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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실 Jun 05. 2018

사물의 시선

사물을 통해 사람을 봅니다.

어쩌면,

우리의 인생에도 공백이 필요할지 몰라


[사물의 시선]

세 번째 인터뷰이, 카페 ‘공백’ 심수진



나를 똑-닮은 공간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꿈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오브제와 노래들, 모두는 아니더라도 어떤 소수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취향의 책들이 놓인 공간. 몇 해 전, 그 꿈을 실현하고 싶다는 생각이 커졌을 때, 상점 월세며, 책을 들여오는 비용이며, 골목길 상권이며, 이것저것 체크하고 고민하다 그때 당시 형편으론 어림도 없다 싶어 꼬깃꼬깃 접어 넣고 언젠가를 꿈꾸며 잠시만 안녕-을 고했다. 어딘가 깊숙한 곳에 웅크리고 있는 잠든 꿈이 되어버렸지.



넘치고 넘쳐 현실의 상황까지 범람하여 혼란을 야기했던 공간 창업의 환상(?)은 그때 당시엔 액체 괴물과 같다 싶었으나 - 왜냐하면 그때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서울집의 전세금을 털어 책방을 차려 보겠다, 내 명의로의 대출이 얼마까지 된다더라, 하면서 부모님을 비롯한 지인들을 오들오들 떨게 했으니 - 다시금 꺼내 보니 진주가 들어있는 것도 같고, 마젠타 색깔이 베이스 같기도 한, 슬라임 느낌이다. 보기만 해도 기분 좋고 만지면 재미있는 그런 것. 자꾸만 만지고, 뭉개고, 펼쳐보고를 반복하고 있는 꿈의 실현을 위해 그저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참 많이 한다. 좋은 사람, 좋은 어른이 되어서 언젠가는 경험한 것들로부터 이루어진 나만의 분위기와 생각들을 절.대.로. 강요하지 않고 넌지시 주고받을 수 있는 인생의 여유가 담긴 공간을 만들어보겠단 포부, 그리하여 우리 동네에서 가장 섹시한 할머니가 되겠다는 부푼 꿈을 한가득 품었던 어제의 나를 부여잡고, 내일도 오늘처럼 일개미로 열심히 살아야지.



2년 전 겨울, 제주도에서 창조적 장소 만들기 워크숍을 진행했던 적이 있다. 그 사업에 참관했던 언니와는(그날 이전까지는 간사님이라 불렀고, 그날 이후 언니라고 불렀다.) 마지막 날 밤에 저녁을 먹고 우연찮게 책 이야기를 하다가, 독립출판물 어떤 게 재밌더라, 이런 게 유행인가보다, 나도 만들어보고 싶다, 그러다가 이야기가 점점 나의 인생과 먼 미래의 나의 모습 등. 스펙트럼이 매우 넓어진 이야기를 새벽까지 주고받았다. 문이 닫힌 동문시장 어귀를 배회하며, 편의점에서 따뜻한 음료를 먹어가며 나누었던 내가 좋아하는 것들과 ‘나’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참으로 인상 깊었다. 그때 언니는 책으로 이루어진 공간 준비에 한창이라고 했고 나는 그 상황을 마냥 부러워했다가 그 다부짐을 마음 깊이 응원했었다.



‘해보는 거지 뭐’, ‘우린 아직 젊기에’라는 90년대 문장의 분위기에서 멈춰버린 ‘젊음’이란 단어의 색은 어른들에게만 선명한 것 같다. 자신의 젊은 시절엔 뭐만 했다 하면 다 되었고, 노력으로 일궈낸 오늘까지의 일을 영웅담 마냥 끝없이 늘어놓는 이야기 그 한가운데에서 고개만 끄덕일 때 나는 가끔 어지러움을 느낀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젊음’이라는 단어가 나와 같은 친구들에게는 굉장히 폭력적이고 버거움을 느끼게 하는 단어가 아닐까란 생각도 가끔 한다.



