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불작전
인종차별.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그 더러운 기분이 있다. 눈알에서 느껴지는 조롱과 무시. 그런데 여러분은 이미 내가 어떤 여성인지 안다. 그러나 J는 몰랐다. 로맨스는 와장창 난지 오래고 이제는 멱살을 잡기 직전이다. 니가 시방 동물의 왕 치와와를 건든거시여.
“내가 남한에서 왔든, 북한에서 왔든 그게 너한테 하나도 중요하지 않을 거 같은데? 어차피 너 내가 말해도 잘 모르잖아?”
라고 하자 J는 내가 예민하다는 식으로 얘기했다. 자기는 정말 궁금해서 물어본 거라고. 그래서 말했다.
나 : 너는 그럼 서독에서 왔니, 동독에서 왔니?
J : Omg.. 독일은 하나야
나 : 알아 난 너처럼 멍청하진 않으니까. 근데 너의 부모님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때 어느 쪽에 계셨냐는 게 내 질문이야. 너의 기원.
J : (깊은 탄식)
나 : 그럼 너네 나라 우두머리는 히틀러니? 나도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거야.
분위기가 싸해졌다. J는 고개를 절레절레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면서 나한테 “넌 미쳤어.”라고 했고 나는 그에게 “넌 미친 인종차별주의자야.”라고 했다.
Tmi) 유럽에 가서 놀랐던 점이 있다. 생각보다 더 유러피언들이 독일을 좋아하지 않는 것. 물론 예전 기억이고 나의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이었지만 파티를 하다 보면 독일과 인접한 국가 학생들이 나한테도 “쟤는 독일인이라서 저런 행동을 하고 저런 말을 해. 노답이야. 지들이 제일 잘났지. ” 이런 말을 서슴지 않고 하는 분위기다. 그리고 독일 사람들은 우리의 이웃나라와는 다르게 상당한 죄의식을 가지고 살아간다. 적어도 그런 척이라도 한다. 다른 유러피언들이 일본이 지금 우리에게 어떻게 나오는지 정확히 안다면 아마 겸상도 안 할 것이다. 독일인들에게 나치, 히틀러 같은 단어는 입 밖으로 꺼내서도 안 되는 금기어 같은 것이었다.
나는 그걸 알고 일부러 건드렸다 걔를. 나한테 먼저 김정은을 운운했기에. 스페인에서 인종차별을 딱히 느낀 적은 별로 없지만 종종 그런 무지함에 의한 상황을 겪을 때마다 나는 화를 내는 대신에 같은 방법으로 멕였다. 나랑 친했던 유럽 친구들도 내가 자기 나라를 그렇게 비하하고 편견에 가득 찬 발언을 하면 입을 쩍 벌리고 쳐다봤다. 처음 겪었겠지.
예) “너는 학교 갈 때 순록 타고 가?”
- 스웨덴 친구에게.
“그 오렌지는 뭐 어디에 붙어있는 나라야? 독일어 써?”
- 네덜란드 친구에게.
“나 오늘 터키케밥을 가지고 해변에서 와인 마실 거야. 가라! 가서 지금 이 날씨와 내 분위기에 맞춰서 조국의 명예를 걸고 2유로짜리 와인을 골라줘.”
- 프랑스 친구에게
봉쥬~ 사바?
- 한국인임을 말했음에도 니하오로 인사하는 스페인의 동네 양아치들에게
등등. 되게 친한 사이라 가능했던 농담이라는 걸 이해해 주시길 바란다. 마지막 예는 아니지만.
마치 우리는 그들의 문화를 다 알고 그들이 얼마나 강대국인지 알아야 한다는 뉘앙스가 본인들도 모르게 기본적으로 깔려있다. 그럴 때는 우리가 보기엔 너네도 다 거기서 거기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려주고 싶었다. 그들은 나의 도발을 재밌어하면서도 본인들이 이때까지 우리한테 했던 말이 어떻게 느껴지는지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 과정을 지켜본 한국사람들이 나한테 별명을 붙여줬다. ‘글로벌 썅년’. 아주 잘 어울린다. 그렇게 해서라도 아무런 지식이 없이 상대방의 나라를 판단하고 질문하는 것이 굉장히 무례하다는 걸 그들이 느낄 수 있다면 글썅이고 뭐고 백번도 더 할 수 있었다.
그렇게 J는 다시 자기들 무리로 돌아갔고 그 무리들이 우리를 힐끔힐끔 보는 게 느껴졌다. 솔직히 말하면 무서웠다. 쪽수로도 딸리고 우리는 여자고 걔넨 다 남자다.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친구와 욕을 하고 있는데 J가 또 나를 빤히 쳐다보며 비웃는 거 같았다. 그래서 입모양으로 다시 말했다.
“Go Fxxk yourself, racist!"
조올라 무서웠다. 굉장히 심한 욕이라는 걸 나도 안다. 당장이라도 나한테 달려들지 않을까? 한국인 친구는 너 미쳤다며 나를 말렸다. 그런데 사람들이 많으니 큰일이 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거 믿고 까분 거 맞다. 유럽에서는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말을 듣는 걸 굉장한 창피로 여긴다. 창피해야 될 일도 맞다.
친구는 나보고 서로 눈 마주치지 말라고 나랑 자리를 바꿔 서 있었다. 그런데 잠시 뒤 그녀가 말한다.
“야, 쟤 여기로 다시 온다. 어떡해?”
너무 무서웠지만 도도한 척을 하고 뒤돌았다. 갑자기 나보고 잠깐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는 영어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뭔가 더 복잡한 말을 하고 싶어서겠지. 경계심을 조금은 풀고 무슨 할 말이 더 있냐고 물었더니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 나왔다.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어. 차별을 하려던 건 아니었고 사실은 친해지고 싶어서 던진 농담이었는데 불쾌하게 생각했다면 정말 미안해.”
나 엔프피 인간. 그 진정 어린 한 마디에 마음이 풀어졌다.
“사과는 받을게. 그리고 나도 너한테 그렇게 얘기해서 미안해. 너무 예민했어 내가.”
그렇게 우리는 조금은 정상적인 대화를 시작하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독일 축구선수와 내가 동갑이라고 하니, 본인도 그렇다며 그럼 우리는 동갑내기인 거라고 서로 태어난 년도와 월까지 비교했다. 뭔가 더 반갑고 그제야 그 잘생긴 얼굴이 눈에 다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체격에 그 얼굴에 검정 피케티셔츠는 반칙 중의 반칙이다. J는 내가 독일에 대한 지식이 많음에 놀랐고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고 물었다. 그래서 한 방 찔렀다.
“난 너같이 무식한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니니까. 히히” 그러자 J가 숨이 넘어가게 웃는다. 어느새 걔는 유창하고 나는 투박한 영어로 대화를 한지 꽤 되었다. 갑자기 뒤에서 매니저가 부른다. 꼬레아나 두 분을 모실 택시가 왔다고.
아쉽지만 이제 헤어져야 한다. 내가 나 이제 가봐야 된다고 하며 짧은 인사를 하고 스페인에서 잊지 못할 여름을 보내다 돌아가라고 했다. 그렇게 친구와 나는 택시에 탔고 매니저가 택시기사에게 우리가 갈 목적지를 알려주고 문을 닫는데 갑자기 누가 택시 문을 벌컥 연다.
J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