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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Jul 23. 2024

파르미자니노의 미녀를 찾아서

파르마 산(産) 음악가 (1)

밀라노에서 볼로냐로 가는 길 한 가운데에 파르마가 있다. 교통의 요지이자 농산물의 집산지이다. 수분이 적어 가루로 뿌려 먹기도 하는 ‘파르미자노 레자노’ 치즈는 국외까지 유명한 이곳 명물이다. 르네상스 시대 바오로 3세 교황의 아들인 피에르 루이지 파르네세(1503-1547)를 시작으로 파르마는 공국(公國)이 되었다. 당시 음악 활동의 중심은 아직 대성당과 대공의 예배당이었다. 파르마의 음악사에 등장하는 대가 중 가장 처음 기억할 사람은 치프리아노 데 로레(Cipriano de Rore, 1515/16-1565)이다. 그러나 그는 이곳에 머문 기간이 길지 않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서 딱히 파르마를 위한 업적을 가리기 힘들다. 

파르마 대성당과 세례당

로레 다음으로 파르마에 온 사람은 클라우디오 메룰로(Claudio Merulo, 1533-1604)이다. 베네치아 산마르코 대성당의 ‘제1 오르가니스트’였던 메룰로(‘제2 오르가니스트’는 안드레아 가브리엘리)는 분명치 않은 이유로 베네치아를 떠나 1584년 파르마 궁정에 왔다. ‘울타리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 Basilica di Santa Maria della Steccata’ 오르가니스트로 자리 잡은 메룰로는 일단 악기의 성능 보완부터 요청했다. 오르간을 위한 두 권의 토카타집과 세 권의 칸초네집 등은 뒷날 스벨링크와 프레스코발디를 거쳐 독일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에게로 이어졌다. ‘메룰로에서 바흐까지’라는 부제가 붙은 안드레아 부카렐라의 음반은 ‘토카타’ 양식에 대한 충실한 보고서이다. 로레와 메룰로 모두 파르마 대성당에 묻혔다.

Toccate d'intavolatura d'organo, libro 2: Toccata prima

파르마와 피아첸차를 중심으로 한 공국은 피에르 루이지 공작이 암살된 뒤 정치적으로 혼란기를 겪었다. 오타비오와 알레산드로에 이어 제4대 리누치오 1세(1569-1622)에 들어서야 안정되었다. 공작은 잔 바티스타 알레오티에게 필로타 궁전 1층에 파르네세 극장(Teatro Farnese)을 지으라고 주문했다. 1628년 12월 21일 파르네세 극장의 개장은 몬테베르디의 막간극 <메르쿠리오와 마르테 Mercurio e Marte>로 시작했다. 그때의 음악은 남아 있지 않고, 잇따른 오도아르도 파르네세와 마르게리타 데 메디치의 결혼 축하연도 머릿속으로 그 화려함을 짐작할 뿐이다. 

파르네세 극장은 비첸차의 테아트로 올림피코, 사비오네타의 테아트로 알안티카와 더불어 최초의 르네상스 실내 극장으로 꼽힌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많이 파괴되었다가 전후 복원되었다. 장 피에르 포넬이 연출한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는 테아트로 파르마에서 시작한다. 곱사등이 광대와 그가 모시는 만토바의 공작이 한 귀족과 그의 딸을 희롱하는 장면이다.

파바로티의 만토바 공작과 잉글바르 빅셀의 리골레토가 열연 중인 파르네세 극장

1748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결산하는 엑스라샤펠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 결과 파르마는 스페인 부르봉 왕가의 펠리페에게 할양되었다. 펠리페 공작의 아내는 프랑스 루이 15세의 장녀 루이즈 엘리자베트였다. 루이 15세는 사위를 보필 또는 감시하도록 기욤 뒤 티요(Guillaume du Tillot, 1711-1774)를 딸려 보냈다. 사위는 그를 고문관으로 임명해 국정을 총괄하게 했다. 티요는 행정에 능했고 문화를 숭상했다. 그의 시기 파르마는 ‘이탈리아의 작은 아테네’라 불렸다. 백과사전을 소장한 개인 도서관을 가진 티요는 고대 유물과 당대 미술, 인쇄, 대학을 정비해 프랑스와 스페인, 이탈리아의 인재를 파르마로 불러 모았다. 그 가운데 작가 카를로 인노첸초 프루고니(Carlo Innocenzo Frugoni, 1692-1768)와 작곡가 톰마소 트라에타(Tommaso Traetta, 1727-1779)가 있었다.      

