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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싱녀로 살아남는 법(feat. 외도)

이렇게 살아내고 있습니다

by Mariposa

전화를 받은 대표원장님은 밝은 목소리로 안 그래도 연락이 없어서 이상했다며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보셨다. 나는 지금 내 상황을 다 설명하기엔 마음속 물풍선이 터져버릴 것만 같아서 거짓말을 했다. 남편 부대에 급한 사정이 생겨 원래 살던 도시로 이사를 가야 할 것 같다고. 원장님은 내가 기혼자일 때 만난 관계였으니 남편의 직업 또한 알고 계셨다. 한 음절 한 음절, 한마디 한마디를 할 때마다 눈물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꿀꺽 삼켰다. 나는 슬플 때 침샘에서 눈물이 나는 걸 안다. 침이 짭짤해진다.

사람의 몸에 상처가 나면 피가 난다. 그렇게 몸은 본인 상처를 알린다. 그런데 마음이라는 추상적인 친구는 피를 내는 방법을 모른다.

난 마음이 너무 아파서 비명을 지르다 못해 내는 출혈이 눈물이라고 생각한다. 실재하지 않기에 빨간색은 아니어도. 통화 내내 그 눈물을 지혈하느라 부단히도 애썼다.


말이 안 되는,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의외로 그분은 별다른 의심 없이 알겠다고 하셨다. 너무너무 아쉽다고. 정말 같이 일해볼 맛 나는(?) 훌륭한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사정이 그러니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냐며. 아, 그리고 마지막 한마디. 걱정과는 달리 내 목소리를 들으니 좋은 일로 돌아가는 거 같아 다행이라고 하셨다.


사람들은 나의 겉모습만 보고는 절대 나한테 어떤 상처가 있는지 모른다. 나는 대표원장님과 통화를 하기 직전과 직후에 눈물로 한강 수위를 올리던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그걸 모르시고 나한테 목소리가 밝다고 하셨다. 나는 그때 얼핏 알았다. 아, 여기서 소멸될 내 인생은 아니구나. 나는 꽤나 내 감정 숨기는 것을 잘하며 이렇게 마음지혈을 해 나간다면 앞으로 뭐든 할 수 있겠다는 것을.


그렇게 전화를 끊었고 너무 다행히도 위약금이 없이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소식을 들었다. 그 시기에 나에게 허락된 유일한 희소식은 내 사업을 그나마 고이 접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연락을 받고 나는 침대에 대자로 누워 울었다. 울었다는 소리가 지겨우신 거 안다. 그런데 울고 울고 또 울었다. 적어도 그 가을, 귀뚜라미들보다는 내가 더 크게 많이 울었다. 마음 과다출혈로 사망 직전.


친정으로 돌아오고 정신과 진료와 상담을 병행하며 아주 조금씩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성보라는 내가 친정으로 돌아온 지 일주일 만에 야구장에 같이 가자고 했고(난 정말 성보라가 미친 여자라고 생각했다. 역시 혈육) 생일선물이라며 유니폼을 사주겠다고 했다(난 정말 성보라가 멋진 여자라고 생각했다. 역시 혈육). 시간이 약이라고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지옥 같았던 시간을 나는 여러 좋은 사람들에 의해 멱살 잡혀 극복해내고 있었다.


이제는 정말 돈이라는 게 없었다. 전남편은 우리가 이사를 가는 시점부터 외도를 하기 시작했기에 앞으로 내 돈은 1년 6개월은 지나야 받을 수 있었다. 돈도 돈인데 하루하루 집에서 우는 것도 그만하고 싶었다. 누워서 천장만 얼마나 봤는지 천장 벽지무늬를 다 셀 수 있을 정도였다. 갑자기 어느 날 나는 선언했다.

“나 학원 차릴 거야.”


