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르마 산(産) 음악가 (2)
(계속)
아르투로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 1867-1957)는 파르마에서 태어나 아홉 살에 파르마 음악원에 입학해 첼로를 배웠다. 졸업 전부터 테아트로 레조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할 정도로 조숙했던 그는 오페라단의 남미 순회 연주 중 불화로 갈라진 현지 지휘자를 대신해 <아이다>를 암보로 지휘했다. 이후 그는 20세기 오페라와 교향악의 한 축을 이루었다.
1880년 일데브란도 피체티가 파르마에서 태어났다. 피체티의 스승 조반니 테발디니(Giovanni Tebaldini, 1864-1952)는 <라 조콘다>로 유명한 아밀카레 폰키엘리의 제자였다. 테발디니는 체칠리아노 운동(Movimento Ceciliano)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음악의 성녀 이름을 딴 이 운동은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에 걸쳐 폭넓게 일어났다. 다성음악과 그레고리오 성가를 몰아내고 오페라풍의 음악이 자리 잡은 현실을 바로잡고자 한 운동이었다. 테발디니와 레겐스부르크의 프란츠 크사버 하베를(Franz Xaver Haberl, 1840–1910)이 중심인물이었다. 교황 비오 10세가 1903년 ‘자의 교서’를 통해 이를 공식 지지했다. 테발디니는 에밀리오 데 카발리에리의 <영혼과 육체의 극 Rappresentazione di Anima e di Corpo>, 자코포 페리와 줄리오 카치니의 오페라 <에우리디체 Euridice>, 자코모 카리시미의 <예프테 Jephte>와 같은 르네상스 음악을 발굴해 필사하고 편집했다. 이런 스승 밑에서 피체티도 자연히 팔레스트리나에서 몬테베르디에 이르는 이탈리아 음악의 뿌리에 가까워졌다.
테발디니가 제자들에게 가르친 것은 옛 음악만이 아니었다. 그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엘렉트라 Elektra>가 비토리오 녜키(Vittorio Gnecchi, 1876-1954)가 5년 전에 작곡한 오페라 <카산드라 Cassandra>(1905)를 표절한 것이라 지적했을 정도로 당대 음악에 밝았다. 정확히 말하면 테발디니가 ‘표절’이라 말하진 않았다. 그는 같은 주제를 다룬 두 작품이 놀랍도록 비슷한 면이 있으며, 마치 두 작곡가가 텔레파시와 같은 영감을 주고받은 것처럼 유사하게 표현되었다고 말했다. 볼로냐 테아트로 코무날레에서 <카산드라>의 초연을 지휘한 사람은 토스카니니였지만, 그는 작품을 향한 의혹의 시선에 자존심이 상해 다시는 녜키의 곡을 지휘하지 않았다. ‘녜키와 슈트라우스 논쟁’은 다시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테발디니가 제자들에게 미친 영향에 대한 예시로만 밝힌다.
1905년 당시 이탈리아 문단의 중심인물은 가브리엘레 단눈치오였다. 그는 베네치아 건국을 다룬 비극 <배 La nave>를 상연하기 위한 부수음악을 공모했다. 여기에 파르마 극장 부지휘자이던 스물다섯 살의 피체티가 유일하게 응모했다. 까다롭고 드높은 안목의 가진 단눈치오는 이미 푸치니, 마스카니, 레온카발로와 같은 당대 제일의 음악가를 퇴짜 놓거나 평가절하했기에 지레 아무도 응모하지 않았다. 노회한 작가와 패기 있는 작곡가는 합이 맞았다. 단눈치오는 피체티를 ‘파르마의 일데브란도’라 치켜세웠다.
<배>는 서기 552년 베네치아 여명기에서 시작한다. 당시 이탈리아는 테오도리쿠스 대왕(Teodorico il Grande)의 동고트 왕국과 유스티누스 황제(Flavius Iustinus)의 동로마 제국이 나누어 통치했다. 베네치아는 그 사이에 낀 유민들이 석호에 개척한 터전이었다.