루이즈엘리자베트 대공비와 기욤 뒤 티요
프루고니와 트라에타

로마의 프루고니는 크리스티나 여왕이 세운 아르카디아 아카데미 일원이었다. 파르마에 온 그는 프랑스 사상가 콩디야크 덕분에 계몽주의에 눈을 떴다. 마침 당대 이탈리아의 마당발 지성이던 프란체스코 알가로티(Francesco Algarotti, 1712-1764)는 「음악 오페라에 대한 에세이 Saggio sopra l’opera in musica」라는 논문에서 오페라의 개혁을 주문했다. 티요와 프루고니는 이에 자극을 받았다. 이들은 고대 그리스의 에우리피데스가 쓴 『히폴리토스 Hippolytus』를 토대로 고전주의자 장 라신이 각색한 『페드르와 이폴리트 Phèdre et Hippolyte』를 검토했다. 1733년 프랑스의 장 필리프 라모가 라신의 비극을 각색해 오페라 <이폴리트와 아리시 Hippolyte et Aricie>를 작곡했기 때문이었다. 

프롤로그까지 모두 담은 윌리엄 크리스티의 글라인드본 공연

1758년 마지막 퍼즐로 톰마소 트라에타(Tommaso Traetta, 1727-1779)가 궁정악장으로 임명되었다. 트라에타는 프랑스에서 내려온 라모의 취향과 나폴리에서 올라온 오페라 세리아 양식을 결합하는 데 성공했다. 1759년 3월 9일 <이폴리토와 아리치아 Ippolito ed Aricia>의 막이 올랐다. 아리치아를 부른 소프라노 카테리나 가브리엘리는 “에우리피데스나 라신이 부럽지 않을 만큼 큰 영예를 받았다”라고 말했다.     

서곡이 모차르트의 <마술피리>를 예고하는 듯하다

<이폴리토와 아리치아>는 라모의 오페라로부터 막간의 춤곡을 그대로 가져다 썼다. 그런데 이것이 오히려 작품의 확장성을 불러왔다. 장면의 짜임새와 아리아의 선율미에 춤곡의 역동성이 잘 스며든 결과이다. 이듬해 <틴다리디 Tindaridi>의 연이은 호평을 받으며 트라에타는 베네치아와 빈에 진출했다. 1768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예카테리나 여제의 부름을 받아 그곳에서 <안티고나 Antigona>를 쓰며 7년간 머물렀다. 그곳에서 건강이 상한 트라에타는 런던을 거쳐 이탈리아로 돌아왔지만, 재능과 건강 모두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티요가 판을 짜고, 프루고니의 대본에 트라에타가 음악을 쓴 파르마의 오페라 개혁은 오래 지속되진 못했다. 그러나 정교하고 박진감 넘치는 관현악과 화려한 성악이 결합한 트라에타의 오페라는 머지않아 모차르트의 작품에서 그 영향을 알아차릴 수 있다.     

2000년 발매되어 트라에타의 부활을 알린 크리스토프 뤼세의 앨범

다음 세기에도 파르마는 이탈리아 오페라에 깨알 같은 역할을 했다. 1814년 퐁텐블로 조약으로 나폴레옹이 엘바로 귀향 가자, 그의 둘째 아내였던 마리 루이즈는 이혼을 택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란츠 2세의 딸이던 그녀는 이렇게 원치 않았던 정략결혼에서 벗어났고, 그 보상으로 파르마의 여공작이 되었다. ‘마리아 루이사’로 불린 여공작은 파르마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였다. 그녀는 민생에 관심을 기울여 빈곤, 실업, 보건, 치수(治水) 등의 복지를 개선했다. 

나폴레옹의 둘째 부인이었던 마리 루이즈 여공작

여공작은 1816년 궁정 오케스트라를 창단했다. 파르마 음악원과 누오보 두칼레 테아트로(현재 테아트로 레조)의 건립도 이어졌다. 1829년 8년간의 공사 끝에 극장이 문을 열었다. 개막작은 빈첸초 벨리니의 <차이라 Zaira>였다. 초연은 대본 문제로 갈등을 빚은 탓에 실패했다. 뒷날 벨리니는 이 오페라의 음악을 <카풀레티와 몬테키 I Capuleti e i Montecchi>에 다시 사용했다. 1835년부터 1840년까지는 파르마 태생의 니콜로 파가니니(Niccolò Paganini, 1782-1840)가 궁정 악단의 고문을 맡았다. 그는 벨리니의 <청교도 I puritani>와 로시니, 베토벤의 서곡 따위를 지휘했다. 단원을 47명으로 늘리려는 야심이 이뤄지지 않자, 파가니니는 토리노로 가버렸다. 그는 1840년 니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뒷날 고향으로 돌아와 파르마 빌레타 묘지에 안장되었다.

