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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짝 Sep 13. 2019

나의 오랜 친구 S에게.

허구의 이야기 혹은 기억 속 자화상

우리의 정신적인 능력이란 유년 시절부터 지금까지 '쌓여오는 것'이 아니라 마치 우주에 별들이 자리 잡듯 우연적으로 '산포 되어 있어서' 부분의 상실에도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

- 김금희, <오직 그 소년과 소녀만이> -

미취학 아동 시절을 통틀어서 그리고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S는 사회성을 발달시키는 데 애를 먹었다. S는 심하게 숫기 없고 상당히 움츠러든 아이였다. 유치원 시절 으레 남자아이들이 그러곤 하는 머리 잡아당기기나 놀리기 등을 견디지 못하고 S는 매일같이 울음을 터뜨렸다. 결국 얼마 못 가 S는 유치원을 그만두었다.  


하지만 유치원을 그만둔 것처럼 자꾸만 부끄러워하는 모양새를 그만둘 수는 없었다. 초등학교에 가서도 교과서 읽어보라는 선생님의 지목이 자신에게 향할까 가슴이 벌렁벌렁거렸고, 사람들 앞에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참을 수 없게 느껴져 얼굴이 벌게지고 목소리가 떨렸다. 사람들이 뭉텅이로 모여 있는 곳 자체가 S에게는 괴로움이었지만 그 누구도 S의 불편함 따위에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다만 S의 엄마 Y는 S를 앉혀놓고 목소리를 크게 내라고,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말하라고 주문하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작은 걸 어떡하냐는 S의 볼멘소리에도 Y는 목소리를 크게 하라는 단호한 호통으로 일관했다. 이 목소리 전쟁은 몇 년에 걸쳐 Y와  S사이에 발발하여, S는 Y에게 목소리 크게 하기 싫다고!!!!라는 말만 엄청 크게 하는 기괴한 짓을 시전 하기에 이르렀다.


휴전인지 정전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전쟁 중이 아닌 것만은 확실한 때 즈음이 되어서 문득 그 사건이 궁금해진 S는 Y에게 물었다.


 엄마 그때 갑자기 왜 그렇게 목소리 크게 하라고 했어?


그러자 Y는 대답했다.


너 초등학교 1학년 때인가, 담임선생님 상담을 갔는데 글쎄 네가 다른 애들에 비해서 좀 모자라고 이상하다는 거야. 그 말을 듣고 어찌나 속상하던지. 그때는 선생님이 너무한다는 생각보다도, 우리 딸 그런 말 안 듣게 해야지 싶더라고. 애가 목소리가 작아서 그런가? 싶고.




나는 의아했다. 세상에 태어난 지 고작 8년밖에 안 된 인간에게 모자라고 이상함 딱지를 붙이는 것이야말로 이상하게 느껴졌다. 어떤 8살이, 아니 어떤 인간이 이상한 곳 하나 없을 수가 있나? 사람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는 이상하다는 말은 철저히 타자의 시선에서 타자가 내뱉는 좁디좁은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했다.  


어떤 아이는 말을 늦게 배우고, 글을 배우는 데 시간이 좀 더 걸리는 것처럼 S는 그냥 많은 타인이 모여있는 공간 혹은 집단에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더 걸린 아이였다. 타인 자체는 괜찮았다. 그때도 친구는 잘 사귀었으니까. 그러니까 그냥. 그냥 S는 좀 그럴 뿐이었는데 하고 나는 소리 없는 말을 흐리게 된다.


그럴 수도 있지- 같은 말들은 어디로 가고 왜 그토록 쉽게 딱지를 붙이는 말들만 남아서 돌아다니나. 소위 정상이라는 표준 기준이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모든 영역에 그어져 있어서 그 기준선을 넘지 못하고 아래에서 발꿈치만 들었다 놨다 초조해하고 있으면 즉각 주변에 있는 모든 이들이 빨간 카드를 꺼내 눈 앞에 들이미는 세상에 던져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열을 올리는 나에게 S는 담담히 말했다.


나도 그랬는데 뭐.


S는 자기가 가진 묵직한 주머니 안에 그럴 수도 있지 같은 게 적힌 카드는 없었다고. 주머니를 여미고 있던 줄을 느슨하게 풀어 열어보면 온통 삐-삐 소리가 곁들여진 빨간 카드뿐이었다고 했다. 모자람. 부족함. 맘에 안 듦. 못남. 망함. 그런 것들. 스스로 고를 수 있는 카드란 그런 것뿐이라, 더 열심히 잘하라고 멍청아 같은 말을 S 자신에게 해서 더 열심히 하는 S가 되고, S는 어쩜 이렇게 잘하고 착하니 같은 타인의 말을 받아오는 방법밖에는 없었다고.


나는 아직도 그 말을 하던 S의 말투와 표정을 떠올릴 때면 아주 텅 빈 동시에 꽉 찬 마음이 되곤 한다. 텅 빈 부분만큼은 말 그대로 텅 비어 있었고, 꽉 차 있는 부분은 틈이랄 게 없이 꽈악 차 있는. 내밀한 불균형이 아득하게 감각된다.


그래서 더더욱 간절하게, 텅 빈 곳을 채울 만큼, 꽉 차 있는 곳을 덜어줄 만큼의 마음을 보낸다.

이제는 커진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내가

우리 우주의 어딘가 S, 네가 자리 잡고 있을 곳까지 들릴 만큼.


나의 어리고 오랜 친구 S야. 그럴 수 있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지.

그 때의 너도. 지금의 나도.

「생각해보면 타인과 얼마간이나마 차이가 있는 것이야말로, 사람의 자아란 것을 형성하게 되고, 자립한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유지해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 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나'라는 것은, 나에게 있어 하나의 소중한 자산인 것이다. 마음이 받게 되는 아픈 상처는 그와 같은 인간의 자립성이 세계에 대해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될 당연한 대가인 것이다. 」

-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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