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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짝 Nov 01. 2018

'하던 것만 하는 자리' 탈출기.

새로운 것을 시작할 때, 함께 시작되는 찌질함에 대하여.

요즘 자주 속이 울렁거린다.

멀미가 심한 편이긴 하지만 멀미 때문은 아니고, 안 해본 것을 해보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친구의 '드라마 시나리오 한 번 써봐. 네가 읽어본 시나리오 참고해서, 일단 써봐. 해보자.'라는 말과 함께, 비공식적인 프로젝트에 착수한 이후로 펜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는 중이다.

의욕이 샘솟고 설레는 건 딱 하루 정도고 그 이후로는 울렁거림과 지끈지끈이 매일 같이 찾아 온다.


'어디 제출하는 것도 아닌데 그럴 것까지 있나-'라고 나 또한 생각하지만, 마음을 다해 좋아하는 것 앞에서는 속수무책인가 보다. 몇 달 전에는 브런치에 글을 올려보겠다고 글 두 편을 써놓고, 작가 승인이 거절당할까 무서워서 작가 신청 버튼을 누르는 데에만 꼬박 한 달이 걸린 사람이 나다. 매일 꽁쳐놓고 끄적거리던 글을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공간에 펼쳐놓는 데만도 참 오래 걸린 거다. 그런데 요즘은 머뭇거리는 정도가 아니라 온 몸의 장기들이 떠는 기분이다.


변명할 여지없이 겁이 난다. 해보고 싶은 걸 하지 않으면 온몸이 찡그리는 이 고집스러운 성격만 아니었어도, '새로운'이나 '도전'같은 단어는 아주 먼 바다에 묻어두고 가벼운 마음으로 헤엄쳐 나올 텐데 싶다. 공공기관 발주형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마다, ‘하던 것만 하는' 일관된 업무방식이 참 싫었는데, 점점 그 마음이 이해되기도 한다. 안 해본 것일수록, 진심일수록 더 큰 거다. 두려움도 크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도 크고, 잘 못해낼까 걱정되는 마음도 크다.




이런 때에 위안이 되는 건 이 모든 멀미감을 먼저 겪은 사람들의 존재다.


김미경 강사님의 동영상 중에 '내 무능을 직시해야 유능해진다'라는 제목의 강의가 하나 있다.

https://youtu.be/kFBhlOJ2zDE 

링크 걸어둘 만큼 내용이 좋으니, 궁금하신 분은 재생 고고.


이태리로 날아가 패션 디자이너에 도전한 경험을 풀어내며, 그녀는 말한다.

"엄청 찌질한 나를 매일 목격했어요."
"나는 오늘도 내 무능과 엄청 싸워요.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봐요. 이 과정이 없으면 내가 어떻게 유능해지겠어요? 지금 내 무능이 없으면 어떻게 거기까지 가겠어요?"


좋아하는 웹툰(진눈깨비 소년) 중에는 이런 장면이 있다.

드라마 촬영을 앞둔 조감독이 B팀을 맡아 자신이 감독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고민하자, 그의 여자친구가 이야기를 하나 들려준다.

"어떤 감독이 아침에 차를 타고 촬영장에 가는데 그런 생각이 들더래. 아, 이 차가 촬영장을 지나 제주도까지 갔으면 좋겠다. 그런데 어떤 세계적인 감독이 촬영장에 가던 도중 토했다는 얘길 듣고 위로를 받았대."

영화 현장과 방송국에서 연출 관련 일을 하셨던 작가님의 이력을 생각해보면, 모르긴 몰라도 그 세계적인 감독이 책에만 있는 건 아니겠구나 생각한다.


 


'새로운 일', '도전'이 현실에서 움직이는 모습은 단어 속에 내재된 이미지와는 다르게 그리 멋지지도 않고, 설레지도 않는다. 보잘것없고, 쫄아 있다 못해 찌질하기도 하다. 아니 어쩌면, 필연적으로 찌질하다. (역사 속 몇 안 되는 천재는 제외하자.)


위에서 인용한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자신이 겪었던 무능을 유능으로 전환시킨 상태에서 무능을 되짚어 이야기하니 그조차 멋지지만, 난 아직 무능에서 한창 헤엄치고 있는 상태라 이 글은 무능함과 찌질함을 날 것 그대로 고백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심지어 무능이 유능으로 전환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지 조차 현재로서는 알지 못한다. 만약 전환이 가능하다면, 전환에 필요한 시간이 5년 일지, 10년 일지, 죽기 직전일지도 역시 모른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어떤 일을 좋아하는 것과 실제로 그 일을 잘할 수 있는가는 전혀 별개의 문제니까 말이다. 직접 해보기 전까지는 모른다. 그럼 대체 아는 건 뭐냐고 묻는다면, 포기한다 해도 그 타이밍은 해볼 만큼 해 본 후여야 깔끔하다는 것은 안다. 그리고 일단은 물 먹어 볼 수밖에 없다는 것과 누구도 대신 마셔줄 수 없으니, 바랄 것 없이 내게 주어진 몫에 온 힘 다해야 한다는 것 정도.


쉽진 않지만, 해볼 가치는 있어.
오늘보다 훨씬 끔찍한 날들도 있을 거야.
거기에 질식해 죽는 것도 자유지.
근데.. 글쎄다. 난 살고 싶어.
- 영화 '와일드'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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