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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Jun 17. 2024

마리오 카스텔누오보 테데스코

할리우드 영화음악의 산파 Mario Castelnuovo-Tedesco

로마와 베네치아, 밀라노와 나폴리만큼 대도시는 아니지만 피렌체의 문화적 위상은 네 도시에 부럽지 않다. 단테와 메디치, 미켈란젤로를 배출했다는 것만 해도 피렌체는 이름값을 한다. 그러나 유독 음악에 한정하면 다른 도시와 비교할 만한 인물이 많지 않다. 르네상스 시대 오페라 예술을 탄생시킨 것으로 그 역할을 다했다고 하기엔 허전하다. 흥미로운 점은 피렌체 태생의 음악가는 대부분 국외에서 이름을 떨쳤다는 것이다. 조반니 바티스타 룰리(1632-1687)는 장 바티스트 륄리로 철자와 발음을 바꾸어 루이 14세의 오른팔로 맹활약했다. 루이지 케루비니(1760-1842) 또한 일찌감치 프랑스로 건너가 오페라 작곡가로 업적을 남겼다. 그의 <메데아>는 베토벤에게도 영향을 미쳤지만, 노년의 케루비니는 음악원생 베를리오즈가 보기에 앙시앵 레짐의 본보기였다. 

오죽하면 피렌체 음악당 이름을 인도 태생 지휘자에서 따왔다

피렌체 태생으로 언급할 마지막 음악가는 마리오 카스텔누오보 테데스코(Mario Castelnuovo-Tedesco, 1895-1968)이다. 카스텔누오보 테데스코는 1492년 스페인에서 박해를 피해 이탈리아로 이주한 세파르디 유대인 집안이었다. 어려서부터 모친에게 피아노를 배운 그는 피렌체의 케루비니 음악원을 나온 뒤 볼로냐에서 일데브란도 피체티 밑에서 작곡 수업을 했다. 피체니는 카셀라, 말리피에로와 더불어 ‘80세대’의 핵심 구성원이었다. 오페라에 편중되어 실내악과 관현악 연주회가 드물던 이탈리아에서 80세대에 이은 카스텔누오보 테데스코의 등장은 레퍼토리의 확대로 이어졌다. 위대한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이들의 든든한 버팀목이었음은 말할 나위 없다. 같은 유대계이며 파가니니 이래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꼽히던 야샤 하이페츠와 스페인 기타의 거장 안드레스 세고비아 또한 카스텔누오보 테데스코의 작품을 알리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승승장구하던 카스텔누오보 테데스코는 1938년 무솔리니 정권이 인종 차별법을 공포하면서 활동을 제약받기 시작한다. 이듬해 미국으로 이주한 그는 뉴욕을 거쳐 할리우드에 자리 잡고 후학을 기르는 한편 MGM과 계약을 맺고 많은 영화음악을 썼다.

하이페츠가 편곡한 카스텔누오보 테데스코의 <Sea Murmurs>

카스텔누오보 테데스코는 1940년에 쓴 논문 「음악과 영화」에서 오페라로부터 영화로 전환되는 시대를 탁월하게 통찰한다. 그는 문예부흥기에 고대 그리스 비극을 부활시키려는 시도에서 탄생한 오페라가 300년 동안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발전해 왔으며, 특히 19세기에 그 절정을 맞은 끝에 점차 쇠퇴기에 들었다고 진단했다. 그에 따르면 <투란도트>의 초연을 앞둔 만년의 푸치니는 3막에 걸친 오페라 예술의 장황함에 지쳐 더 자유롭고 단순한 에피소드들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카스텔누오보 테데스코는 유럽의 오페라 전통이 멈춘 시점에 미국의 영화 예술이 탄생했다고 봤다. 전통으로부터 자유롭고 무한한 확장성을 가진 영화야말로 푸치니가 만년에 꿈꾼 예술에 부합했다는 것이다. 푸치니는 유성 영화가 나오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첫 유성 영화 <재즈싱어>와 그에 대항하는 이야기 <사랑은 비를 타고>

카스텔누오보 테데스코가 단순히 영화를 오페라의 대안이자 연장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그는 두 예술의 관점이 다르기에 가령 오페라를 영화화하는 것을 썩 마땅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베냐미노 질리의 노래나 야샤 하이페츠의 연주를 화면으로 보는 것은 놀랍고 감동적일 수 있지만, 그것이 ‘창작’은 아니기 때문이다. 옛 음악의 거장을 그린 전기 영화 또한 신파와 왜곡으로 오염된 스캔들 같다고 평가했다. 무엇보다 그는 교향곡처럼 관념적인 음악을 제멋대로 각색해서 춤이나 환상으로 보여주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베토벤에 이렇게 숟가락 얹어서는 안 된다는 엄중한 경고이다

