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바이에른-스위스 기행 (1)
노블레스 매거진 2024년 11월호 게재
유례없는 폭염이 한가위까지 집어삼킨 지난 9월, 중부 유럽은 폭풍 보리스로 몸살을 앓았다. 내 베이스캠프 뮌헨도 악천후였다. 쌀쌀한 추석이었지만 다행히 바이로이트엔 풍성한 보름달이 떴다. 바로크 오페라 축제 폐막 전야 무대는 ‘함부르크의 오페라’라는 프로그램을 선보일 예정이었다. 시작 몇 시간 전 이메일이 왔다. 소프라노 안나 프로하스카가 급성 식중독으로 노래할 수 없어 프로그램을 바꾼다고. ‘함부르크의 오페라’라는 프로그램 때문에 온 나는 적잖이 아쉬웠다. 다행히 베테랑 크리스토프 루세가 지휘하는 레 탈랑 리리크의 관현악곡은 함부르크에 태동했던 독일 오페라의 선곡을 고수했다. 도대체 ‘함부르크의 오페라’란 무엇인가?
오페라는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를 부활시키려 한 문예부흥의 마지막 퍼즐이었다. 16세기말 이탈리아에서 뿌려진 씨앗은 17세기를 오페라의 시대로 예고했다. 그러나 1618년 터진 ‘30년 전쟁’이 찬물을 끼얹었다. 신구교의 각축에 독일은 쑥대밭이 되었다. 그동안 이탈리아는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대중 극장 문화를 꽃피웠다. 드레스덴의 하인리히 쉬츠(1585-1672)도 베네치아를 방문해 최신 스타일을 익히고 돌아갔다. 쉬츠는 1627년 독일 최초의 오페라 <다프네 Daphne>를 썼지만, 초연 기록만 있을 뿐 전하지는 않는다. 계속되는 전쟁은 바흐와 헨델 이전 독일 최고의 작곡가로 꼽히는 쉬츠에게 더는 오페라 작곡을 허락하지 않았다. 1648년 종전 결과 맺어진 베스트팔렌 조약은 독일을 3백 개 넘는 나라로 쪼개버렸다. 오페라는 소수 부유한 궁정의 자체 오락거리에 머물렀다. 독일 대중 오페라는 17세기가 끝나갈 즈음에야 겨우 고개를 들었다. 가장 북쪽 한자 무역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던 항구 함부르크에서.
제국 자유 도시였던 함부르크는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로서 비슷한 런던을 모델로 삼았다. 부유층 시민의 여가를 위해 발달한 공연 문화가 곧 런던에서 함부르크로 이식되었다. 1678년 함부르크에 독일 첫 ‘공공’ 오페라 극장이 문을 열었다. 라인하르트 카이저와 요한 마테존과 같은 작곡가가 수십 편의 오페라를 썼고, 곧이어 헨델도 함부르크에 도착했다. 헨델은 네 살 많은 마테존과 친구이자 맞수였다. 마테존의 오페라 <클레오파트라> 공연 때 두 사람은 사소한 경쟁심 탓에 결투까지 벌였다. 마테존의 칼끝이 코트 단추를 찌르는 바람에 헨델이 목숨을 건졌지만 둘은 곧 화해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이후 더 큰 꿈을 좇아 이탈리아로 건너간 헨델은 잠시 하노버로 돌아왔다가 마지막으로 런던에 정착해 바로크 오페라와 오라토리오의 절정을 이끌었다. 헨델이 오라토리오로 넘어간 이유가 런던의 오페라 문화가 쇠퇴한 데 따른 것이었듯이 함부르크의 오페라 극장도 1738년 재정적인 문제로 문을 닫았다. 이렇게 독일 바로크 오페라의 첫 개화는 깊이 묻힌 채 20세기말까지 세상에서 잊혔다.
바이로이트는 매해 여름 한 달 동안 열리는 바그너 축제로 유명하다. 1870년대에 바그너가 이곳에 새 극장을 짓고 자작품만을 연주하는 축제를 시작한 이래 매년 여름 순례의 행렬이 줄을 잇는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이전에 바이로이트에 오페라가 있었다. 프로이센을 강국으로 세운 프리드리히 1세의 딸 빌헬미네는 남동생 프리드리히 2세와 함께 음악을 남달리 사랑했다. 바이로이트 대공비가 된 빌헬미네는 딸 엘리자베트(카사노바가 유럽 최고의 미인이라 칭했다)의 결혼 기념으로 변경백 극장을 개관했다. 함부르크의 오페라가 널리 알려지기도 전에 사라진 직후인 1744년의 일이었다.
아름다운 로코코 내부 장식과 깊은 무대는 뒷날 바그너에게 적잖은 인상을 남겼고, 그가 이 변방 공국을 자신의 요람으로 삼는 데에 영향을 미쳤다. 바로크 시대 거세 성악가, 카스트라토의 존재를 널리 알린 영화 <파리넬리>가 바로 이 극장을 무대로 촬영되었고 이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른다. 2020년에 재출발한 바이로이트 바로크 오페라 축제는 이렇게 새로 발굴된 작품을 재조명하는 첨병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올해도 니콜라 포르포라의 <아울리드의 이피게니에>라는 잊힌 작품을 중심으로 알찬 프로그램을 꾸몄다. 지역 특산물이 오페라인, 그것도 골수만을 위한 바그너라는 거암에만 기대지 않고 새로운 활로를 개척한 강소 도시 바이로이트의 저력을 엿본 밤이었다.