마르코 폴로가 원나라에 모신 듯한 느낌의 파가니니의 묘

파르마에 가장 중요한 음악가는 역시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 1813-1901)였다. 오늘날 이탈리아 오페라와 동일시되는 이 위대한 작곡가는 파르마에서 북서쪽으로 30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마을 부세토에서 태어났다. 1842년에 라 스칼라에서 초연된 <나부코 Nabucco>는 그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베네치아와 빈에 이어 파르마로 금의환향했다. 베르디는 1843년 아버지를 처음으로 파르마 극장에 초대했다. 초연에 이어 <나부코>에 출연한 주세피나 스트레포니(Giuseppina Strepponi, 1815-1897)도 다시 만났다. 연인 관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해에 베르디는 <첫 번째 십자군 원정의 롬바르디아인 I Lombardi alla prima crociata>을 마리아 루이자 여공작에게 헌정했다. 

파르마에 각별한 <롬바르디아인>, 2023년 베르디 축제

1847년 피렌체의 페르골라 극장에서 초연된 <맥베스>도 곧바로 파르마에서 상연되었다. 이 무렵 베르디는 스트레포니와 동거를 시작했다. <맥베스>는 다음 세기 파르마에서 태어난 영화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Bernardo Bertolucci, 1941-2018)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는 1964년 칸에서 개봉한 <혁명 이전 Prima della rivoluzione>의 주인공 이름을 스탕달의 <파르마 수도원 La chartreuse de Parme>에서 가져왔다. 느슨하게 소설과 닿아 있는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파르마 구석구석을 엿보게 하는 영화의 예고편
파브리치오(소설의 파브리스 델 동고)는 파르마의 독실한 가톨릭 신자 집안 청년이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부르주아 분위기와 이상적인 공산혁명을 꿈꾸는 사회 분위기 사이에 갈등한다. 파브리치오는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클렐리아(소설의 클렐리아 콘티)와 약혼한 사이이다. 파브리치오가 친구의 자살로 충격을 받았을 때, 마침 밀라노에서 이모 지나(소설의 지나 산세베리나)가 온다. 두 사람은 점차 가까워진 끝에 충동적으로 사랑을 나눈다.

파브리치오가 이상과 현실 사이에 고민하는 만큼 지나도 여러 남자 사이에서 실존의 괴리를 느낀다. 지나의 옛 친구 퍽은 부유한 집안 태생이지만 재산을 탕진하고 급격한 사회 변화와 불확실한 미래를 개탄한다. 지나는 자신과 퍽 사이를 질투한 파브리치오의 뺨을 때린다. 공산당 집회에 참석했던 파브리치오는 공허한 구호에 실망한다. 그는 클렐리아 집안이 대대로 소유한 오페라 박스석에서 시즌 개막 공연을 본다. 베르디 <맥베스> 2막 공연 중 밖에서 만난 지나와 파브리치오는 서로의 맘을 애써 정리한다. 지나는 파브리치오와 클렐리아의 결혼식에서 파브리치오의 동생 안토니오를 안고 오열한다.

영화 제목은 “혁명 전에 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의 달콤함을 알지 못한다”라는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 페리고르의 말에서 가져왔다. 탈레랑은 프랑스 혁명부터 나폴레옹 시대를 거쳐 왕정복고 이후까지 소신 있는 주장과 처신으로 낙마와 등용을 거듭했던 정치인이자 외교관이었다. 그가 언급한 ‘달콤함’은 혁명 이전에 대한 향수와 혁명 이후 혼란스러운 현실에 대한 회의를 담고 있다. 젊은 시절 열렬한 공산주의자였던 베르톨루치가 이런 반동적인 제목을 붙인 까닭은 무엇일까? 달콤함에 안주할 수 없으며 정체성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혁명이란 거부할 수 없는 물결이라는 의도 아닐까? 그러기 위해 베르톨루치는 <맥베스>를 파르마 극장의 상징으로 바꿔놓았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야말로 인간의 그릇된 야욕이 도도한 운명에 속수무책 끌려가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오세요, 어서 Vieni! T’affretta!

