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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짝 Nov 28. 2018

누군가를 사랑하면, 글이 된다.

자칭 '긍정적 허무주의자' 관찰 일기.

조르바 옆에서 시간은 전혀 다른 맛을 냈다.
그와 함께하면 시간은 더 이상 단순한 사건들의 연속도 아니었고, 내 내면에서 풀리지 않는 철학적 문제도 아니었다.
그 시간은 내 손가락을 간지럽히며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아주 가는 뜨거운 모래였다.

- 니코스 카잔자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중에서 -



누군가를 오래 사랑하고 관찰하다 보면, 그 자체가 글이 된다는 말을 좋아한다. 실제로 그렇게 탄생한 글들은 '좋다'를 넘어, 글이 살아 있는 느낌이다. 그래서일까.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대화할 때면 수시로 펜을 들고 휴대폰 메모장을 켜서 그가 하는 말을 적어둘 때가 많다. 기억해두고 싶은 말을 자주 발견하게 된다.


요 근래 가장 자주 펜을 들게 하는 건, 단연 남자친구다.

그와 함께한 계절은 겨우 세 개째인데, 그의 말을 모아 놓은 글은 A4용지로 100페이지가 넘었다. 자칭 '긍정적 허무주의자'인 그의 말속에 깃든 무언가에 나는 자주 반한다. 산도르 마라이가 소설 <열정>에서 '영혼들의 비밀스러운 현실'이라고 표현한 바로 그 무언가. 주변에서 '그의 어디가 좋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이걸 말해 말아 고민하다가 '그냥 좋아' 하고 웃고 만다. (말로 하면 심하게 오글거릴 것 같기도 하고.)


그냥이라는 단어에 뭉개진 채 남겨진 진짜 대답들이 쌓이고 쌓이다 보니, 이런 글이 쓰고 싶어 졌다.

혼자 알기에는 아깝다 느껴졌던 그의 말들을 꺼내 모은 글. 혹은 우리가 나누어 온 많은 대화의 조각을 가지고 노는 글. 오늘은 그중에서도 내가 좋아한 세 가지 대화를 엮어보고자 한다.




영화가 담아내는 것.

봄과 여름이 밀당하던 5월 말의 어느 날. 나는 그에게 영화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이 있냐고 물었다.

'세상에 진짜 정의가 무엇인지 알려주겠어' 뭐 이런 류의 대답을 생각하고 던졌던 것 같기도 하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영화는 말이 아니야. 영화는 말하는 게 아니라, 보여주는 거야."

나는 갸우뚱 되물었다. "보여주는 거?"

"말이 아니라 말에 차마 다 담지 못하는 말과 말 사이의 틈. 그걸 그냥 보여주는 거야."


그러면서 그는 만약 자신이 나중에 유명한 영화감독이 되어서 '영화가 뭐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대답할 말을 미리 생각해두었다고 했다.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대답했다.

"거짓말로 전하는 진심."

그리곤 덧붙였다.

"다 거짓말이야. 조명도, 소리도, 이야기도, 인물도. 근데 그 안에 진심을 담아. 진실은 아니야. 거짓말이니까."


나는 그의 대답이 마음에 들어,

"내가 나중에 훔쳐 써야지. 작가님, 소설이 혹은 드라마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그러면 '거짓말로 전하는 진심' 그래야지." 했다.

그러자 그는 웃으며 "그래. 너 써라" 했다.


이 대화 이후로 영화의 장면 장면마다 '이건 무슨 의미지?'라고 바쁘게 생각하던 버릇이 멈췄다.

그냥 좀 더 편하고 재밌게 보게 됐다. 그의 말마따나, 틈 사이에 담긴 진심을 느끼고자 하면서.

언제쯤에나 인터뷰에서 그 질문을 받을지 가늠하지 못하는 나는 이 말이 여전히 좋아서, 참지 못하고 이렇게 썼다 :-)





재능의 숨은 정체.

방송 프로그램 <고등 래퍼 2>에서 김하온이란 친구를 알게 되고, 난 한 번에 하온이의 팬이 되었다. 그 아이의 음악뿐만 아니라 태도와 에너지 모두를 덕질했다. 한창 푹 빠져 있을 때는 누구를 만나든 하온이 얘기를 한참은 하고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남자친구에게도 어김없이 하온이 이야기를 떠든 적이 있다.