예상하셨겠지만 모두가 말렸다. 심지어 정신과 선생님과 상담사님까지. 지금은 조금 더 마음안정에 집중하고 그 후에 시작해도 늦지 않는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전문가의 말이니 들으려고 애썼다. 그런데 내가 봐둔 자리. 그 자리가 계속 안 나가고 남아있다. 운명이다. 에라 모르겠다. 가족들의 동의도 없이 냅다 푼돈을 계약금으로 걸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통보했다. 할 거고 이미 계약했고 말리지 말라고. 내가 스스로 일어나겠노라고(어느 누구도 믿어주지 않는 표정이었다. 가족이란 이런 것이다). 그리고 아빠한테는 돈 좀 꿔달라고 했다. 꼭 이자까지 쳐서 갚을 테니. 효년.


우리 집에서는 내가 기질적으로 가장 많이 다르다. 일 벌이는 걸 좋아하고 그게 뒷수습이 되든 안되든 일단 못 먹어도 고! 뻥카를 막 날리던 나를, 독자님들은 이미 알고 계실 것이다. 그렇게 갑자기 간판이 올라가고 인테리어팀이 오고 전기공사까지 후다닥 끝났다.

아무도 없는 학원. 내가 정해놓은 수업시간이 있기에 학생이 0명이어도 나는 그 자리를 지켰다. 수업 준비를 했다. 엄마랑 아빠는 내가 그곳에서 쓸쓸하고 암담한 현실을 그대로 퍼맞고 있을 생각에 걱정이 됐나 보다.


아빠 : 전기세 걱정은 하지 말고 추우면 원장실에 히터 틀고 있어

엄마 : 너는 거기서 하루 종일 뭐 해? 학생도 없는데 그냥 들어와. 전화 오면 그때 나가도 되잖아.

나 : 아니 내 수업시간에 내가 어딜 가냐고. 그리고 아빠 걱정 마. 히터 빵빵 켜놓고 커피 마시면서 넷플릭스도 봐.


엄마아빠는 그때 본인들이 산부인과에서 자식을 바꿔 데리고 온 것을 직감한 거 같았다. 우리 집안에 나 같은 사람은 없다. 가진 게 개뿔도 없는데 세상 부자인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 학생이 없는데 수업 끝나는 시간까지 학원을 지키는 사람.


그렇게 인고의 시간이 지났다. 하나둘씩 학생들이 모이고 나는 학원을 오픈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본사 행사에 초대되었다. 대단한 업적은 아니었지만 너무 감사하게도 불러주셨다. 지금은 내가 속해있는 지역의 대표원장님과 함께 가게 되었다. 전국에서 모이는 아주 큰 행사. 행사 쉬는 시간에 나는 계속 두리번거렸다. 그 대표원장님을 찾으려고 말이다.

익숙한 뒷모습이 보인다. 사실 우리는 두세 번 정도 본 사이였다. 그럼에도 알아볼 수 있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뒤에서 불렀다.

“원장님!”

하자마자 뒤를 돌아보시더니 나를 보고 너무 놀라셨다. 눈썰미가 대박이시다. 그러더니 아무 말도 없이 내 명찰을 보시고 내가 속한 지역을 보셨다.

“아이고!!!!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이 지역 대표원장님은 무슨 복이야 이게!! 원장님을 넝쿨째 데려갔네ㅠㅠ”


너무 반가웠다. 서로 부둥켜안고 안부를 묻다가 내가 조용히 말했다.

“저 사실 그때 남편의 외도로 이혼했어요. 사정 설명을 못 드리고 야반도주하듯이 나와서 너무너무 죄송하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었어요.” 했더니 정말 놀라시며 상상도 못 했다고 하셨다. 그러더니 “난 원장님이 어딜 가든 너무 잘할 거라는 거 알았어요. 그런데 이렇게 빨리 이렇게 큰 행사에서 만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역시 원장님은 내가 본 거보다 더 멋진 분이네요.”


좋은 날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그리고는 그런 아픔을 겪고도 이걸 스스로 해낸 게 같은 여자로서 너무 자랑스럽고 마음 아프고 대견하다고 했다. 앞으로도 꼭 응원하겠다고 하고 짧고 굵은 대화를 포옹으로 마무리했다.


그렇게 나의 차갑고도 어두웠던 겨울에 봄볕이 들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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