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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거 Jul 29. 2015

꿈의 역사 #1

그 해 여름

문득 눈을 떴다. 아직 6시 57분이다. 방학임에도 불구하고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을 뜨다니. 드디어 내가 이상해졌다.


어차피 3분 후면 알람이 차례대로 2개가 울릴 것이다. 3분... 앞으로 18시간 동안 자그마한 방에 틀어박혀 자그마한 공간을 키보드 소리로 채울 나에게 기꺼이 허락하겠다. 3분 동안 치열하게 뭉그적 거릴 테다. 그러나, 이내 알람이 울린다.


에어컨은 엄두도 못 내는 가난한 자취생, 그것도 이번 방학을 끝으로 막학기를 앞둔 삭아버린 대학생의 이불은 가볍다. 그 가벼운 이불을 털고 일어나기 위해 오늘 하루의 중요함을 새삼 상기한다. 오늘 하루, 앞으로 다시 잠들기 전까지 이런저런 시간 다 제외하고 약 16시간 동안 치열하게 머리를 굴리고 키보드를 두드릴 것이다. 오늘 오후에 마감인 기업이 세 군데나 있다. 어서 정신 차리고 학교로 가야 한다.


이상하게 집에선 한가하게 시간 죽이는 것 빼고는 다 하기 싫다. 그렇게 좋아하는 게임도 친구 방 가서 하면 그렇게 재밌는데 내 방에선 재미없다. 하다 못 해 친구 방에선 인문학 고전을 읽어도 재밌다. 그러한 연고로 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 그게  하릴없이 시간을 낚는 일이 아니라면 - 집 또는 자취방을 벗어나야 한다. 그래서 난, 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학교에 간다.


내가 좋아하는 공간이 있다. 이제는 로스쿨만 남아버린 법대 건물 컴퓨터실 뒷 편에는 상담실이라는 공간이 있다. 누가 여기서 어떤 상담을 하고 어떤 상담을 받는 지는 모르겠으나, 내 할 일을 하기에는 참 좋은 곳이다. 난 일요일을 제외한 매일을 여기서 어학시험 공부를 하거나 자기소개서를 쓴다. 대여섯 명이 앉아서 여유 있게 각자의 짐을 부려놓고 각자의 것에 집중할 수 있을만한 책상이 있고, 화이트보드도 있고 넉넉한 콘센트도 있다.  조용할뿐더러 요즘 같은 한여름인데도 쾌적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곳이 좋은 이유는 경쟁이 있기 때문이다. 경쟁은 내 나태함을 막는다. 비슷한 크기의 상담실이 4개가 있다. 내가 알기론 딱  4개 뿐이다. 나 같은 얼뜨기 복학생도 아는 공간이라면, 집보다 학교에서 더 오래 생활하는 고시생들이 모를 리가 없다. 횟감을 싫어나르는 트럭 이야기를 알고 있을까? 싱싱한 횟감이 산지에서 판매지로 운반되는 동안 권태로움에 죽어나간다고 한다. 권태로움과 나태함은 분명 다르지만, 그게 무엇인들 어떠한가. 내 생존에 도움이 된다면. 횟감의 생존율을 높이는 방법은 포식자의 존재다. 트럭 안에는 포식자가 있다. 포식자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선 같은 횟감 사이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경쟁해야 한다. 


나는 기업에 팔려가기 위해 자기소개서를 쓰고, 잘 쓰고 싶어서 상담실로 향하고, 상담실을 차지하기 위해 나태함과 싸운다. 대개 나태함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나는 상담실을 차지하려는 다른 학우들과의 경쟁에서 이긴다. 물론 학우들이 차지할 공간 하나 없는 것은 아닐 테지만, 어찌됐든 난 경쟁에서 이긴 거다. 난 더 잘 팔리는 횟감이 될 것이다.


학교의 경력개발센터 홈페이지에는 많은 기업들의 채용공고가 게시되고 있다. 저렇게 많은 기업이 적게는 0명에서 000명까지 채용하는데 청년 실업률은 자꾸만 경신된다. 아직 학생인 내가 썩 유쾌하지 않은 기록 경신에 동참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잘 팔리는 횟감이 되고자 한 나로서는 결코 그 숫자의 일부가 되고 싶지 않다. 취업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읽고 있는 신문의 사회면 기사를 훑으며 또 한 번 위기감을 느끼며, 자기소개서 작성이라는 지루한 청춘의 중대 과제를 짊어진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잡생각은 신문과 함께 덮어둔 체 검은색 노트북의 덮개를 연다. 창 밖이 더할 나위없이 칙칙한 파랑이다.


며칠 간 심혈을 기울여 작성한 자기소개서 파일을 연다. 이번 자기소개서는 무려 6개 항목에 개당 3천 자를 써야 했다. 중견기업이지만 상당히 매력적이라는 생각에 정말 정성과 노력을 기울였다. 이제 8시간 후면 마감될 이 기업의 원서접수를 위해 1만 8천 자를 읽고 또 읽으며 다듬고 또 다듬는다. 속독, 윤독, 정독 등 아는 읽기 방법을 총 동원해서 탈고를 거듭한다. 내가 자기소개서서를 쓰는 것인지, 자기소개서가 나라는 사람을 정의하는 지 혼란스러울  때쯤, 이 때가 쉴 때다.