"하온이가 1년 전쯤에도 비슷한 프로그램에 출연했었는데, 그땐 지금처럼 색깔도 없었고 실수하고선 예선 탈락해서 사람들 기억에서 잊혔었거든. 그래서 친구가 물어. 1년 동안 네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뭐냐고."

"응."

"하온이는 이렇게 대답해. No pain no gain이라는 말이 굉장히 무서운 프레임인 것 같지 않느냐고 말이야.

죽어라 열심히 해야만 한다는 그 말에 갇혀서 무작정 열심히 하는 대신, 자기는 최대한 즐기려 했대. 와. 어쩜 이럴 수 있지? 너무 멋있지?"

신나서 하는 말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게 재능이야. 계속 재밌을 수 있는 거.

하다 보면 재밌기만 한 순간이 이어지는 게 아니거든. 재미없고 싫어지는 순간이 찾아와.

근데 계속 재밌을 수 있다는 게 재능인 거지.

타고나게 잘하는 것도 물론 재능이지만, 그렇게 계속 재밌을 수 있어서 결국은 잘하게 되는 것도 재능이야."


계속 재밌을 수 있는 힘. 하고 수시로 되새겨본다.

짠-하고 완벽한 능력을 갖추어 태어난 것이 아니라, 계속 재밌을 수 있는 것도 재능이구나. 타고난 능력의 차이를 탓할 시간에, 역시 재미있는 일과 가까이 지내야겠다 다짐하면서.


당신은 무엇이 계속 재밌나요?




별똥별을 보며 소원을 빌면 이루어지는 이유.

최근에 읽은 림태주 작가님의 에세이집 <관계의 물리학>에도 거의 같은 이야기가 적혀 있는 걸 발견했다.

그래도 역시나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들려준 버전의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든다. 사람은 주관적이니까 :-)


가끔씩 걱정병이 감기처럼 도지는데,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지금 내가 명작을 써 내려가는 것도 아닌데, 어디든 회사에 다시 들어가야 하나- 아니면 대학원 입학을 진지하게 알아봐야 하나- 괜히 생각이 무거웠다. 마음이 아래로 가라앉고 짓눌리던 날. 그런 나에게 그는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었다.


"별똥별 보면서 소원 빌면, 왜 이루어지는지 알아?"

"왜?"

"진짜 짧거든. 말 그대로 순간이야. 별똥별이 떨어지는 그 짧은 순간에 소원을 빌 수 있다는 건, 그만큼 그 생각만 하는 사람인 거지. 매일 글을 쓰면서 좋은 작품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별똥별이 떨어지는 걸 보면 바로 '좋은 작품 쓰게 해 주세요'하고 빌 수 있는 거지. 그냥 어영부영 남는 시간에 해보고 아님 말고 하는 식으로 사는 사람이면 별똥별이 떨어지는 걸 봐도 어... 하다가 다 지나가버려.


그러니까 내 말은. 별똥별이 떨어질 때 소원을 빌 수 있는 사람이면, 뭘 해도 되지 않겠어?

매일 거기에 에너지를 쏟고 있을 테니까 말이야.


그러니까 언뜻 보기엔 비슷하게 사는 것 같아도 완전히 다른 시간을 사는 거야. 그렇게 사는 시간이 저장돼서 결국 네가 글을 쓸 때 다 나오는 거지.”


나만 좋은 이야기를 좋다고 쓰는 건가 싶은 갸웃거림을 제쳐두고 여기까지 쓴 건, 나와 비슷한 누군가에게는 그의 말이 닿지 않을까 싶어서이다. 어딘가를 향해 가고는 있지만 아직 손에 쥐어지는 게 없어 자주 손을 쥐었다 폈다 해보는 누군가에게는 긍정적 허무주의자의 개똥철학이 살짝 통하지 않을까 싶다. 바로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혈액형이 같은 사람들만이 위험한 상황에서 서로 도울 수 있듯이, 영혼들도 견해와 확신 저편의 극히 비밀스러운 현실이 '다르지' 않을 때만 서로 도울 수 있어. 삶의 가장 큰 비밀과 최대의 선물은 '비슷한 성향'의 두 사람이 만나는 것일세.
...
삶은 인간에게 무엇이든 줄 수 있고, 또 인간은 삶에서 무엇이든 얻을 수 있네. 그러나 인간의 취향, 성향, 삶의 리듬은 바꿀 수 없어. "

- 산도르 마라이, <열정>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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