기독교인들은 ‘바다의 별 성모’를 노래하고, 이교도들은 ‘디오니소스 찬가’를 부른다. 동로마 제국의 호민관으로 베네치아를 관할하던 오르소 팔레드로(Orso Faledro)는 배신행위로 고발받고 눈이 멀었다. 그 사이 세르조와 마르코 그라티코(Sergio e Marco Grático) 형제가 성자의 유해를 가지고 귀환하길 기다린다. 그들은 건조 중인 ‘배’를 타고 바다로 나아가 새로운 터전을 일굴 희망에 부푼다. 여사제 에마(Ema)는 두 아들 중 마르코는 호민관의, 세르조는 주교의 자리를 이어받는 꿈을 꾼다. 눈먼 오르소는 진흙이 대지를 덮칠 것이라 저주하며 장남 조르조가 군대를 몰고 복수하러 오고 있다고 외친다. 민중이 경계하고 있을 때 오르소의 딸 바실리올라의 배가 나타난다. 라벤나에서 테오도리쿠스 대왕을 섬기던 무희 바실리올라가 뱃전에 오르자 사람들은 동요한다. 바실리올라는 눈먼 아버지와 고문으로 죽은 형제들을 보고 분노한다. 그라티코 형제의 귀국에 민중이 환호한다. 그들이 성당 뜰에 성자의 유해를 내려놓자 모친 에마는 사제를 부추겨 이미 죽은 주교를 내세워 세르조를 주교로 임명케 한다. 호민관이 된 마르코는 배를 타고 나아가 숲을 베고 도시를 세우자고 부추긴다. 바실리올라가 마르코 앞에 나타나 그를 찬양하는 유혹의 춤을 춘다. 그녀는 마르코에게 아버지를 고문한 이들을 구덩이에 던지라고 청하고 동시에 주교 세르조도 유혹한다. 요부에게 홀린 아들들에게 쫓겨난 에마는 광야에서 울부짖는다. 바실리올라는 구덩이에 던져진 원수들을 찾아가 활로 하나씩 학살한다. 그러나 그녀의 반란은 실패로 돌아가 산채로 뱃머리를 장식할 처지이다. 그녀는 끌려가기 직전 불길에 뛰어든다. 사람들은 환호하며 배를 타고 나아간다.
단눈치오의 희곡은 통일 이탈리아의 마지막 숙원 사업이던 아드리아해 동쪽 해안, 지금의 크로아티아를 수복하려는 열망을 담았다. 베네치아의 배는 곧 건조 중인 군함을 은유했다. 종종 단눈치오와 그에게 열광한 이탈리아 문화 지식인들을 파시즘의 전조나 끄나풀로 매도한다. 이는 바그너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나치즘과 연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다른 점은 독일보다 이탈리아 쪽이 더 가혹한 대우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들에 비하면 토스카니니는 파시즘에 항거한 투사로 평가받는다.
있는 그대로 보자면 상황은 이러하다. 1920년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에 불응한 단눈치오가 오스트리아에서 독립한 유고슬라비아의 피우메(현재 크로아티아의 리예카)를 무력으로 점령했다. 파시즘의 첫 번째 축포나 다름없었다. 토스카니니는 악단을 이끌고 피우메로 단눈치오를 찾아가 베토벤의 교향곡 5번을 지휘했다. 당시 전투에서 사망한 100명 중 다섯 명은 토스카니니의 악단원이었다. 앞서 제1차 세계대전 중 이탈리아 전선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이손초에도 악단을 이끌고 찾아가 독전했을 만큼 토스카니니는 열렬한 국가주의자였다.
파시즘이라는 말이 고대 로마 통합권력의 상징인 속간(束桿, 도끼를 나무 막대기 다발에 끼운 것)을 뜻하는 파스케스(Fasces)에서 나왔듯이 국가주의는 총화단결을 기치로 내세운다. 문제는 많은 순수한 예술가들이, 국가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았을 때 그것이 폭력과 억압, 통제로 변질될 위험을 몰랐다는 데에 있다. 물론 알면서도 그것이 가져다줄지 모를 달콤한 열매를 기대하며 암묵적 또는 적극적으로 동조했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토스카니니는 무솔리니가 1922년 로마 행진 이후 야욕을 드러냈을 때 동요하지 않았고, 1925년 무솔리니가 ‘전 국민의 파시스트화’를 선포한 뒤에도 가르다호숫가 비토리알레의 영지로 단눈치오를 예방해 존경을 표했다. 이듬해, 라 스칼라에서 열린 드뷔시의 <성 세바스티앙의 순교 Le Martyre de saint Sébastien>를 지휘한 사람도 토스카니니였다. 단눈치오 원작의 이 음악극은 이다 루빈스타인이 주연을 맡았다. 그녀는 바로 1921년 영화로 제작된 <배>에서 바실리올라를 맡았던 당대의 팜파탈이었다.
