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차]5. 남이 싼 똥을 치우는 마음

같은 것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기

by 벨라홍

아주 디테일한 상황들을 적을 수는 없지만,

세 번째 팀에 join 하자마자 팀장과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속된 말로 '남이 싼 똥'이었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자세한 상황을 얘기하면 회사가 너무 특정되거나.. 하니 간단히 말하자면

1. 5년 전 회사가 어떤 기관과 계약을 맺었다.

2. 계약 조건에 따라 충당금을 개설하고 계약 이행을 위한 비용을 차곡차곡 떼어 두었어야 하는데, 그 당시 계약을 회계적으로 소화하는 process가 미흡했다.

3. 5년 동안은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재계약이 다가오는 시점에 다다라서, 갑자기 계약을 이행하는데 따르는 비용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

4. 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해당 팀 사람들이 스멀스멀 회사를 나갔다. 부서장이 스타트를 끊고 팀원들이 모두 나갔다.

5. 책임질 사람은 아무도 없는 상태에서 재계약 기한이 다가왔다.


제대로 쌓아 두었어야 할 충당금이 얼마인지 settle 하는 것, 재계약을 성공적으로 할 것, 재계약의 조건을 적절하게 회계적으로 소화할 것.


이 세 가지가 새롭게 구성된 팀의 미션이었다.

재계약 기한이 두 달 남짓 남은 시점에서 남이 싸 놓은 똥을, 엄청난 압박감을 견뎌가며 치워야 했다.

1000억 원이 왔다 갔다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일하는 내내 나는 바짝 긴장해 있었다.

왜 사람들이 RUN 했는지 알 것만 같았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그리고 내가 계산해 내는 impact의 숫자를 보면서 나는 몇 번이고

'일, 십, 백, 천, 만...'을 반복했다. 숫자가 밑기지 않았다.

첫 계약시점에 제대로 충당금을 설정하지 않은 5년간의 impact이 스스로도 믿기지 않았다.


소비재처럼 단순히 매출을 예상하는 게 아니라, 특정 약을 투약받고 있는 환자가 언제까지 약을 투약받을지, 새롭게 약을 투약받는 환자는 몇 명인지 등 다양한 변수를 고려해 10년 이상을 예측해야 하는 분석은

내가 '마케터'로 일을 하고 있는지 '인간 계산기..'로 일하고 있는 것인지 헷갈리게 했다.


그리고 매일 여기저기 팀에서는

'xx님, 이거 어떤 logic으로 나온 숫자예요?'

복잡한 현실을 예측하려다 보니 logic도 단순할 수 없었고, 나는 매일 아주 조금 과장을 보태서 10번은 같은 얘기를 반복해야 했다.


'xx님, 숫자 다 됐어요?'

'xx님, 이 숫자 맞아요?'

'xx님, 이거 얼마나 확실해요?'라고 나를 쏘아붙이는 질문은 밤잠을 설치게 했다.


내부 직원들 뿐만 아니라 회계법인, 법무법인 등 다양한 stakeholder들한테 설명을 하기 위해 회의에 불려 가기 일쑤였다.


'내가 뭘 하고 있는 걸까'라는 생각이 나를 잠식할 때 쯔음, 첫 번째 회사에서 인연을 맺었던,

'나보다 나은 동료'이자, 그 당시 가족회사에서 실장으로 높은 자리에서 일을 하고 있던 동료와 같이 점심을 먹었다.

https://brunch.co.kr/@brillabella90/39


어떻게 사는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근황을 묻다 나는 요즘의 내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는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는지 얘기했었다.

"xx님, 근데 그건 정말 좋은 기회 같아요. 물론 그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라면, 큰 문제이겠지만, 회사가 당면한 문제를 그것도 1000억짜리 문제를 해결했다는 경험은 resume에 엄청 인상 깊은 이야기일 것 같아요."


사람은 아는 만큼, 경험한 만큼 보이는 것일까?

항상 나는 고용된 입장에서 내 앞에 놓은 일에 평가를 하기 일쑤였는데, 그의 말은 고용주 입장에서 내가 하고 있는 경험을 새롭게 해석해 주었다.


그날 이후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단편적이고 편협한 시각을 갖기보다는

조금 더 멀리, 넓게 보려고 노력한다.

어떤 것을 배울 수 있을까, 이 일이 끝나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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