며칠 뒤 스위스는 다행히 예년 날씨로 돌아가 기온도 쾌청했다. 주요 극장 가운데 가장 빨리 시즌을 여는 취리히 오페라는 첫 무대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낙소스의 아리아드네>로 장식했다. 교향시 작곡가 슈트라우스는 강렬한 표현주의 초기 작품을 통해 오페라 작곡가로 탈바꿈했다. 1911년 <장미의 기사>의 성공으로 그는 작가 후고 폰 호프만스탈과 단짝이 되었다. 이들은 1912년 친구 막스 라인하르트가 연출할 몰리에르의 <서민귀족 Le Bourgeois Gentilhomme>을 위한 음악으로 <낙소스의 아리아드네>를 써주는 데 의기투합했다(세 사람은 뒷날 잘츠부르크 축제를 창설한다).
루이 14세 시대에 몰리에르가 작곡가 륄리와 합작한 <서민귀족>은 졸부가 귀족이 되고자 속성 교양 교육을 받고 헛돈을 쓰지만 결국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 격이 되고 만다는 풍자극이다. 여기서 졸부란 단순히 신분 상승을 꾀하는 사람뿐이 아니라 허영에 둘러싸여 진실을 보지 못하는 모든 사람(정점에 루이 14세가 있다) 모두를 가리킨다.
슈트라우스와 호프만스탈은 자기 저택에서 사비로 오페라를 공연하려는 졸부(취리히 공연에서는 극장 감독이다)의 이야기를 만들었다. 여기서 극장 역사 전체가 충돌한다. 패기만만한 신인 작곡가는 공연 직전에야 자신의 야심 찬 오페라 세리아(정가극) 뒤로 졸부가 좋아하는 코메디아 델 아르테(광대극)가 이어진다는 통보를 받는다. “파인다이닝 뒤에 피자를 먹자고 하다니!”
엎친 데 겹친 격으로 끝에 불꽃놀이가 예정되어 있는데, 시간이 촉박하니 정가극과 광대극을 동시에 진행하라는 막무가내. “코스 사이사이 피자를 먹으라고?” 일동은 말도 안 된다고 반발하지만 결국 출연 분량을 놓고 서로 흥정한다. 여기서 정가극 작곡가는 바그너 계승의 짐을 짊어진 슈트라우스 자신을 대변한다. 그에 비해 광대극은 화려한 기교를 앞세워 청중을 사로잡아 온 이탈리아 오페라이다. 극장의 황금기를 지나 황혼에 선 슈트라우스는 바그너만이 아닌 이탈리아까지 아울러야 했다.
르네상스 시점에서 보면 바그너나 이탈리아나 매한가지 무대극이지만, 각자 위치에서 상대방은 결코 양립할 수 없이 먼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슈트라우스는 일찍이 볼로냐에서 이탈리아어로 공연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보고 “오늘에서야 이 곡이 벨칸토를 위한 것임을 알았다”라고 고백했다. 그때까지 벨칸토는 진지함으로 무장한 독일 오페라엔 맞지 않는 이탈리아 옷이었다. 나아가 슈트라우스의 전작 <엘렉트라>는 이탈리아 무명 작곡가 비토리오 녜키의 <카산드라>를 표절했다는 혐의를 받았을 정도로 유사했다. 슈트라우스는 알게 모르게 독일과 이탈리아를 융합하려 했다. 불꽃놀이에 마저 시간을 내줄 마당에 가릴 것이 뭐란 말인가!
취리히 오페라의 감독 안드레아스 호모키(Andreas Homoki)는 이번 시즌을 끝으로 10여 년의 임기를 마치고 떠난다. 한 조역이 대타 출연한다고 알리는 그의 등장은 극중극 <낙소스의 아리아드네>를 위해 짠 듯이 안성맞춤이었다. 사실상 졸부 역할이지만 무대에는 서지 않는 그를 어쩔 수 없이 불러 세웠기 때문이다. 대타 성악가도 무대 의상과 연기 없이 가장자리에 서서 목소리만 더함으로써 극장 예술의 복잡 미묘함을 증명했다.
영상물로 본 예전 취리히 무대가 지나치게 건조했던 데에 비해 이번 연출은 특색 있는 의상과 일렁이는 회전 무대로 긴장감을 더했다. 매끄럽게 회전한 침대처럼 독일과 이탈리아 음악의 앙상블도 완벽했다. 늘 검소하되 방점 있는 취리히 오페라에 바라던 대로였다. 이날 중국 가수의 체르비네타(벨칸토)에 비해 다소 빛을 잃은 아리아드네(정가극)가 후속 무대에서 더 나아졌으리라 확신한다. 작곡가의 노랫말처럼 “음악은 용기를 주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취리히호숫가에 드리운 달빛을 보고 슈트라우스 말이 떠올랐다. “나는 그리스 비극에서 시작한 서양 예술이라는 무지개의 마지막 끝자락에 서 있다.” 바이로이트와 취리히에서 나는 험한 날씨를 뚫고 나온 그 무지개 전체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