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는 네 반응에 실은 이렇게 대답하고 싶었다.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 선택하기 전,
광선은 자신의 최종 목적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
- 테드 창, <Story of your life> 중 -
이전에 회사를 다니지 않겠다고 결정했던 몇 번째쯤의 이유에는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을 단 한 명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도 있었다. 다니고 있던 회사와 아닌 회사를 모두 포함해서. 그래서 이직이 아닌 퇴사였다. 오만한 생각이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회사 생활에 낙이 되는 한 가지 큰 축이 승진이라는데, 저 사람이 있는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싶다는 생각이 도무지 들지 않았다. 고용 안정화와 좋은 직장의 지표라는 근속연수는 여기를 그렇게 오랫동안 다닌다고? 하는 서스펜스에 가까웠다.
요 모양인 사람이기에, 회사를 나오면서 생각했더랬다. 만약 다시 회사에 가게 된다면, 그때는 아마 자기실현에 대한 과한 기대를 모두 내려놓은 채 회사를 순수하게 경제적 수단만으로 바라보는 것이 가능할 때 일거라고.
생각이 씨가 되어 순전히 현실적인 필요로 다시 회사 생활을 시작했다. 물가는 비싸고, 집값은 미쳤는데, 로또는 사는 족족 낙첨인, 2019년 대한민국에서 나를 잘 먹여 살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게 전부다. 깨질 환상 따위 애초에 갖고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니 이전처럼 괜한 실망감을 느낄 일은 없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회사에서 평정심을 유지하는 인간이 된 것은 아니었다. 세상에 기여를 하지는 못할망정 더 구리게 만들려는 움직임은 끔찍하게 싫다. 구리게 만드는 단 하나의 이유가 돈에 있는 것에도 동의할 수 없다. (비록 나는 돈 때문에 일을 하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든 아니든 눈 앞에 일을 설렁설렁 대충 뭉개거나, 자기가 하는 일을 유기하는 태도에는 싫은 마음이 차오른다.
하루 중 많은 시간을 같은 공간에서 보내는 사람들과 좀 더 다정하게 지내고 싶고, 자본을 불리는 것 외에 다른 이야기도 하고 싶다. 눈을 마주치면 웃음을 짓고 싶다. 맛있는 걸 함께 먹고, 생일을 축하해주고 싶다.
조금 촌스럽고 아직도 나이브하다.
여전히 회사의 부장님도, 전무님도 되고 싶지 않다. (머니-스트레스-프리 상태에 도달한다면) 나는 서점 아르바이트생이 되고 싶다.
일단 비행기를 오래 타야 다녀올 수 있는 곳에 몇 주 혹은 몇 달 머물다 온 뒤에, 서점 아르바이트생으로 취직하는 거다. 이틀이나 삼일쯤 서점에서 책을 만지고 정리하고 팔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마음에 드는 책을 마구 발견하고. 나머지 사흘이나 오일 동안은 서재에 파묻혀 책을 읽고 끄적이고 생각하다 또 글을 쓰는. 그런 일주일들을 갖고 싶다.
조금은 못생긴 고양이도 한 마리 입양해올 거다. 털이 북슬북슬한 그 아이를 끌어안고 있다가 나른해지면 눈을 감고 낮잠을 푹 잘 테다. 으. 당장 이 시간으로 뛰어들고 싶다. 머니 스트레스가 있더라도 해볼까? 싶어 진다.
실은 몇 달 전부터 각종 일자리와 구직자들을 연결해주는 플랫폼 사이트에 서점 일자리가 생길 경우, 메일로 안내받는 알람 서비스를 등록해놓았다. 그렇게 하루에 한 번 받아보는 12건의 서점 아르바이트 관련 신규 채용정보 메일 속에는 GS편의점 강서점, 한식 이십사절기 수서점, 홈플러스 강서점 일자리 같은 것이 12개 나열되어 있다. 서점은 없다. 먹고 자고 책 사보고 연애하고 친구를 만나 노는 데 필요한 돈을 서점 아르바이트로 충당하긴 턱없이 부족하겠지- 생각은 했지만, 일자리를 내놓은 서점 자체가 없으리라는 생각은 못했다.
아무래도 로또가 돼서 서점을 낸 후 나를 고용하는 게 빠를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에까지 도달하면, 그놈의 로또 가정법에 내가 원하는 삶의 실현을 건다는 게 부아가 치민다. 이런 식으로 유예하다간 영영 멀어지고 말 것 같다는 초조함도 들고. 제대로 원한다면 어떻게든 지금 내가 가진 시간으로 다가가야 한다. 지금 손에 쥐어진 이 시간까지 소중히 하면서.
그러니 로또가 되지 않은 이번 주에도 성실히, 빡세게 일할 참이다. 어쨌든 지금은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