점차 좁혀오는 위협의 결과 토스카니니는 1931년 볼로냐에서 열린 음악회에서 파시스트 찬가인 ‘라 조비네차’를 지휘하길 거부하며 파국에 이르렀고, 결국 이탈리아를 떠났다. 그렇지만 그는 국외에서도 이탈리아의 동년배 작곡가들을 알리는 데 소홀하지 않았다. 레스피기는 물론이고, 알프레도 카셀라나 일데브란도 피체티의 적극적인 옹호자였다. 20세기 이탈리아에서 반파시스트를 찾다 보면 공산주의에 기운 사람인 경우가 많다. 파시즘에 가까이 갔던 예술가의 경우처럼, 그에게 공산주의의 오점까지 모두 뒤집어씌울 일은 아니라는 말이다.
토스카니니 말고 파시즘의 오염을 재는 또 한 사람의 바로미터가 있다. 피렌체 음악원에서 피체티에게 배운 마리오 카스텔누오보 테데스코였다. 유대인인 그는 1938년 인종 차별법이 발효되면서 미국으로 탈출했다. 카스텔누오보 테데스코는 스승을 통해 지난 일이백 년이 아닌 천 년의 이탈리아 음악을 호흡했고 이를 자신의 정체성이라 믿었다. 그는 캘리포니아에서 1968년 2월 13일 피체티의 부고를 듣고 부모를 잃었을 때보다 슬퍼했다. 카스텔누오보 테데스코는 그로부터 한 달여 뒤인 3월 16일 스승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아직도 세상은 피체티가 <배>에 붙인 부수음악을 들을 음반이 하나도 없을 만큼 그에게 무관심하다. 유일하게 들을 방법은 사이먼 졸리가 지휘하는 BBC 콘서트 오케스트라와 BBC 합창단의 라디오 방송 음원뿐이다. 모두 일곱 개 음악이 25분가량 이어지는 데 각 곡의 제목은 아래와 같다.
- 예비신자와 바느질하는 여인들의 합창 (Coro dei catecumeni e delle cucitrici)
- 해전의 합창 (Coro dei naumachi)
- 전 세계 (Totus mundus)
- 강어귀의 먹구름 (Nembo sull'estuario)
- 일곱 촛대의 춤 (Danza dei sette candelabri)
- 예비신자의 아침 찬가 (Inno mattutino dei catecumeni)
- 나팔과 알렐루야 합창 (Buccine e coro alleluiatico)
이탈리아의 반파시스트 음악학자였던 페델레 다미코(Fedele D’Amico, 1912-1990)는, 무솔리니를 예찬했으나 홀대당한 카셀라의 제자였고, 그의 아내는 공산주의자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의 대본 작가로 유명한 수소 체키(Suso Cecchi D’Amico, 1914-2010)였다. 다미코는 “피체티는 쇼팽이 피아노에, 라벨이 관현악에 보인 감각을 합창음악에 보였다”라고 평가했다. <배>의 음악을 쓸 때 단눈치오가 피체티에게 주문한 것은 그레고리오 성가 이전 시대에 걸맞은 성 암브로시우스 시대의 분위기였다. ‘파르마의 일데브란도’는 단순히 과거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거로 통하는 문을 현대인에게 열어 보였다.
단눈치오는 신이 났다. 1913년 6월 11일 파리 샤틀레 극장에서 『피사넬라 또는 향기로운 죽음 La Pisanella ou la morte parfumée』이 초연되었다. 불과 2주 전 샹젤리제 극장에서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이 초연된 직후였다. 피체티는 연극을 위한 부수음악을 다섯 악장의 모음곡으로 추렸고, 1917년 로마에서 초연했다. 토스카니니는 1920년 자신의 첫 녹음을 시도할 때 모음곡의 두 번째 악장을 포함했다.
