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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짝 Sep 15. 2018

같은 24시간, 다른 하루

제주와 여름이라는 계절.

#1. 여름의 끝에 서서.

제주에 살기 시작한 지 두 달이 넘었다.

길고도 강렬했던 여름은 어느새 꼬리를 흔들며 지나가고,

아침에 일어나면 새소리와 함께 선선한 공기가 몸을 간지럽힌다. 

많은 이들이 애타게 기다렸을 올 가을이다. 선하다 못해 선선한 공기를 지닌 가을. 

하지만 여름을 향한 아쉬움의 감정이 내 주변을 맴도는 건, 제주와 함께였기 때문일까.


박연준 작가님은 <밤은 길고 괴롭습니다>에서 '여름의 끝'은 특별한 데가 있다고 말한다.

「여름은 그 끝에서 유난히 계절의 끝남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어렵다기보다는 마음의 동요와 쓸쓸함을 받아들여야 한다. ... 축제의 끝에서 터져버린 폭죽의 잔해를 밟고 서 있는 기분. 매년 겪지만 여름의 끝은 쓸쓸하다. 막을 수 없기에, 사랑과 활기를 거두어가는 것처럼 느껴지므로 후유증을 남긴다.」

- 박연준, <밤은 길고 괴롭습니다> 중 -

후유증이 채 가시지 않은 지금, 제주의 여름이 내게 주었던 날들을 곱씹게 된다.



#2. 제주의 여름날 기록.

여름의 제주는 아름답다. 사실 아름다운 건 어느 계절에나 그렇겠으나, 여름만의 생기가 있다.

어디를 가나 몇 번이고 눈을 비비며 다시 보게 되는 자연의 빛깔이 있고, 곱게 꾸미고 놀러 온 사람들이 있다. 그 속에서 내가 여름 한 철 마음 주고, 한껏 사랑한 것은 '느껴지지만 쥐어지지 않는 것들'이었다.

제주의 바닷물. 바람. 하늘. 밤. 그런 것들.


푸른 보석 빛 바다 속에 들어가 팔다리를 휘젓고 있으면, 다른 세계에 있는 것만 같다. 나를 띄워 하늘도 보여주고, 비양도도 보여주던 판포포구의 바닷물이 좋아 손으로 잡아보려 해도 잡히지 않는다. 느껴질 뿐.

무보정 제주 바다. 아침.


제주에선 하루에도 몇 번이고 하늘을 보게 된다. 세상의 하늘색이 이렇게 다양한 줄, 맹세컨대 몰랐다. 가림막 없는 넓은 하늘을 스케치북 삼아서, 해와 구름이 그려내는 제주 하늘색은 환상적이다.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무보정 제주 하늘. 저녁 무렵.


제주에서의 여름 밤은 조용하다. 한치 배가 떠 있는 여름 밤바다를 보았을 땐, 탄성을 냈던 것 같다. 바다의 가로등 같은 한치 배들. 내가 머무는 곳이 제주의 시골이라 그런 것이겠지만, 기본적으로 해가 저물면 사방이 조용하다. 소리를 내는 건 바다의 파도, 풀벌레, 바람 정도다.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도 거의 없고, 서울 왕십리 자취방 시절 밤이면 심심치 않게 들려오던 취객의 외침같은 것은 TV를 틀어야 겨우 들을 수 있다. 

한치 배가 밝히는 제주 밤바다. 역시 무보정.



#3. 같은 24시간, 다른 하루.

여름 제주에서 보내는 '하루'는 이전에 내가 가져보았던 무수히 많은 '하루'들과 달랐다. 

주어진 시간이 24시간이라는 것 외에는 같은 명칭으로 부르는 게 어색할 정도.

무엇이 더 좋고, 무엇이 더 편하고 하기 전에 일단 확연히 다르다.


아침에 일어나 만원 지하철에 몸을 싣는 대신,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거나 포구에 나가 바닷물에 풍덩 빠졌으니.

점심 때면 회사 근처 카페로 피신 가 샌드위치를 사먹으며 숨을 돌리는 대신, 장 봐 온 재료와 해보고 싶은 레시피를 결합해 직접 요리를 했으니.

해가 지기 시작하면 퇴근 후 집에 가기 위해 바쁘게 걷는 대신, 노을을 만나러 바닷가를 걸어다녔으니. 

다를 수 밖에다.


그래서 제주에 언제까지 머물 예정이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N달이라고 대답하고 있는데, 아직은 정말 모르겠다. 이토록 아름다우니 평생 여기에 살겠어- 라는 확신 따위 없다. 고작 3달 전(1년도 아닌 3달 전!)의 내가 지금 9월 15일에 제주도에서 브런치에 올릴 글을 쓰고 있을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머리가 하는 힘 없는 계획 대신 하루를 살고 볼 일이다.  


대신 제주의 여름 날을 살며, 내가 얻은 조금 더 확실한 사실 혹은 앎을 이야기할 수 있다. 시간을 인지하는 방법이 전자 화면 속 네자리 숫자가 아니라 다채로운 자연의 색인 것은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는 사실. 나의 하루에는 '읽고 싶은 만큼 읽을 수 있는 시간'과 '쓰고 고치고 쓰는 시간'이 가장 우선해야 잠들기 전 마음이 웃을 수 있다는 앎. 두 가지다.

3의 법칙을 위해 가지를 더하자면, 아마 이 영향으로 난 다시는 서울에 살지 못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어쨋든 지금 생각으로는.)


여전히 불안하고, 예민하고, 기복 심한 한 인간이지만

양껏 읽고, 종일 쓰고 고치고 쓸 수 있었던 하루 덕에 아무래도 살짝 좋다. 


「푸르게 물결치는 논길을 걷다 문득 아득해진 이유는 이들의 소리는 이토록 요란한데 단 한 마리의 풀벌레도 눈에 띄진 않는다는 것, 존재한다는 것은 알지만 그들 하나하나를 확인할 길이 요원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미래 같거든요. 알아요. 멀리서 오고 있다는 것. 보이지 않지만.」

- 박연준, <밤은 길고 괴롭습니다>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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