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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책불혹 Jul 20. 2023

모든 것이 종교가 되는 대한민국

An outlook on the world

초등학교부터 서른 무렵까지 20년 가까이 교회를 다녔었다. 정체성이 정해지지 않은 어린 시절에는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성인이 돼서는 오랫동안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이 결국 교회 안에서 만난 사람들이라 그 관계 때문에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지속했었다. 물론 그 사이사이 나도 모를 감정들이나 느낌 등을 토대로 교회 안에서 제공하는 여러 말씀들을 증거로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영역을 있다고 믿으면서 진심을 다했다.

하지만 의구심이 있었다. 천국에 가기로 소원하고 천국을 기대하지만 죽음 이후에 다시 돌아와 그 일을 전하는 나사로(신약성서에 나오는 죽었다가 살아난 남자, 그리스도를 예시한다) 같은 이는 없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사후세계의 존재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많지만 적장 거길 다녀온 사람들은 없다는 것. 죽은 이가 돌아오는 법은 현실세계에서 없다는 것이다.


여러 의구심이 해결되지 못한 채 서른 이후 교회를 떠났고 신기하게도 그 안에서의 관계는 대부분 정리가 되었다. 오랜 시간 관계를 유지해 준 근거가 종교 때문이었다는 사실이 허탈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종교도 결국 여타 사회생활과 다를 건 없었다.



의구심의 시작


매 년 수능날이 되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험생의 어머님들이 기도실에 자리를 차지하고 하루종일 예배드렸다. 이 모습은 비단 교회뿐 아니라 절에 가도 성당에 가도 어느 종교라도 같은 모습을 보인다. 난 그 부분이 참 이상했다. 간판만 바뀌었을 뿐 하는 행위가 같다면 과연 그중에 참 종교라는 것이 있을까? 부모님의 입장에서 당연히 자신의 자녀가 원하는 만큼의 성적을 얻기 위함일 테고 실수하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그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과연 신이 있다 해도 제로섬의 원칙에 의해 누군가의 합격이 누군가의 탈락으로 이어지는 현실세계에 영향을 주려고 할까? 가능하다면 과연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까? 결국 공부는 자신들이 하는 것이고 결과 또한 한만큼 나오는 것인데 말이다. 


안타깝게도 이것은 대한민국 종교의 현실이다. 어떤 종교던지 그 파생의 원인과 목적이 어떻든지 결국에는 기복신앙에 먹혀서 무속신앙이 된다. '지성이면 감천'이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던 무속신앙이 이름만 바뀌고 단어만 다르게 해서 각 종교의 이름으로 있는 것이 대한민국의 종교인 것이다. 



장르를 가리지 않는 종교화


요새 트로트계에서 가장 인기몰이를 하는 가수는 단연 '임영웅'일 것이다. 그 외에도 다른 가수들이 있지만 뭇 어머님들의 감성을 자극한 '임영웅'은 좋은 실력을 가진 가수다. 어떤 장르의 노래든지 자기화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그 음색이 참 좋다는 걸 나 역시 느꼈다. 아마 본인은 그저 자신의 일을 했을 텐데 이렇게까지 팬덤이 극대화되고 자신의 위치가 달라졌다는 것이 신기할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맹목적인 추종은 누군가에게는 신비한 경험을 하게 한다.


그렇다. 그들이 추종하는 '임영웅'은 곧 종교가 되었다. 경전이 없고 성전이 없을 뿐, 온갖 커뮤니티와 SNS를 보면 정말이지 종교단체의 찬양집회를 떠올리는 반응과 칭찬일색인 댓글들이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신의 은혜를 입어 병고침을 받았다는 사람들처럼 임영웅의 노래를 듣고 마음의 병이 낫고, 심지어 육체의 병까지도 낫게 되었다는 사례들도 있다. 물론, 과학은 그것을 뒷받침할 길이 없다. 모두 결과론적인 자기 해석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유별난 성별, 세대가 있긴 해도 대한민국의 냄비근성은 본래 유명하기에 춤, 노래, 연기, 사람, 어떤 장르던지 종교 그 자체가 될 수 있다. 종교화 된 사실 자체를 폄하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다만 그들이 종교를 만드는 순간. 성역이 되어 도무지 어떠한 객관적 판단도 사실에 대한 지적도 할 수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교는 무섭다. 각 종 사이비들이 사회를 좀 먹는 현상들은 바로 그 성역 때문이다. 현재도 어떤 인물에 대한 이름, 우리가 익히 쓰던 단어, 늘 상 지나치던 장소들이 성역이 되어 사회를 마비시키는 장치로 작동하고 있다. 



또 하나의 종교단체가 되어버린 정치


정치판은 종교가 된 지 오래다. 도무지 메신저와 메시지를 구분하지 않고 내가 지지하는 정당이라고 하면 거짓말을 하건 부정부패를 저지르건, 음주운전을 해도 상관이 없다. 연예인 음주운전 사건에 대해서는 쌍심지를 켜도 대통령 후보가 과거 음주운전 경력이 있음에는 과반에 가까운 지지를 받는다. 능력 유무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아니다. 같은 죄를 지어도 평가가 다르다면 그야말로 차별아니겠나.