『피사넬라』는 13세기 무렵 지중해의 섬나라 키프로스가 배경이다. 단눈치오는 피사에서 해적에게 팔려 온 소녀와 키프로스 전설에 등장하는 아로다프누사(Arodaphnoussa)라는 여인을 결합해 피사넬라 아로다프누사라는 주인공을 창조했다. 아로다프누사는 키프로스말로 유도화(柳桃花, Oleander)를 뜻한다.
그녀는 왕의 연인이었지만, 왕비의 질투로 화로에 던져져 죽었다. 희곡에서 왕비는 위고 드 뤼지냥 2세의 모친 리아센스 왕후(Queen Liacence)로 바뀐다. 키프로스는 십자군 원정 당시나, 단눈치오 시대나, 지금이나 다양성의 상징이다. 기독교와 무슬림, 동방정교와 러시아 정교까지 지중해를 둘러싼 모든 세력이 탐내는 곳이었다. 또한 키테라, 파포스와 더불어 베누스 여신의 땅으로 숭배된 섬이었다. 피사넬라는 그곳에 ‘전리품의 장미’로 팔려왔다. 단눈치오가 그린 그녀는 베누스의 환생이었다.
그녀의 속눈썹은 / 세상의 달콤함을 / 간직하고 있어요 / 마치 봄의 첫 잎이 / 첫 비의 /
방울을 품듯이 / 걸음마다 그녀는 / 땅의 아름다움을 / 그물로 끌어모으듯 / 뒤에 끌고 다닙니다
그녀는 베누스가 연인 아도니스와 사랑에 빠졌던 것처럼 위고 왕을 사로잡았다. 키프로스에 온 티레의 왕자는 음탕하고 방종한 섬에서 먹잇감을 탐하듯 피사넬라를 데려가려 한다. 레바논의 해안도시 티레(Tyre)는 에우로페와 디도가 태어난 곳이다. 왕은 티레의 왕자를 죽이고 피사넬라에 탐닉한다. 그녀는 매혹의 춤으로 왕을 도취하게 한다. 마지막 장에서 피사넬라는 리아센스 왕후에게 불려 간다. 그녀는 자신이 아로다프누사라 불린다고 고한다. 곧 월계수에 접붙인 장미이며 다른 말로 사랑이다. 왕후는 아들을 홀려 국정에 소홀하게 한 죄를 물어 피사넬라를 장미에 질식시켜 죽인다. 맘에 들지 않는 손님을 장미에 질식시켜 죽였다는 로마 황제 엘라가발루스의 예를 따온 것이다. 그는 방탕을 일삼다가 자신을 황제로 세운 할머니에 의해 폐위되었다. 단눈치오의 언어에 녹아든 피체티의 음악은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묶였다.
- 위게 왕 Sire Huguet
버르토크가 쓸 <푸른 수염 영주의 성>과 경쟁하는 음악이다.
- 파마구스타 항구의 부두 Le quai du port de Famagoustentry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루시카>에서 러시아 장터를 체험한 파리 청중은 이번엔 콧속으로 키프로스의 바닷냄새를 맡았을 것이다.
- 무자비한 여왕의 성에서 Au château de la reine sans merci
라벨의 <어미 거위 모음곡>과 경쟁하는 감미롭고 서정적인 장미 정원의 묘사이다.
- 빈곤과 완전한 사랑의 춤 La danse de pauvreté et de parfait amour
사랑을 잃은 슬픔과 미소로 회복되는 사랑을 시벨리우스처럼 서늘하게 그린다.
- 사랑과 향기로운 죽음의 춤 La danse de l’amour et de la mort parfumée
슈트라우스의 ‘살로메의 일곱 개 베일의 춤’이 허울을 벗는 음악이라면 여기서는 끝없는 장미의 무게에 압사하는 파국이 묘사된다.
<배>에서 아무도 들어본 적 없는 6세기의 음악을 만들어 냈던 피체티는 이번에는 20세기 초 탐미주의에 호응한다. <피사넬라>에서 우리는 피체티가 동시대 작곡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천재였음을 확인한다. 테발디니의 제자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단눈치오의 주제는 ‘사라지려는 아름다움을 어쩌나’였고, 피체티는 그것을 향수처럼 담아내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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