오페라 1막의 ‘마녀들의 합창’과 함께 베르톨루치는 파르마 극장의 구석구석을 보여준다. 막이 오르고 거의 20분 뒤에야 지나가 도착한다. 그녀가 좁은 객석을 비집고 착석하는 동안 맥베스 부인은 남편의 편지를 받고 왕을 암살할 흑심을 불태운다(아리아 ‘오세요, 어서 Vieni! T’affretta!’). 마리아 칼라스의 뚫을 듯한 음성이 울리는 가운데 파브리치오는 클렐리아의 손을 잡고 초조한 눈으로 그런 이모의 모습을 지켜본다. 바닥층에서 발코니를 올려다보는 지나는 파브리치오가 자신을 피해 뒤로 숨었다고 생각한다. 덩컨 왕의 암살에 분노한 일동의 합창과 함께 1막이 마무리된다. 지나는 한줄기 눈물을 흘린다. 기립박수에도 파브리치오의 표정은 시무룩하며 머릿속은 맥베스만큼이나 복잡하다.

하늘에서 그림자가 떨어지듯이 Come dal ciel precipita l’ombra

음산한 기운이 도는 스코틀랜드의 맥베스 성을 나팔 소리가 파고들며 2막이 시작된다. 이번에도 지나는 자리에 없다. 발코니석의 파브리치오는 클렐리아에게 양해를 구하고 로비로 나간다. 맥베스의 다음 표적이 된 뱅쿠오가 불안한 예감에 아들을 안고 ‘하늘에서 그림자가 떨어지듯이 Come dal ciel precipita l’ombra’를 부른다. 무대 밖 지나는 초조하게 서성거린다. 그녀는 밖으로 나온 파브리치오에게 클렐리아가 “파르미자니노의 초상화처럼 아름답다”라고 말한다. 

영화 속 클렐리아. 파르마 태생 파르미자니노(1503-1540)의 유작 <목이 긴 성모>, 우피치 미술관

그 사이 베르톨루치는 무겁던 오페라를 맥베스의 즉위 축하연 장면으로 감쪽같이 바꾼다. 경쾌하고 빠른 폴카가 짧은 2막 사이 로비의 밀회를 재촉한다. 지나는 밀라노 라 스칼라에서 같은 오페라를 봤던 기억과 비교하며 파르마 사람들은 자기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할 것이라며 웃는다. 하지만 그녀는 모두가 “베르디, 베르디”만 찬양하는 것이 못마땅하다. “그는 결국 우리와 달라.” 그녀가 더 좋아하는 쪽은 “모차르트”이다. 어쩌면 내 생각도 지나처럼 단순한지 모르겠다. 파브리치오는 이모를 떠나는 것이 맞았다며 동의를 구한다. 음악은 맥베스 부인이 좌중의 흥을 부추기는 왈츠로 바뀐다. 지나는 한기를 느낀다. 파브리치오는 잠시 동요하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그는 파르미자니노의 미녀가 기다리는 발코니석으로 돌아간다. 자객이 전하는 뱅쿠오의 죽음만큼이나 단호하게 영화 속 오페라 장면은 끝난다.

모리코네가 베르디와 경쟁하려고 얼마나 힘줬는지...

<혁명전야>의 음악은 엔니오 모리코네가 맡았다. 그는 특유의 통속적인 선율로 두 주인공의 심리와 엇갈린 시대상을 증폭한다. 이따금 들리는 플루트와 하프시코드의 단조로운 반복 음형은 메룰로의 토카타를 떠올리게 한다. 영화에 남의 음악을 쓰는 데엔 관심이 없던 그가 <맥베스> 장면에 관여했는지 아니면 전적으로 베르톨루치의 뜻이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프랑스와 달리 이탈리아에선 건물 겉을 보고 안을 짐작하면 안 된다

베르디는 1913년 탄생 100주년, 1951년 서거 50주기, 2001년 서거 100주기, 2013년 탄생 200주년을 기렸다. 그동안 파르마는 그 어느 곳에 뒤지지 않는 성대한 축제를 치렀다. 1980년대부터 1993년까지 계속되다가 멈춘 파르마 베르디 페스티벌은 2001년부터 늦봄에 재개되었다. 2007년부터는 10월 10일 베르디 생일 한 달 전후 세 곳을 오가며 열린다. 곧 베르디가 태어난 부세토의 극장, 르네상스 시대의 파르네세 극장 그리고 베르디가 활동했던 파르마 극장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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