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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뽀끼 Oct 09. 2024

왜 이혼했냐고 묻는 당신에게

질문 너머의 세상으로 나아가기

이 이야기는 당신이 뱉은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이혼이요? (시옷 눈썹을 하며) 왜요?!? “


당신의 목소리가 달팽이관을 타고 흘러 들어온다. 나는 삽시간에 깊은 고민에 빠진다. 대답할 말을 골라본다. 성격차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번뜩였지만 이혼사유 1위 클리셰에 대한 반발심이 든다. 애써 다른 답을 찾아본다.


나의 맘에 작은 의문이 피어난다. 혹시 당신이 드라마에서 본 막장 스토리를 기대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당신 앞에 선 이 이혼녀는 외도를 할 시간도 없었고요, 시어머님과 엄청난 불화가 있던 것도 아니었고요, 전재산을 날린 도박쟁이도 아니었어요.‘ 당신의 기대를 무너뜨릴 대답이 맘속에 가득 찼지만, 서로 앞다투어 나가겠다고 다투는 통에 아무것도 내보낼 수 없다.


몇 초간의 정적이 이어진다. 당신은 잔뜩 미안한 목소리로 “제가 괜한 걸 물었어요. 다들 사정이 있는 건데...” 하며 말끝을 흐린다. 나는 '아니에요.'라고 해야 하나, '네 괜한 걸 물으셨네요.'라고 해야 하나, 그도 아니면 '다들 궁금해하시더라고요 아하하.'라고 너스레를 떨어야 하나 고민스럽다. '어-느-것-을- 고-를-까-요.' 마음속으로 그린 삼지선다형 위로 손가락을 움직이며 익숙한 멜로디를 흥얼거린다.


그러는 사이 당신의 눈빛이 변한다. 무언가를 단단히 결심한 듯한 눈빛이다. 이내 낭랑해진 목소리로 말한다.

“조심스럽긴 하지만, 요즘 이혼은 흠도 아닌 거 아시죠? 싱글맘이 얼마나 많은데요!”


나는 어퍼컷을 맞고 어찌할 줄 몰라하는 여느 복싱선수처럼 오물오물거린다. 나를 위로하려는 그 마음이 고맙기도 하고, 당신의 해맑음이 버겁기도 하다. 그런데, 싱글맘은 혼자 아이를 키우는 엄마를 일컫는 단어가 아니던가? 나는 이혼은 했지만 아이와는 함께 살고 있지 않다. 이런 여자를 지칭하는 단어는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


'아, 저는 돌싱은 돌싱인데 아이가 있고요, 싱글맘은 싱글맘인데 아이는 아빠하고 살기로 했어요.' 뱉지 못한 말들이 혀 안쪽, 깊숙한 어둠 속에서 뱅글뱅글 돌아다닌다. 나는 어떤 답도 주질 못한다. 일시적 언어 상실이 몹시 놀라울 뿐이다. 좀처럼 티키타카가 이뤄지지 않자 당신은 대화욕을 상실한듯하다. 허겁지겁 인사를 하며 나로부터 멀어져 간다.


당신을 떠나보낸 나는 긴긴밤을 맞이한다. 어둠 속에서 왜요? 왜요? 왜요? 당신의 목소리가 여느 마을 이장님의 방송처럼 울려 퍼진다. 시각이 차단되자 청각은 더 선명하다. 마음속 셔터를 닫고 애써 잠을 청한다.


꿈속에선 과거가 재생된다. 당신 앞에 선 그날로 돌아간다. 꿈속의 나는 어째선지 여유롭게 웃고 있다. 이혼의 이유를 묻는 당신께 당황한 기색 없이 대답한다.


“네. 그렇게 됐네요. 막지 못했고 누굴 탓할 수도 없어요”


저 호탕한 여자는 당신과의 대화를 불편함 없이 이어나간다. 나는 생각한다. 앞으로 현실 세계에 또 이런 일이 생기거든 꿈속의 나를 데리고 오겠다고.


언제나 그렇듯 꿈은 사라지고 나는 곧 현실로 돌아온다. 창문 틈으로 불어오는 바람, 새가 지저귀는 소리, 모든 감각이 서서히 되살아 난다. 한참을 그대로 누워 눈만 깜박거린다. 너무도 생생한 그 말이 머릿속에서 반복되고 있다. ‘네. 그렇게 됐네요. 막지 못했고 누굴 탓할 수도 없어요.’ 작가도 감독도 배우까지도 모두 나인 게 뻔한 이 꿈속 드라마가 이상하리만큼 나를 위로한다. 이혼만큼은 막았어야지, 하는 내면의 채근으로부터 잠시 벗어난다.


설익은 잠들이 몇 차례 이어진다. 이윽고 완전히 깨어났을 때 나는 나를 향한, 전남편을 향한, 대답 못할 질문들을 던져대는 당신을 향한 비난을 멈추기로 다짐한다. 그때를 곱씹으며 진정되어 가는 내 맘을 헤집어 놓을 필요가 없다. 내가 진짜 해야 할 일은 질문 너머의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뿐이다.

​​

그렇게 됐다. 막지 못했고 누굴 탓할 수도 없다. 모쪼록 잘 살아 보려 한다. 그러니 당신, 그저 건투를 빌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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