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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퇴근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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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짝 Jul 01. 2021

Day 5|몸과 마음은 하나니까, 마음.

천재가 되어야 한다면 나는 '다시'의 천재가 되고 싶다.
- [이슬아, 너는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어] -



퇴근 일기를 빼먹은 지난 일주일 동안 마음 한구석을 묵직하게 짓누르는 일이 있었다.


청년들을 대상으로 진로 강의를 하는 선생님이자 서로의 삶을 지켜봐 주는 친구. 나나와의 일이었다.  

2주 전쯤 나나에게서 책 읽기 모임을 맡아보지 않겠느냐는 연락이 왔다.

오모나- 그것은 나의 영역이지 않은가? 재밌겠다! 좋아! 하며 덥석 물었다.

출퇴근 생활에서 사막화돼버린 두 가지(자발적인, 재밌는) 영역을 깨우는 일이라면 평일 새벽 시간까지 바칠 준비가 된 인간. 그건 나였다.


그날 밤 나나를 만나 밤늦도록 수다를 떨었다.

주요 장르는 소설로 하자, 모임은 온라인 줌으로 하자, 기간은 격주에 한 번이면 적절하지 않을까, 독후감은 집어치우자.. 등등.


문제의 일은 그날로부터 일주일 후. 멤버 모집 공지를 위해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누다가 벌어졌다.

나나는 김영하 작가님의 영상 링크를 하나 보내왔다.

"소설은 우리를 좀 다른 세계로 데려가서 나와 전혀 다른 상황에 있는 인물에 감정 이입을 하게 만들거든요. 이게 왜 중요하냐면 그것을 통해 결국 자기 자신을 이해하게 되거든요."

독서모임에 대한 나나의 입장은 명확했다. 나나는 본인이 구축해놓은 청년 진로 클래스의 연장선에 있는 독서모임이기 때문에 결국은 자기 이해라는 목적이 중심이 되는 것이며 책은 수단일 뿐이라는 걸 강조하고 싶어 했다.


살짝 아득해졌다. 내 입에선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제가 아는 소설을 통한 자기 이해는 나를 잊고 빠져들어서 소설을 살다 나와보니 아- 하고 이해되는 지점이 생기는 식인데, 자기 이해라는 명확한 효용과 목적이 먼저 존재하면 오히려 그 목적에서 멀어지지 않을까요?"

교과서와 수험서를 떠올리면 알 수 있다. 목적이 분명해지면 세상에서 가장 먼저 재미없어지는 게 책이다.

퇴근 후 오로지 재미 추구에 돌진하는 내게 재미가 없어진다는 건.. 그걸 할 이유가 없어진다는 거다.   




나나와 나의 대화는 자꾸만 길어졌지만 어딘가 계속 엇나갔다.

각자의 입장을 얘기할수록 서로의 차이만 명확해졌다.

나나에게 책은 수단일 뿐이었고, 나에게 책은 그 자체가 목적이었다.

나나에게는 주업에서 이어진 ON 영역의 일이었고, 나에게는 주업에서 완전히 벗어난 OFF 영역의 일이었다.

나나에겐 망하면 지장이 생기는 일이었고, 나에겐 망해도 아무 지장 없는 일이었다.

나는 재밌으면 그만이었지만, 나나는 디테일을 챙겨 완성도를 높여야만 했다.


우리는 입장과 관점과 생각이 모두 다른 탓에 서로의 말에 자꾸 예민하게 반응하다가,

새벽 1 반에 이르러서야 '일단 이렇게 정리해보자'하는 어색한 마무리와 함께 대화를 종료했다.


다음 날부터 모든 게 싫고, 그만두고 싶어 졌다.

기름진 햄버거와 설탕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알 수도 없는 밀크셰이크 따위를 입에 마구 (쳐) 넣고 싶은 느낌에 자꾸 휩싸였다. 틈이 생긴다는 건 그런 거였다. 마음에서 느껴지는 순간 감각의 세계에서 어떤 식으로든 메우고 싶어지는 거.  주말에 한식 오마카세를 먹으러 갔는데도 평소처럼 신이 나지 않았다. 운동을 힘들게 할 때 잠깐 분리되긴 해도 사라지진 않았다.


요상한 마음의 무게감이 스르르 종적을 감춘 건 다시 제대로 나나와 대화하고 난 후였다.

서로의 입장이 너무나 달랐던 것을 이해하고, 마음이 불편했던 것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서로를 긍정하는 언어를 다시 꺼내들 수 있었다.

나나는 내게 지금처럼 고유의 아름다움을 존중하는 눈을 계속 지켜달라 했고, 나는 나나의 정확하고도 본질을 꿰뚫는 시선이 멋지다고 이야기했다.


나나네 독서 모임은 결국 내가 맡지 않기로 했다. 예전엔 하느냐 안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마음 편한 게 해피엔딩이다. 운동을 하고 좋은 것을 먹이고 온 힘을 다해 몸을 돌본다고 해도, 마음이 편하지 않으면 탈이 난다.


그러니까 나를 괴롭히는 생각으로부터 한 발자국 멀리 떨어져야 하고, 나를 짓누르는 억압감을 한 스푼 내려놓아야 하고, 스멀스멀 올라오는 감정에게 빠른 인사를 고해야 한다.

인류 평화 이전에 나 하나의 평화를 위해서, '대체 왜 사냐'가 아니라 '사는 건 신나고 재밌지'의 세계에 발을 들이기 위해서. 꼭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냥 난 그러고 싶다.

대단한 의미가 있지 않아도 기왕 태어난 거 재밌고 알차다고 느끼는 날이 많았으면 한다.

다시, 또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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