어쨌든, 나라는 우주의 먼지 같은 것이 버거운 삶의 시간을 버티는 와중에도 어떤 이는 반짝거리는 용기로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어냈다. 선보인 지 2년이 지나서야 그 공간을 찾아갔고 볕이 잘 드는 골목 어귀에 위치한 ‘공백’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언니스러운 분위기가 주는 안정감과 더불어 멀리서 온 나를, 슴슴히 배려하는 주인분의 호의에 따뜻함을 느꼈다.



광주 봉선동 골목 안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취향의 책과 커피를 파는 가게, 젊은 작가의 전시가 진행 중이었던 ‘공백’에서 나눈 짧지만 다양한 스펙트럼을 거친 이야기들과 함께 흘러가는 시간이 안타까워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스스로를 무진장 원망했다. 그리고 또 깨달았다. 한나절로는 모자라고 하룻밤은 자야 했다, 그렇게 아낀 시간으로 무엇을 해내려고 했는지... 물론 그것이 미래의 나를 위한 것이겠지만 지금의 나를 위한 행동은 아니라는 것을. 이번에도 나는, 나의 일상에 ‘공백’이 필요한 순간을 바보처럼 또 놓쳐버린 것은 아닌지.


어느새 공백이 골목을 메운지 2년이 흘렀다. 그만큼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이기에 지금까지 해올 수 있었던 건 아닐까. 언니처럼 나도, 스스로 ‘공백’을 만들고 숨 쉴 구멍을 만들어놔야지. 가빠지기 전에 꼭 다시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고요하고 익숙한 사람 냄새가 나는 공간에서의 추억 덕에 바쁜 하루 속에서도 ‘공백’을 떠올리며 차분한 숨을 쉬고 있다.




이름을 지을 때 고민을 많이 했을 텐데, 어떻게 지었는지. 

누군가와 친해질 당시의 기억이 흐릿해지는 것처럼 이름을 지을 때 기억이 잘 안 나요. 여러 후보군 중에서 선택된 이름.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30대 초반의 시기가 인생에서 나름의 공백기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비워내야 할 시기. 광주의 비어있는 공간이나 동네를 미리 찾아서 앞으로 생길지도 모르는 공백을 메워보자는 의미도 있었습니다.



직장생활과 지금의 책방 운영이 다른 점이 있다면? 

직장생활을 오래 한 것은 아니지만, 직장인으로 살아보는 시기가 길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열심히 일을 했었습니다. 직장인으로서의 생활도 꽤 재미가 있었고. 책방은 사람이 남아서 좋은 것 같아요. 돈은 벌 수 없지만.



공간 운영의 어려움이 있는지. 

적당한 인지도는 굉장히 애매한 것 같아요. 인지도가 쌓여 많은 분들이 오셨으면 하지만 그것이 꼭 방문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더라고요. 지속적인 운영에는 어려움이 있고... 손님이 많아지면 공간 운영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책 공간으로서의 정체성에는 또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 것 같아요.  


어떤 공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지? 

좋아하는 단골집들이 사라지게 되면서 맘 편히 있을 공간이 필요해졌어요. 그래서 만들게 된 것입니다. 공간의 기능을 처음부터 특정 짓지 않았어요. 책방을 해보고 싶다는 로망이 있었고 함께 운영할 분이 커피 일을 해왔기 때문에 공간 운영을 위해 부탁을 드렸습니다. 간간히 전시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작가분의 사진과 드로잉 노트, 글 등을 발췌해서 공간 곳곳에 전시해 두었어요.


* 공백에 관한 이야기는 광주 FM 88.9 Mhz에서 방송되었던 ‘작당책방(2017.3.27.)’의 내용의 일부를 발췌, 재가공하였다.



사물의 시선 세 번째 인터뷰이 | 심수진

직장생활을 하며 ‘공백’이라는 공간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인스타계정 : @gong_be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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