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겨워 죽겠다. 내가 차별에 맞서는 법
때는 바야흐로 스페인의 여름을 만끽하던 20대 시절.
우연히 친해지게 된 한국인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스페인어 공부에 상당히 열정을 가지고 있어서 되게 부지런하게 언어를 배울 수 있는 곳을 여기저기 뚫고 다녔다. 어느 날 친구가 나에게 언어교환을 할 수 있는 곳이 있는데 같이 가보지 않겠냐고 했다. 그게 뭐냐고 물었더니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대화하고 놀며 상대방의 언어를 배울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말은 그럴싸하지만 사실 펍에서 맥주 마시며 노는 곳이다.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나가서, 온 세상 어린이를 다 만나려고 사는 나는 당연히 가겠다고 했다. 그렇게 한 여름의 스페인 밤. 한낮의 더위는 수그러들었지만 바다의 짭짤한 공기와 온 세상 어린이들의 열기는 더없이 뜨거웠다. 매주 금요일 밤에 모이는 모임에서 우리는 가자마자 총괄매니저쯤 되는 사람하고 친해지게 되었다. 처음에 그 사람은 동양인 여성 두 명을 보고 당황했다. 동양인 자체가 많지 않은 곳이었기도 했고 일단 우리가 어느 나라 말을 쓰는지 예상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짐작해 본다.
모국어가 뭐냐고 해서 한국어라고 했더니 너무 아쉽게도 한국 국기는 준비되어있지 않다고 했다. 무슨 영문인지 몰랐지만 곧이어 우리에게 영어를 할 수 있냐고 물었고 그렇다고(사실은 거의 아니지만)했다. 그러고 보니 거기서도 뻥카를 날리고 다녔다. 그러자 우리의 왼쪽 팔에 유니언잭 스티커를 짝 하고 붙여줬다. 사람마다 어떤 언어를 쓰는지 표식 하기 위함이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영국에 가본 적도 없는데 국가대표 완장처럼 유니언잭이 내 팔에 있는 이상한 매국노가 된 기분... 그래도 일장기보다는 낫지.
그렇게 뒤돌아섰다가 다시 그 매니저에게 돌아가서 난 앞으로도 올 건데 그때는 내 나라의 국기를 달고 싶다고 하니 역시 쏘 서윗한 스페인 남자는 알겠다고 꼭 가지고 오겠다고 했다. 약간 못 미더워서 친히 태극기 이미지를 찾아서 보여줬다. 이걸로 가져와야지 자칫 잘못해서 인공기를 가져오면 당신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수 있다고 했다. 매니저는 웃으면서 태극기를 많이 본 것 같다며 알겠다고 꼭 준비하겠다고 했다.
여러분은 스페인 사람들이 약속을 얼마나 안 지키는지 대충 알고 계실 것이다.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영어로 대화하고자 하는 스페인 학생들과 돌아버린 스팽글리쉬를 섞어가며 놀았다. 그리고 그다음 주, 여전히 내가 사랑하는 스페인의 여름밤. 그 주는 되게 특별한 주였다. 유럽에는 에라스뮈스라는 제도가 있다. 유럽학생들이 각각의 나라에서 다양한 공부를 하는? 뭐 그런 느낌이다. 되게 자유로워 보이고 부러웠다.
그 피크가 여름의 스페인이다. 특히 북유럽이나 서유럽 등 해가 쨍쨍한 날씨가 드문 나라의 학생들은 무조건적으로 스페인을 선호했다. 오죽하면 스페인을 태양을 파는 나라라고 하지 않는가. 그 태양을 보고 달려든 나 자신도 그곳에 있었다.
