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남긴 것.
왕복 약 2시간을 달려서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고 왔다.
거리가 거리인 지라, 제주에서 영화 보러 가는 일은 흔치 않은데 말이다.
영화의 스토리 전개와 구성이 그만큼 매력적이었느냐 하면, 글쎄다.
개인적으로는 눈을 못 뗄 만큼 흡입력을 느끼지도, 인물 하나하나에 애정을 느끼거나 특별히 매료되지도 않았다. 영화가 끝나고 출입문으로 향하는 길에는 뒤에 있던 꼬마가 "지루해서 영화 보다가 잠든 건 처음이네!" 하는 말이 들려와 킥킥 웃으며 영화관을 나섰다. 밴드 Queen과 그들의 노래에 대해 열광의 기억이나 향수의 감정은 고사하고, '아- 이 노래!' 하는 일말의 반가움도 없을 꼬마야말로 전체적인 영화에 대한 평을 정확히 던진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전개를 어떻게 고치고, 인물 묘사를 어떻게 바꾼다 한들 그 모든 건 여전히 부수적이었을 것 같다.
Queen의 노래, 무대, 공연. 구태여 설명할 필요도 없이 그것들이 자체로 영화였다.
미친 듯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그들의 노래와 무대를 재현한 장면은 보고 있으면 그냥 눈물이 났다. 영화관에서 돌아온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스피커로 Queen 노래를 무한 재생함으로써, 곳곳을 콘서트장으로 만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주변의 많은 친구들과 지인들로부터 '쩔어!'라는 평이 들려오긴 하지만, 각자가 발견한 감동의 포인트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물론 압도적 에너지의 라이브가 주는 전율이 디폴트 값이라 추측하고는 있다 :-)
특히 프레디 머큐리. 그가 자신의 삶 그리고 음악적 행보에서 보여주었던, 새롭다 못해 파격적인 선택들은 무척 다양한 느낌과 생각을 안겨준다.
어떤 이유에서 찬양한들 놀랍지 않고, 어떠한 이유를 들어 욕에 욕을 퍼붓는다 한들 놀랄 일도 없는 느낌이다. 어쨌든 나의 경우는, 주관을 가득 실어 그의 '거침없음'과 '타협하지 않음'에 찬탄을 보내고 싶다.
세상의 관념을 놀리는 듯 유연하게 형식을 넘나드는 파격은 차례차례 시도되고, 시도가 진보적이었던 만큼 거센 비평과 반대도 늘 존재했다. 그럴 때마다 그가 방향을 바꾸었는가? 전혀다. 그럼 사람들에게 먹힐 수준으로 타협하였는가? 역시나 전혀다. 그는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믿었다.
그 결과로 무수히 많은 처음(또는 레전드)을 만들어낸다.
쉽게 쉽게 가지도 않고, 좋게 좋게 하지도 않는 고집스러움.
바로 그 고집스러움이 스크린으로부터 내가 앉은자리까지 넘쳐흐를 때마다,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아마 내가 늘 타협의 세계에서 살았기 때문일 테다.
내 안의 것과 세상의 것이 부딪힐 때마다, 나는 백이면 백 세상의 손을 들어줬다.
싸우는 건 힘들고, 사람들한테 미움받기 싫고, 때로는 귀찮고, 무엇보다 돈이 안 되니까.
내가 프레디 머큐리였다면 어땠을까. 제작자가 '6분이 넘는 곡은 라디오에 못 나가니 안된다'라고 하면 말싸움할 것도 없이 "그럼 뒷부분 날리고 3분으로 만들어 오겠습니다"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애초에 보헤미안 랩소디 같은 곡을 쓸 생각도 안 했겠지만.
그렇다고 타협이 마냥 비겁하다고만 생각하는 건 아니다. 우리 모두가 프레디 머큐리가 되어야 한다고 찬양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프레디 머큐리라면 그것 또한 너무나 혼란스러운 세상일 테고..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타협은 필요하다. 앞으로도 나는 많은 것을 타협하며 살 것이다.
하지만 자신만의 '타협하지 않는 부분'이 있는 가 없는 가는 조금 다른 문제인 것 같다.
세상이 박수치기는 커녕 요상한 잡탕(노래 '보헤미안 랩소디'에 대한 당시 평가 중 하나) 같은 걸 만들어냈다고 욕을 해댈지라도, 개의치 않고 지킬 것이 있는 가이다. 아무도 나를 믿어주지 않을 때, 내가 나를 믿을 수 있는 힘이 남아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런 걸 소신이라고 해야 하는지, 자유라고 해야 하는지. 아니면 둘 다인지 모르겠다.
그것이 무엇이든. 요즘 여기저기서 회자되는 '나로 사는 법'의 정수는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