 보니, 갖가지 야채를 큼직하게 썰어 넣은 것이 내가 만든 것과는 확연히 다른 비주얼이었다. 하지만 비 오는 날 집 밖에 안 나가려는 강력한 의지로 집에 있는 재료를 이용해 얼렁뚱땅 만든 시도가, 보잘것 없던 소소한 재료들을 그럴 듯한 요리로 만들어 주었음을 알게 되었다. 앞으로도 이런 크고작은 도전은 계속될 것이다. 지금의 내 앞에 놓인 것들이 아무리 하찮아 보일지라도.
P.S.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같은 카페에서 또 아이스 라떼를 마시면서 이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장을 보러 가야겠다. 텅 빈 냉장고를 채워 놓고, 내일은 또 새로운 걸 만들어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