그런 피크 시즌을 맞이해 그 펍에서 특별한 행사로 다 같이 모였다가 시내 곳곳에 있는 클럽입장권을 주면 본인들이 선호하는 클럽으로 삼삼오오 가는 그런 행사를 주최했다. 사실 나는 지금도 그 행사의 과정을 잘 모른다. 열정적인 친구가 열심히 페이스북으로 알아보고 나에게 또 같이 가자고 한 거라.. 어쨌든 그다음 주에 가니 매니저가 우리를 보자마자 너무 반갑게 종이를 들고 온다. 오만 국기가 다 있는 스티커 종이에서 딱 보인다. 태극기 두 장. 정말 두장만 인쇄해 왔다. 나는 당연히 잊어버렸을 거라 생각했는데 스페인 사람이 그걸 준비해 왔다는 거에 눈물이 줄줄 났다. 얼른 태극기를 조심스럽게 떼어서 왼쪽 팔에 붙였다. 하지만 우리는 알았다. 그렇게 하면 아무도 우리에게 말을 걸지 않을 것임을(한국어로 소통을 할 수 없으니). 그래서 유니언잭을 떼서 오른쪽 팔에 붙였다. 괜스레 왼팔만 더 드러내며 뻐렁치는 애국심. 나는 왜 한국에 있을 때 나라의 소중함을 모르는 것인가.
지나가는 유러피언들이 태극기를 알아보고는 너무너무 예쁘다고 자기네도 가지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결국 매니저는 그다음 주에 태극기를 더 많이 인쇄했다. 이 정도면 나를 애국자라고 해주자. 웬만한 외교관보다 낫지 않나? 아니면 말고.
아무튼 그렇게 이상한 애국심에 가득 찬 채로 나의 잔도 가득 채우고 해변에서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클럽에 가는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1시 방향, 2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누가 봐도 스페인 사람은 아닌 남자들이 서 있다. 그중 키가 훤칠하게 큰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눈에 들어왔다기보다 나랑 눈이 마주쳤다. 눈인사를 하길래 입모양으로 ‘Hola(안녕)' 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쪽으로 온다. 한국인 친구에게 말했다.
“잘생기고 키 큰 애가 이쪽으로 오는데 어떡하지? 어! 독일 국기다!! 어떡해 어떡해!” 가 끝나기도 전에 내 눈앞에 와서 인사를 한다. 보통 독일 학생들은 영어를 잘하기 때문에 나는 당연히 나에게도 영어로 말을 걸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친구, 생각보다 스페인어를 잘한다. 꽤나 유창한 스페인어로 인사를 하고 자기소개를 한다. 독일에서 온 J. 내가 무슨 소설을 보고 허세를 부리려고 J라고 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이름이 기억이 안 난다. 그런데 좀 건방지게 국가 이름을 말하지 않고 자기 팔에 붙어있는 독일국기를 가리킨다. 다 알 거라는 듯이. 나는 모른 척하고 물었다. 어디에서 왔냐고. 그러자 약간 어이가 없다는 듯이 독일이라고 한다. 나에게 너는 어디에서 온 누구냐고 하길래 똑같이 해줬다. 손가락으로 태극기를 가리키며 이곳에서 온 나는 L이라고. 태극기를 슬쩍 보더니 Korea? 한다. 국제적 위상이 높아졌다 대한민국이. 그런데 바로 묻는다.
“넌 북한에서 왔어? 아니면 남한에서 왔어?”,
“너네 나라 우두머리가 독재자 김정은이야?”
쎄함을 잘 감지하는 나는 세상 제일가는 쎄믈리에다. 해외에서 잠깐이라도 지낸 사람들은 공감하겠지만 저 말과 그 뉘앙스는 진짜 궁금해서라기보다 인종차별? 국가차별? 에 가까운 말이다. 그가 일부러 무례를 범한 것이 내 착각이었을 수도 있고 선입견일수도 있지만 나는 원래 쥐뿔도 없는데 애국심과 드러운 성깔만 넘치는 도른자다. 마치 동물의 왕 치와와랄까.
눈알을 바꿔 끼고 바로 받아쳤다.
“그게 너한테 중요한 일은 아닐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