정상적인 사회라면 좋아하던 메신저라도 거짓된 메시지를 전하거나 자신의 메시지에 역행하면 추궁하기도 하고 지지를 철회해야 하고 반대로 내가 싫어하던 메신저라도 옳고 좋은 메시지를 전한다면 수긍도 하고 수용도 할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그것에 엄격하다. 도리어 그른 이야기를 해도 이미 종교가 되어버린 정치 세력에 자신들의 이득은 생각해보지도 않고 맹목적인 지지만을 한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중도라는 건 없다. 중도는 선택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양단을 모두 고민한 후에 선택을 말하는데, 대부분 메시지는 안중에도 없다. 선택하고 난 후 고민을 한다. 


기준이라는 건 어떤 사건이던 모두 공정한 평가를 받기 위함인데, 자신들이 불리하면 기준을 바꿔서라도 주장을 유지한다. 요즘 같이 장마로 국내에 여러 사건들이 있다고 해서 해외순방 중인 윤대통령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김대중 전 대통령은 연평해전 당시 일본에 축구를 보러 가셨다. 묶어서 다룰 이야기 자체가 아닌 것이고 지금을 욕하려면 과거도 함께 말해야 한다. 두 가지다 옳지도 않고 사리에 맞지도 않다. 대통령은 그분들의 역할이 있는 것이다. 두 사례에 대해 욕하고 싶지 않다. 


종교화 된 정치는 그런 상식을 벗어난다. 그래서 가끔 정치노선을 바꾸는 사람들이 대단하게 비치는 것이다. 그만큼 소신과 정도로 정치를 하는 정치인을 보기 어렵고 이권과 자기 이득을 위해서만 정치를 한다. 지지하는 국민들 자체가 메신저와 메시지를 구분 못하고 종교활동 한다는 걸 그 지식인들이 모를 리가 없기 때문이다. 



성공비결도 종교가 되는 시대


나는 과거에 이런 전화를 자주 받았었다. 


"사장님 좋은 땅이 있어서 소개드리려고 전화드렸습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이런 말을 하면서 끊었다.


"그렇게 좋은 걸 왜 남을 알려주세요. 다 사버려야지."


그리고 나는 이것이 상식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 나에게 성공하는 방법을 알려준다고 하면 그건 이미 늦었다. 보편적으로 그렇다. 그러면 또 그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렇게 말해줘도 하지 않기 때문에 성공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마치 자신들이 그 일의 선구자이고 자신들의 얻는 이득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 자체가 기만이다. 어차피 그렇게 사람들의 성공 욕구를 자극하는 문구들로 주목을 끌면 영상을 조회하는 자체만으로도 그들에겐 이득이 된다. 그 말을 따라 링크를 타고 들어가 어딘가에 회원가입을 하고 결제까지 해준다면 금상첨화다. 나는 그런 모습을 '현대판 다단계'라고 정의한다.


다단계 자체가 나쁘다는 건 아니다. 그저 판매 방식이라고 본다. 유독 그로 인한 사기 수법들이 많았었기 때문에 그 단어가 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제외하면 충분히 가능한 사업방식이라고 본다. 하지만 다단계를 다단계가 아니다라고 하는 순간 그건 바로 사기로 이어진다. 


그들이 말하는 '끌어당김의 법칙'같은 확증편향적 사고방식이 일시적으로는 긍정적인 생각과 진취적인 열정을 가져다줄 수 있을지 몰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지금이라는 시간을 저당 잡히게 만든다. 게다가 그들이 부자가 되는 방식은 꽤나 일률적이다. 창의적이거나 새로운 직업을 내놓기보다는 결국 자신들이 입지를 먼저 선점한 곳에 들어와서 그 아래를 채우게 만드는 패턴이다. 정말 심각한 것은 세상에 맞물려 있는 다양한 직업들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게 한다.


그들의 말대로 모두가 성공의 길로 들어서기 위해 그들이 말하는 직업을 갖는다면 대체
"소는 누가 키우나?"


인간이라면 본능적으로 누구나 남보다 더 가지고 싶어 하고 비교우위를 점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성공이라는 건 늘 매력적인 땔감이다. 하지만 이젠 그마저도 종교화가 되어 미래의 성공을 알려주겠다는 그들은 사후세계인 천국을 소개하던 목회자들 같이 되었다. 영상을 보고 구독하고 추종하는 사람들은 성도들이 되었다. 자신도 가본 적이 없는 천국을 이미 간 것처럼 굴면서 타인을 불쌍히 여기는 크리스천들처럼 아직 성공에 닿지도 않은 그들은 왜 벌써부터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비웃는가?  



잃어버린 자기 자신을 찾자


기독교도 사실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 종교다. 이 시대에 우리는 삶의 현상에서 정말 많은 것들을 본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사실은 나를 향한 신의 메시지다. 잘못하는 이가 보인다면 그 잘못한 이를 비판하라고 보여주신 일이 아니라 나 자신을 들여다보라고 주신 일이다 여기는 것이 기독교의 메시지이다. 


불교 또한 부처를 숭배하는 종교가 아니다. 범신론 그 자체로 자신이 부처가 되는 수양의 종교이다. 미륵상의 코를 긁어 복을 빌고 이마의 보석을 빼서 자신의 부귀를 찾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종교활동은 어쩌면 필연적이다. 어려움이 없는 이가 없기에 기대고 길을 찾고자 종교를 찾는다. 하지만 결국 그 안에서 발견해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그러니 이제 누구의 추종자로 누구의 팬으로 누구의 가족으로 속한 종교활동은 그만 멈추고 자신이 심취한 이유에 대해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의 맹목적인 추앙 말고 자신을 위한 길이 무엇인가에 대한
자신을 추앙하는 종교는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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