상담실로 통하는 법대 건물 입구 바로 옆에는 한적한 야외 휴게 공간이 있다. 우거진 느티나무가 있어서 시원한 그늘이 드리우는 이 곳의 벤치는 휴식을 대변한다. 도서관이 공부를 의미한다면 느티나무 아래 벤치는 캔음료와 휴식이다. 맞은편 벤치에선 희부연 연기가 피어오른다. 바알갛게 꽁지를 태우며 피어오르는 연기가 보기만 해도 알싸하지만 분명 들이마시면 뇌가  재부팅되는 기분일 것이다. 직접 흡연을 하지 않는 나로서는 솔직히 잘 모르겠으나, 분명히 컴퓨터  리부팅하는 것 같은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내려다 보이는 운동장에선 미식축구부가 한창 운동 중이다. 우리나라에선 인기도 없는 미식축구를, 그것도 황금보다 더 귀한 여름방학에, 그것도 대학생이 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 어렵지만 저들은 참 열심히도 한다. 소리도 지르고 날아가는 아몬드 모양 공을 쫓으며 운동장을 가로지른다. 뒹굴며 흙먼지를 들이마셔도 금세 일어나 달린다.


왜 저렇게 뛰고 달리나 싶다. 취업은 걱정도 안 되나 보다. 다들 집안이 놀고 먹고 살만큼 부자인가 보다. 저들은 저렇게 해도 다 제 밥 벌이 해먹고 사는데 걱정이 없을 게 분명하다고 단정 짓고 싶다. 그게 아니라면, 저들은 아직 2학년 또는 3학년일 것이다. 내가 2, 3학년 때 그랬던 것처럼.


내 꿈은 소박했다. 죽기 살기로 공부해서 나름 괜찮은 대학교 왔으니 어디 적당한 곳 취업해서 평범하게 사는 게 목표였다. 평범하게 사는 걸 목표로 했기에 하고 싶은 걸 하며 놀았다. 내 소박한 꿈은 그렇게 해도 충분히 이룰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직 학교를 같이 다니는 선배들도, 고등학교 선생님도, 어른들도 하고 싶은 걸 하라고 했다. 물론 할 일은 하라고 했지만, 그 할 일을 하는 것이 죽기 살기로 할 일을 하라는 것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가 생각한 내 할 일은 수업 안 빠지고 학점은 적당히 대기업 지원할 정도로 유지하며 졸업할 정도의 어학점수와 남들이 보기에 재밌어 보이면서도 내가 좋아하는 대외활동 정도라고 생각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난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지금 내 꿈은 내 생각보다 좀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다.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꿈은 대학생이 되고 나서 갖게 된 것 같다. 학교 재밌게 다니고 탈 없이 졸업해서 취업하는 것. 소박하면서도 현실적인 꿈. 직장생활 열심히 해서 적당히 인정받고 은퇴하면 손주 안고 노닥거리는 황혼. 내 인생은 굴곡은 있을지언정 큰 도전이나 모험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무너질만한 실패도 없으리라 생각했다.


왠 걸, 도전 아닌 것은 그 어느 것도 없었다. 대학 진학도 도전이었지만 그저 원점수, 표준점수, 백분위, 내신등급 등 숫자에 현혹되고 생각이 마비되어 도전이라 인식하지 못 하고 있덨던 것이다. 하지만, 이 때도 꿈은 있었다. 가물가물 하지만 대학생의 재미없는 꿈보다 더 비현실적이고 흥미로웠다. 유럽의 유명 프로스포츠 구단에서 일하고 싶었던 것 같다. 유명한 선수들도 보고 짜릿한 승리에 취하며 함성과 영광을 나누는 삶을 기대했던 것 같다. 오래된 꿈이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오래된  꿈일수록 더 다이내믹하고 헛웃음 나올 법한 것들일 것이다. 코흘리개 시절엔 대통령을 꿈꿨을 것이다. 대통령?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안 나오는 이야기다.


몸이 성장함에 따라 사고의 세계도 성장한다. 어릴 적 보던 세상은 넓어 보이나 실질적으로 인지하고 사고할 수 있는 세상은 좁고 얕았다. 세상에서 내가 차지하는 비중은 인지하고 사고하는 세상이 넓어지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 세상은 넓으나 내가 차지하고 서 있는 물리적 공간은 고사하고 사고적 공간은 티끌과도 같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괴로움이었다. 내 역사는 대통령으로 시작해서 직장인으로 수렴하고 있었고 언젠간 마주칠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으며, 노년에는 평화로운 '죽음'을 꿈꿀 것이다. 죽음을 꿈꾸다니, 산자로서 비겁하다고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다고 인정해버린다.


꿈의 역사는 자기소개서를 쓸 때마다 반복적으로 상기된다. 대통령, 프로스포츠단 단장, 직장인, 평안한 늙은이. 반복적으로 현실에 수긍하는 것이다. 매번 현실에 굴복하고 자신을  합리화하며 역사는 초라하게 편집된다. 나는 그렇게 초라한 인생의 최신판을 자기소개서 가장 빛나는 말들로 포장한다.


잡다한 생각은 연기에 실어 공중에 풀어헤치고 들어와 중요한 원서들은 다 접수시켰다. 이제 여덟 군데 정도  접수했으나 아직도 갈 길은 멀다. 문득 눈에 들어오는 기업이 있다. 기업 이름이 헐크패밀리다. 아직 뭐 제대로 하는 것도 없는데 다짜고짜 열정페이를 요구하는 곳이다. 나에게 일탈을 강요하는 이런 나쁜 기업이 오히려 매력적이다. 생존이 도전이기에 도전의 타성에 젖은 나는 도전이라는 것에 둔감하다. 헐크패밀리는 나에게 일탈을 선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자유형식의 자기소개서와 이력서를 요구한다. 얼마나 자유로운 곳인지 시험하기 위해 난 내가 지금 가진 자유로움에다가 미래의 자유로움까지 당겨와 자기소개서를 작성할 것이다. 


꿈의 역사를 되짚을 때, 만약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기회가 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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