월트 디즈니와 찰리 채플린은 카스텔누오보 테데스코에게 특별한 영감을 주었다. 그는 논문 작성 무렵 거의 완성 단계이던 디즈니의 <환타지아>에 폴 뒤카의 <마법사의 제자>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이 포함되었음을 알고, 둘 다 경이로울 것이라 확신했다. <마법사의 제자>의 상상력이 괴테의 시를, <봄의 제전>의 원시적인 비주얼이 발레 무대를 압도하리라 전망한 그가 옳았다. 또한 그는 채플린의 <시티 라이트>나 <모던 타임스>를 반주한 교향악에 감탄한다. 가볍지만 천박하지 않은 음악은 사람들을 웃기고 울리며 거의 운명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 정도이다. 카스텔누오보 테데스코는 디즈니와 채플린이, 영화음악이 단순 복제나 질 낮은 배경에 그치는 것을 경계하고 새로운 창작의 길로 나아갈 지침을 제시했다고 평가했다. 특히 이미 무대에서는 거의 달성되지 못한 업적을 당시 녹음 기술로 이뤄냈음에 주목한다. 그것은 대사와 음악의 융화이다. 고전 오페라에서 ‘멜로드라마’라고 부른 이 효과는 영화를 통해 완성되었다.

채플린과 친구들: 파블로 카살스, 클라라 하스킬

음악가가 무대를 떠나 영화로 활동 영역을 옮기는 데에는 적잖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음악가가 인종적인 문제로 쫓겨나거나 영화음악을 저급한 타락으로 치부하는 일이 벌어졌다. 다행히 프랑스에서는 조르주 오리크나 아르튀르 오네게르가 세련된 결과물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말리피에로나 피체티는 지나치게 진지한 음악으로 영화의 문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만다.

<로마의 휴일>의 음악을 프랑스 6인조 멤버 조르주 오리크가 썼음을 잊지 말자!

끝으로 카스텔누오보 테데스코는 자신이 영화음악을 옹호할 때마다 부딪히는 두 가지 반대 목소리에 대해 반론한다. 먼저 음악이 영화에서 너무 부차적인 종속 요소로 전락했다는 점이다. 그는 그것이야말로 종합예술인 오페라의 본질임을 새삼 지적한다. 둘째로 영화의 생명력이 너무 덧없다는 점에 대해 그는 현대 오페라도 그렇다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적어도 영화는 오페라보다 많은 관객에게 다가갈 기회를 얻는다는 것이 이 새로운 예술의 열린 경쟁력이라고 확신한다. 내 생각과 다른 점이 하나도 없다.

T. S. 엘리엇의 <대성당의 살인>에 붙인 피체티의 오페라를 누가 듣냐고!!!

카스텔누오보 테데스코는 1926년 마키아벨리의 『만드라골라』를 대본으로 오페라로 쓸 정도로 일찍부터 문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여러 나라말에 능했고, 각국어 시를 노래로 옮겼다. 특히 영어에 대한 이해는 일찍부터 남달라 월트 휘트먼과 셰익스피어의 소네트에 곡을 붙였다. 그는 슈베르트의 가곡을 시와 음악의 가장 탁월한 결합으로 여겼고, 기회가 되면 바흐와 같은 대위법을 다루기보다 슈베르트처럼 소박한 멜로디의 결정체를 만들고 싶어 했다. 그러나 셰익스피어 소네트와 달리 휘트먼 가곡은 아직 녹음조차 되지 못했다. 시대와 국가를 초월한 그의 문학 사랑의 정점은 셰익스피어의 열한 개 희곡에 붙인 서곡에서 엿볼 수 있다. 그가 이탈리아 시절에 쓴 다섯 개 서곡은 이탈리아말 제목이다.

      

말괄량이 길들이기 La bisbetica domata, Op. 61 (1930)

십이야 La dodicesima notte, Op. 73 (1933)

베니스의 상인 Il mercante di Venezia, Op. 76 (1933)

줄리오 체사레 Giulio Cesare, Op. 78 (1934)

겨울 이야기 Il racconto d’inverno, Op. 80 (1935)

     

미국으로 건너간 뒤에 쓴 여섯 서곡은 영어 원제대로이다.

      

한여름 밤의 꿈 A Midsummer Night’s Dream, Op. 108 (1940)

존 왕 King John, Op. 111 (1941)

안토니오와 클레오파트라 Antony and Cleopatra, Op. 134 (1947)

코리올라누스 The Tragedy of Coriolanus, Op. 135 (1947)

헛소동 Much Ado about Nothing, Op. 164 (1953)

당신 좋을 대로 As You Like It, Op. 166 (1953)


