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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뽀끼 Sep 23. 2024

라면의 순기능

딱 미치기 직전이었을 거야, 내가 라면 물을 올렸던 게.

이혼 전까지만 해도 아이가 학교 간 시간을 활용해 피아노 강사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이혼 후 친정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직장이 멀어졌고 자연스레 그만두게 됐다. 당장 보내야 할 양육비와 생계를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졌다. 근처 피아노 학원을 물색해 보아도 전에 일하던 때보다 확실히 월급이 적었다. 일할 곳을 찾아보며 바싹 말라가던 와중에, 30년 지기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요지는 이러했다.

<아르바이트만 하면서 최저시급을 받다 보면 더 아무것도 도전할 수 없게 될 것 같다. 인생은 40부터다. 이제라도 진지하게 뭘 할 수 있나 찾아봐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못할 게 뭐가 있냐. 천천히 생각해 봐라.>

내가 친구들과 연락을 끊고 오랫동안 잠수 탈 때에도 꾸준히 연락을 해주던 친구였다. 고마운 마음과 동시에 머릿속에선 '말이 쉽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감은 바닥이었고 누굴 만나기도 버거운 상태였다.


얼마간 친구의 메시지가 눈앞에 동동 떠다녔다. 곱씹을수록 날 향한 응원이 느껴졌다. 장고 끝에 인생의 방향을 틀어 보기로 했다. 어쩌면 내 인생에 다신 없을 무모한 결정이었다. 가진 돈으로 가장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경매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틈틈이 경제 뉴스와 부동산 책을 읽었던 것이 꽤 자극이 되었다. 이미 전문가들이 넘쳐나는 판에 새로 들어가도 되나 고민도 됐다. 그렇지만 시작도 전에 포기하기는 싫었다.

나이제한이 없다는 게 가장 큰 매리트로 다가왔다. 혼자 공부하는 것도 가능했다. 방구석에서 도통 나가지 않는 내겐 어쩌면 최적의 직업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본격 경매에 들어가면 여기저기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공부 후에 알게 됐다.)


마음먹으면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인지라 경매 책을 주문했다. 한 권으론 도통 감이 잡히질 않았다. 도서관에 매일같이 출근했다. 밤낮 가리지 않고 책을 읽고 공부하며 지식을 쌓아갔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을 때는 알 때까지 검색했다. 안 그래도 척추 측만증 때문에 오래 앉아있기도 힘든데 몸에 피로가 누적되는 게 느껴졌고 공부만 주야장천 하다 보니 하루에도 몇 번을 경매 꿈을 꾸다 깨곤 했다.


세상이 온통 경매로 보이던 어느 날, '안 되겠다. 스트레스 풀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매 책을 탁 덮고선 냉장고로 향했다. 먹을만한 게 보이질 않았다. 하는 수없이 라면 수납장을 열었다. 진라면 매운맛 다섯 봉지가 쪼르르 줄을 서 있었다. 어찌나 정성스레 쌓아뒀는지 오와 열이 반듯했다. 잠시 뉴스 기사가 뇌리를 스쳤다. 대략 ‘나트륨이 높아서, 탄수화물뿐이라서, 영양적으로도 좋지 않고 비만을 유발한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나라 국민 중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던가! 그렇지만 라면처럼 저렴하고 간편히 먹을 수 있는 데다가 그 소리와 색감마저 식욕을 자극하는, 이보다 훌륭한 국민 인스턴트식품이 어디 있단 말인가!


편수 냄비를 꺼내 물을 담았다. 뉴스 기사 따위는 끓어오르는 550ml의 라면물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잊혀졌다. 그저 수프를 먼저 넣을 것인가 면을 먼저 넣을 것인가 하는 희대의 고민만이 전두엽을 가득 채울 뿐이었다. 수프를 먼저 넣으면 끓는점이 높아져 더 탱글하고 맛이 좋은 라면이 탄생하나고 하니,

“옳다구나! 수프 네가 선두 되시겠다!”


고작 라면수프 하나에 내 일생일대의 결정과, 앞으로의 미래, 복잡한 고민들이 사그라들었다. 눈앞에 아른거리던 걱정들로부터 한 발자국 떨어졌다. '인생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더니 맞는 말이구먼. 나의 부모님 역시 그 고된 세월을 헤쳐 오시지 않았던가! 나라고 못할 것이 무언가!’ 나는 어쩐지 웅변가의 마음으로 나 자신을 독려하기까지 했다.

이 모든 게 오직 라면을 끓이며 일어난 일이었던 거다.


면발이 퍼지기 전에 불을 끄고 받침대 위에 냄비를 올렸다. 오목한 앞접시와 수저를 세팅한 뒤 반찬 그릇에 열무김치도 한가득 담았다. 마지막으로 좋아하는 유튜버의 먹방을 재생시키며 모든 준비를 끝마쳤다.

후루룩후루룩 라면을 먹으며 신나게 깔깔거렸다. 요란스럽게 면치기를 시전 하다 국물이 튀어버린 휴대폰 액정도 스윽 닦아줬다. 식사가 끝나가는 게 아쉬워 찬밥을 가져와 국물에 넣고 야무지게 말았다. 애착 숟가락과 배추김치를 빛의 속도로 꺼내 왔다. 밥 한 숟갈에 김치 한 조각 이걸 어떻게 참아?

영양가가 없다며 평가절하될 라면이 아니다. 온통 긴장으로 굳어져있던 몸이 나른해지는 것이 마사지 한 판 받은 기분이었다. 이보다 훌륭한 기능이 어디 있단 말인가! 식사가 끝나고 나니 어깨가 가벼워졌다. 루틴 사냥꾼은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일기장 가장 뒤편 나의 오만가지 루틴 리스트에 ‘스트레스 풀 때엔 라면 한 봉’이라고 적어 넣었다.


그래서 경매 공부는 어찌 되었는고 하면, 현재진행형이다. 아직 낙찰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는 뜻이다. 서른이 넘도록 부동산에 관심조차 없었으니 해야 할 공부가 천지 삐까리다. 앞이 막막할 때와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을 때가 8:2 비율이다. 그렇지만 지금의 내겐 2만큼의 희망으로도 넉넉하다고 생각한다. 미래 같은 거 1도 없다고 느끼던 때도 지나왔으니 말이다. 어깨에 힘을 풀고 잠시 날 관망한다. 절망이고 나발이고 멀리서 보면 별 거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너구리 한 마리 몰고 가야겠다. 아직도 내겐 무수히 많은 라면 봉지들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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