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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헌 Jun 08. 2024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아

오후 5시. 00대학교 홈페이지에서 후기 대학원 서류전형 결과를 확인했다. 불합격. 

부족했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왜 공부하려고 하는지 의도나 무엇을 공부하고 싶은 지 연구내용과 계획이 기준선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긴 한숨이 나왔다. 합격한 다른 학교를 포기하고 이 학교를 괜히 고집했나 하는 생각도 비집고 올라왔다. 50이 넘어 만족스럽고 보람있는 삶을 위해 원하는 공부를 제대로 해보겠다고 벼르고 있었는데...한편으로 오기가 발동했다. 이제 제대로 발동을 걸어야 할 때구나. 


왜 공부하려고 하는지 학문의 목표부터 다시 생각해 봐야 했다. 학문적 성취가 아니더라도 현장의 경험을 제대로 드러내고 어떤 강점을 가지고 연구에 매달릴른지 당찬 자신감까지 얹어야 했다. 쉽게 건너가려고 했던 것이 잘못이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난관의 기억을 깡그리 잊어버리고 있었다. 경쟁에서 이탈하여 조직을 나왔지만 필드의 트렉의 종류만 바뀌었을 뿐이었다. 간절함이 빠진 결과였다. 


공간 이동에서 문턱이 있는 이유가 있다. 새로운 환경에서 이 쪽에서 저 쪽으로 경계를 넘을 때 옷 매무새와 마음가짐을 정리하듯이 문 앞에 서야 한다. 절에 들어가기 전 천왕문에 선 것과 같다.  문턱을 넘는 순간 다시 이전으로 되돌아 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대로 경계를 넘고 경계의 영역에서 탈바꿈을 마쳐야 한다. 그래서 준비없이 턱을 넘는 자들을 세차게 밀어내는 것이다. 왜냐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다가올 무수한 시련을 버텨 낼 마음 근육이 만들어져 있는지 흔들어보고 떨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사이 일을 쉬고 느슨해진 일상으로 마음까지 빗장을 풀어버렸나 보다. 이전의 습관, 생각과 행동으로 그대로 올라타려고 했다. 좋은 것보다 익숙한 것을 쫒는 뇌의 잔꾀에 또 한번 말려들었다. 깊은 고민없이, 이 정도면 되겠지 섣부른 자기위로를 했다. 공부하고 싶은 주제도 입학 후 고민하고, 다른 사람도 나와 비슷하겠지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가 알고 있다. 더 이상 손 보탤 것이 없을 만큼 준비에 최선을 다했는지. 6개월이후로 모든 계획을 수정해야 하니 시간을 낭비한 것 같아 착잡해졌다. 하지만 다시 기회를 주기로 했다. 작은 실패에 움찔해서 자기비난을 쏟아붇는 것보다 실패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을 선택했다. 한번에 가면 좋겠지만 추락의 세기만큼 바닥을 치고 다시 튀어 오르는 계기를 만들어 주기로.


직장을 나오면 실패의 쓴 맛이 없을 줄 알았다. 내가 원하는 일이라면 그간의 경험과 아직 식지 않은 열정을 어필하면 쉽게 문이 열릴 줄 알았다. 가상의 시나리오는  "실패없음", "지름길"밖에 없었다. 실패했을 때, 지름길을 타지 못했을 때, 난관에 부딪혔을 때의 탈출구나 우회로는 애당초 생각해두지도 않았다. 멋진 판타지에 갇혀 한없이 올라갔다가 곤두박질 치고 나서야 현실을 제대로 바라본다.


어쩌면 30년이란 직장인이란 환경에 익숙해져 있었다. 기관 내에서 휘몰아치는 작은 바람들은 있었지만 몸이 맞설 수 없을 만큼 강풍은 빗겨갈 수 있었다. 팀웍이든, 동료애든, 목표를 달성해야 하는 과한 책임감이었을 수도 있다. 배가 뒤집혀 물속에 처박히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정신을 잃는 경험은 피할 수 있었다. 몸은 힘들었지만 어찌되었든 순풍의 힘으로 쉼 없이 전진해 나갔다. 이렇게 몸에 밴 순풍의 관성으로 '경계'의 문 앞에서 섰다가 첫 번째 씁쓸함을 마셨다.


갑자기 오늘 아침 코끝으로 다가온 짙은 신록 내음이 떠올랐다. 비 예보가 있었지만 여섯 시가 조금 넘어 뒷산에 올랐다. 입구에 도착하자 마자 빗방울이 떨어졌다. 방수 점퍼의 방수 기능은 이미 많이 닳아있었다. 모자를 더 깊숙이 눌러 썼다. 하지만 하늘을 덮은 나뭇가지들이 가림막이  되어주리라는 것을 알았다. 입구에서 몇 발자국 옮기자마자 풀과 나뭇잎의 초록 향이 강하게 와 닿았다. 맑은 날에는 맡을 수 없는 향이었다. 빗방울이 나뭇잎을 때리면서 자극을 주기 때문이었다. 물방울이 식물 표면에 떨어져 기계적 자극을 만들고 이 충격이 식물 세포를 파괴하여 조직에 저장된 휘발성 유기 화합물(VOCs)을  방출하도록 돕는다고 한다. 짙은 초록 향은 식물에 달라붙는 해충을 방지하도록 도와준다.


발등을 찍은 도끼질의 상처를 말없이 내려다 보았다. 얼떨떨하고 당황한 마음이 쉽사리 잠재워지지 않았다.  하지만 나쁜 것 만은 아니었다. 적응에 필요한 기분좋은 긴장도 함께 왔다. 앞으로 6개월이 '자가실험'의 기간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늘 먹던 음식, 생각, 행동을 낯설게 바라보게 해주었다. 어쩌면 굴곡이 깊은 이 길은 오늘 아침 내 몸에 뿌려진 빗방울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VOCs로 식물의 생장을 돕듯이 아무 생각없던 일상의 나를 흔들어 깨워줄 것이다. 그래서 바닥을 치고 그 힘으로 세게 튀어오르는 중이다. 정신이 바짝 든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힘이 세다는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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