Il mercante di Venezia (The Merchant of Venice) , Op. 76

이 서곡들은 21세기에 들어서야 앤드루 페니가 지휘하는 웨스트 오스트레일리언 교향악단의 음반으로 빛을 보았다. 짧게는 8분쯤, 길게는 17분 남짓인 서곡들에서 카스텔누오보 테데스코는 전통적인 서곡처럼 드라마 전체의 인상을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특정 에피소드와 대사를 묘사하는 방식으로 작곡했다. 마치 영화의 장면을 위한 짧은 음악들을 이어 하나의 큰 흐름을 만든 듯하다. 앞서 푸치니가 그에게 말했던 작곡 방식을 따른 것이다. 토스카니니에게 헌정한 <베니스의 상인 서곡>은 현의 합주가 강렬한 인상으로 샤일록의 절망과 분노를 그리며 시작한다. 딸 제시카가 기독교인 로렌초와 눈이 맞아 자기 금화까지 챙겨 야반도주하자 정신이 나간 것이다. 바이올린 솔로의 뱃노래가 이 음악이 짠 갯내 나는 베네치아에서 일어난 희극의 묘사라는 점을 환기한 뒤 다시 샤일록의 광기로 돌아가 끝을 맺는다.

La dodicesima notte (Twelfth Night) , Op. 73

『십이야』는 난파선에서 헤어진 이란성쌍둥이가 겪는 엇갈린 사랑의 소동이 내용이다. 막이 오르면 짝사랑하는 공작이 안절부절못하며 음악을 청했다가 물린다. “음악이 사랑의 양식이라면 물릴 때까지 쉬지 말고 연주해라. 음악에 체해 입맛이 시들다 못해 꺼질 때까지.” 2막에서 공작이 원하던 노래는 짝사랑하는 여백작의 광대가 부르는 소박한 사랑의 노래임이 밝혀진다. 이 노래를 함께 듣던 주정뱅이들은 술판에서 흥이 올라 싸구려 돌림노래를 부른다. 셰익스피어가 음악을 바꿀 때마다 헤어진 쌍둥이 남매와 그들이 뜻밖에 만난 공작과 여백작 사이에 사랑이 꽃핀다. 엇갈렸던 화살은 주인의 심장으로 제자리를 찾아간다. 작곡가에게 이보다 멋진 숙제가 있을까! 비제가 <아를의 여인>에서, 말러가 여러 교향악에서 보여주었던, 춤곡 리듬 위에 서정적인 선율을 수놓는 작업을 카스텔누오보 테데스코는 훌륭하게 완수한다.

바로 위 음악과 비교해 들어보자

나는 카스텔누오보 테데스코가 제시한 <십이야>의 주제 선율이 유독 귀에 익다. 이것은 존 윌리엄스가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들려준 프롤로그와 흡사하다. 전혀 우연이 아니다. 윌리엄스가 바로 카스텔누오보 테데스코의 제자이다. 이차크 펄먼은 유대인이 아닌 윌리엄스가 어떻게 <신들러 리스트>에서 그렇게 심긍을 울리는 선율을 썼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카스텔누오보 테데스코는 매우 많은 유대선율을 정리했다.

역시 유대인인 쇤베르크도 <바르샤바의 생존자>에서 쓴 전례곡이다

그뿐 아니라 앙드레 프레빈, 제리 골드스미스, 헨리 맨시니처럼 할리우드를 주름잡을 작곡가들이 그에게 배웠다. <마에스트로 The Maestro>(2018)는 작곡가 제리 허스트가 카스텔누오보 테데스코를 찾아가 받았던 레슨을 재구성한 영화이다. 카스텔누오보 테데스코는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동네 친구였고, 전후 나폴리 음악원 원장으로 초빙될 만큼 거장이었지만, 할리우드는 그를 알아보지 못한 채 하청음악가이자 유령음악가로 대했다. 스승은 겉도는 제자에게 음악보다 먼저 철학을 세워준다.

 

“나는 만물에 음악이 있다고 믿네. 산에 자라나는 나무에도, 흐르는 물에도, 바다에도, 우리 주변의 공기에도, 그림에도, 시에도, 하지만 어떤 매체를 선택하든, 자연이든 예술이든 생각이든 자네에게 말 걸게 해야 해. 진짜 자네에게.”

The Maestro

원래도 다작인 카스텔누오보 테데스코는 200편 이상의 영화음악을 썼는데, 그 가운데 일곱 편에만 실명을 올렸다. 그가 참여한 <천국의 사도 조단 2 Down to earth>는 긴 이름을 성(性)만, 그나마 철자를 ‘카스텔누오바 테데스코’라고 틀리게 적었다. 오늘날 대표적으로 꼽는 것은 리타 헤이워드가 고용한 <카르멘의 사랑 The Love of Carmen>의 음악이다. 그는 감히 비제와 겨루려는 허세를 부리지 않고, 장기인 기타 음악으로 헤이워드의 플라멩코가 한껏 돋보이게 했다. 이 영화에서 오늘날 할리우드의 전형으로 들리는 곡조는 모두 셰익스피어 서곡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렇게 뿌린 씨앗 덕분에 제자들은 티파니에서 아침을 먹는 상상을 하고, 자전거로 하늘을 날며, 원숭이들이 지배하는 행성에 불시착하는 이야기를 주도했다.

리타 헤이워드와 쇼생크 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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