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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헌 Jul 05. 2024

일을 쉬고 쉼 1년

일을 쉰 지 1년이 되어간다. 시간은 생각보다 더 빨리 갔다. 1년동안 무엇이 달라졌을까? 조직에 매여있던 삶과 일하지 않는 삶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돌아본다. 일하지 않는 일상에 적응하는데도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감정적인 부분이 가장 컸다. 다른 동료들과 같은 트렉에서 전력 질주를 하다 혼자 이탈하여 내려온 기분이었다. 그래서 한동안 불안과 강박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수면시간을 6시간에서 7시간으로 늘릴 수 있었다. 몸도 좋아했다. 최근에 이사를 하고 새벽에 일어나 책을 읽고 6시 40분쯤 조깅을 한다. 경의선 숲길을 달린다. 직장에 나갔을 때는 출퇴근 시간이 멀어 아침 6시30분에 1호선을 타고 시청역 사무실에 8시에 도착했다. 그때는 오래 아침운동을 하기가 어려웠다. 조깅을 한지 3주가 되어가니 이제 구간구간 코스가 저절로 외워진다. 120년전인 1904년 용산과 개성간의 경의선 철도공사가 시작되었고 1938년이후에는 일제에 의해 식민지수탈과 대륙침략을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철도의 탄생과 역사처럼 지나온 1년의 내 쉼의 시간을 떠올려 보았다.


일하지 않는 일상은 온라인강좌, 그림, 꽃꽃이 등 취미활동, 남편과의 간헐적 짧은 여행, 독서, 글쓰기로 채워졌다.  시간이 가면서 위험수준이었던 자율신경계는 이완되어 '정상'으로 빨리 회복되었다. 하지만 사직할 무렵 건강검진결과 담낭에 담석이 가득해서 바로 절제수술을 해야만했다. 그러는 사이 해외주재를 마치고 돌아온 남편도 두번째 안면마비와 귀국하자마자 망막박리 수술을 했다. 늘 계획한 대로 상황은 펼쳐지지 않고 예측불가능하다. 마치 기다린것처럼 내가 아니더라도 주변에 일이 생기고 상황은 꼬인다. 내 감정조절과 별도로 질병으로 우울해진 남편의 감정도 세심하게 돌봐줘야 했다. 그래서 퇴직 이후로 온갖 팬시한 계획을 미뤄놓는 친구들에게 다시 생각해보라고 얘기해주고 싶다. 어렵더라도 하고 싶은 것들을 미루지 말고 현재로 가져와 조금씩 해보라고. 내가 바라던 미래의 그 시점에는 통제할 수 없는 다른 상황이 이미 서서히 오고있는 중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좋아진 거라면 과식이나 폭식이 없어졌다. 일할 때는 스트레스를 받은 날이면 저녁에 폭식을 하고 바로 잠으로 도피해버렸다. 만성위염을 달고 살았고 고지혈증도 찾아왔다. 지금은 조깅과 요가로 충분히 몸을 아껴준다. 얼마전 남편도 퇴사를 했다. 결국 장기 병가휴작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다. 서로 출근하여 저녁에 만날 때는 몰랐는데 부딪히는 일들이 더 생기곤 했다. 하지만 그간의 쉼이 주는 마음의 여유로 인해 그의 짜증과 투정까지도 '호기심'이 작동했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저 감정은 대체 어떤 심리적 기저때문일까? 까다로운 시아버님에게 맞추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자동화된 반응일까? 상황별 반복되는 패턴에 대한 진심어린 궁금증이 일어났다. 마치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장미꽃을 아끼는 어린왕자의 심정이 되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심술을 부리려고 달고 있는 장미의 가시일망정 자신을 보호하려는 그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우리는 서로 필요한 존재가 되는 거야....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내 생활은 다시 환하게 밝아질 거야...."


