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살짝 Dec 18. 2018

나에게 있지만 당연하지는 않은.

안다고 하면서 자주 잊는 것들에 대해.

나름대로 고군분투했던 짧은 입원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요양 기간을 가지고 있는 중이다. 한 마디로 잘 먹고 잘 자고 충분히 쉬는 호사를 누리고 있다. 부모님이 계신 고향집에 왔더니 산삼 세 뿌리가 날 기다리고 있는 데다가 택배 박스도 못 들게 하시는 통에 누가 보면 아주 큰 수술한 줄 알겠다며 웃고 있는 건 덤이다.


어릴 땐 아프고 나면 키가 한 뼘씩 큰 댔지만 성장판이 닫힌 게 한참이니 이제 자랄 건 마음뿐인데, 지난 보름간 마음이 반 뼘은 자랐나 모르겠다. 다만, 아픈 동안 확실하게 느끼게 되는 것들은 있다. 아픔이 아니고서는 평소에 돌아볼 생각을 않는 것들.


이 글은 그런 스페셜 에디션 같은 생각에 대한 기록이다. 언제 또 나 자신이 건강하게 오늘을 사는 게 당연한 듯이 오만하게 굴지 모를 일이니까 :)

어딘가 스페셜한 제주의 풍경들. 먼나무와 도마도, 산타하르방.





내게 주어진 시간과 힘.


응급실로 가기 직전, 읽고 있었던 책 <제주의 3년 이하 이주민의 가게들>에는 다양한 제주 정착 스토리가 담겨 있었다. 그중 금능리에서 민박집을 운영 중이신 사장님이 제주로 내려오게 된 계기가 인상 깊었다.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시며 ‘시간이 아깝다’라는 말을 남기셨다는 거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면서 견디며 살아온 시간이 너무 아깝다고, 그러니 하고 싶은 걸 하라 이르셨다 했다.(기억으로 복원하여 정확하지 않을 수 있음)


마음으로 밑줄 쳤던 그 문장이 담고 있는 감각을 곧바로 몸소 실감할 줄은 몰랐다. 물론 나에게 찾아온 고통은 약과였겠지만, 투병 초짜인지라 수술대에 누워 있던 순간과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기력의 시간들로도 충분했다. 내게 주어진 시간과 힘이 당연하지도, 영원하지도 않다는 것을 느끼기엔 말이다. 주위를 늘 맴돌고 있던 이것도(예쁜 옷도 사고 싶고)! 저것도(SNS에 올릴 사진도 건져야 하고)! 요것도(맛있다는 맛집 나도 가봐야 하고)! 하는 식의 욕망의 안개가 걷힌 느낌이었다.


언제까지고 쏟아져 나올 것 같다는 막연한 낙관 속에 그냥 흘려보냈던 나의 시간과 체력. 인생의 계획과는 별개로, 그 모든 에너지의 방향이 필요하다 느껴졌다. 감사하게도 이번 기회에 방향의 힌트는 하나 얻을 수 있었다. 숨 쉬는 것도 버겁게 느껴지는 상태에서 벗어나 숨 쉬는 게 괜찮아진 정도의 힘을 얻으면 내가 가장 먼저 무엇을 하는 지를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신은 어떤가요? :-) / 사진은 제주 곶자왈 도립공원.

알랭 드 보통의 말마따나, 돈이 아니라 시간이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한정적이고 소중한 재화다. 알면서도 시간과 힘 속에 있을 때면 늘 잊어서 문제겠다. 아니, 늘 잊으면 그건 아는 게 아니던가.





그리고 삶 자체.


이 글에 담긴 생각이 입원하기 직전 읽었던 책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마무리는 퇴원한 직후에 골라 읽은 책에 기대어볼까 한다. 올리버 색스의 마지막 과학에세이 <의식의 강>, 그중에서도 ‘진화의 의미’ 파트에 말이다. 이 책은 흥미로운 주제들을 비교적 쉽고 매력적이게 전달하고 있다. 물론 대학생 시절 과학 교양의 과제가 이런 책을 읽고 리포트를 써서 내는 것이었다면, 욕 바가지로 했겠지만.


구체적인 이야기는 책에 훨씬 훌륭한 방식으로 담겨 있으니 차치하고, 여기서는 진화의 세상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만 떼서 가져와보려 한다. 다윈을 통해 태어난 진화와 자연선택은 우리에게 말한다. 하나하나 개별적인 사건에는 미리 지정된 목적도 의미도 없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시나리오가 얼마든지 펼쳐질 수도 있었다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는 정해져 있던 그림 같은 게 아니라 무수한 우연에 우연이 겹겹이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약 76억 호모 사피엔스 중 하나인 나라고 다르겠는가. 내가 태어난 일과 태어난 이후 겪었던 일들의 발생 가능성을 한 번 계산해본다 치자. 일단 지금까지 나의 모든 조상이 지난한 역사를 겪으며 살아남아 자손을 보았어야 했고... 여기부터 막힌다. 나의 역량으로는 계산할 엄두가 안나는 확률이다. 이렇게 진화와 자연선택은 조금 다른 의미에서 삶의 의미를 깨우는 것 같다. 미리 정해진 목적도 없었을 하나의 일들이 모이고 모여 나에게까지 왔다는 어마어마한 우연을 골똘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기적이라고 할 수 밖에.


누구 하나 생색을 내는 법도 없어서 자주 잊지만, 틀림없다. 내게 주어진 삶 자체가 기적인 것은. 오늘이나 내일 같은 건 당연하다는 듯이 원하지도 않는 것을 원하면서 펑펑 쓰기에는 살짝, 아니 많이 아깝다. 그러니 나도 12월 18일의 겨울 공기를 쐬고 와서 한 줄이라도 더 써야겠다. 이 글이 닿을 모두가 조금 더 좋은 하루 보내길 바라며.


「 진화는 지금과 다르게 진행될 수도 있었다는 생각, 즉 공룡이 아직도 지구를 배회할 수 있고, 인간이 아직 진화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은 나를 혼란스럽게 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삶은 더욱 소중하고 경이로운 현재 진행형 모험(스티븐 제이 굴드의 표현대로라면, 눈부시게 아름다운 우연)처럼 느껴졌다.

우리의 삶은 고정되거나 미리 정해져 있지 않으며, 변화와 새로운 경험에 늘 민감하다.」

 - 올리버 색스, <의식의 강 - '다윈에게 꽃의 의미는?' > 중에서 -
매거진의 이전글 같은 24시간, 다른 하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