평소 배우는 것을 좋아해서 일을 쉬고 무엇을 해야할지 두려움은 크지 않았다. 찾아보니 이미 경력단절 여성이나 중장년 재취업을 위한 프로그램이 기관마다 풍부하게 제공되고 있었다. 시민대학, 기술교육원, 50플러스센터, 여성발전센터 등 무료이거나 저렴한 교육과정에 언제든지 참여할 수 있었다. 각종 인문학 공부모임, 독서모임 등 문밖을 나서면 참여할 수 있는 온 오프 컨텐츠들이 참 많았다. 또 좋아하는 전시를 찾아 미술관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도 있다.


결국 자기 탐색으로 자신이 어떤 일에 가장 몰입을 잘 하고, 좋아하는지를 아는 것이 관건이었다.  언제 몸과 마음이 합일되어 시간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었는지 그것을 찾고 불러오는 것이었다. 결국 나다움과 만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성희롱성폭력, 가정폭력 등 업무로 인해 관심이 깊어진 심리학을 선택했다. 그리고 독학보다 대학원 입학이 좋곘다고 결정했다.  1막은 생계형 공부였다면 2막은 존재를 위한 즐거운 공부가 될 것같다. 대학교수 친구 Y에게 연구자로서 공부하는 게 많이 두렵다고 했더니 '엉덩이 힘'만 있으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고 격려 해주었다.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끊임없는 외부 환경에 대한 적응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자신을 믿고 실천한다면 일하는 삶에서 빠져나와 일하지 않는 삶의 쉼에서도 평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난 일년을 보내며 내가 얻은 핵심 내용은 몇 가지로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 자유를 부리려면 먼저 내가 정한 원칙과 금기가 있어야 하고, 어떤 순간에도 양보하지 않아야 한다.

- 하루를 온전히 통제할 수 있지만 '선택'과 '결정'에 책임을 다해야 한다. 직장에서 일할 때와는 달리 나를 구속했던 것들이 모두 사라졌고, 핑계거리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 어떤 활동에도 우선순위가 명확해야 한다. 왜 이 일을 하려고 하는지 목적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 지금까지의 방식이 옳다는 생각을 버려야한다. 사안의 결과에 대해 똑같은 방식으로 대응하지 말고 호기심을 갖고, 질문을 던져보고, 다른 시각에서 들여다 보는 것이 필요하다. 대상이 사람이라면 '사랑과 신뢰'의 바탕위에 따뜻함이 기본이 되어야 하고, 일이라면 배경, 결과, 대응방식, 상대방의 반응을 감정적이 아닌 이성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 하루 중 해야 할 일, 좋아하는 일에 투여하는 시간도 각각 분배해 놓고 루틴을 지켜야 한다. 쉰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단지 돈 버는 일을 하지 않을 뿐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 관심 분야., 처리해야 할 것들은 그대로 유지된다.

- 더 친절해져야 한다. 그 누구에게도. 동식물에게도 내게 다가오는 사물에게도. 부드럽고 세심하고 따뜻하게 대해줘야 한다. 그러다 보면 좋은 감정이 차오르면서 눈빛과 표정이 조금씩 달라질 것이다.

- 기다려줘야 할 것, 서두르지 말아야 할 것에는 템포를 늦춰야 한다. 지금은 직장에서 성과를 내야 했던 상황이 아니다. 새로운 환경에 맞는 더 좋은 방식에 대해 고민하고, 접근하고, 변화된 행동을 만드는 것도 필요하다.

- 내게 가장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 한시도 잊지 않아야 한다. 마음에 새기고 가까운 사람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고 반응해주고 지금 해야 할 활동들을 선택하고 실천하면 된다.


지금 나는 행복하고 마음은 평온하다. 지난 1년이 그렇게 갔다. 아침에 눈을 떠 하루를 설계하고, 진심을 다해 사람을 만나고, 순간에 머무르려는 연습을 게속 이어나갈 것이다. 일을 쉰 일년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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