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태양의 나라 이탈리아 토스카나 언덕에 있는 시에나는 축복받은 땅이다. 중세도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도시 너머로 넓게 펼쳐진 포도밭 풍경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으로 손꼽힌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중세 건축물과 한여름 태양의 열기처럼 뜨거운 축제가 열리는 강렬한 색채의 도시이기도 하다. 시에나는 다양한 표정을 지니고 있다. 조용하고 아늑한 소도시지만 축제가 열리는 여름이 오면 도시는 열정이 넘친다. 중세로 가는 마법의 문을 열고 시간을 거슬러 시에나로 여행을 떠난다.
◆시에나의 중심광장 역할을 하는 캄포 광장
시에나의 명소, 캄포 광장으로 향하는 길에는 소도시답지 않게 수많은 사람이 넘쳐난다. 골목에 촘촘하게 들어선 오래된 건축물마다 형형색색의 깃발이 나부낀다. 시에나 팔리오 축제가 열리는 7월의 풍경이다. 건축미가 빼어난 캄포 광장은 로마의 캄피돌리오 광장,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광장과 더불어 이탈리아 3대 광장으로 불린다.
12세기에 세워진 캄포 광장은 오랜 시간 시민들의 만남의 장소이자 시에나의 중심광장 역할을 해 왔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부채를 펼쳐놓은 듯한 모습이다. 부채모양은 성모마리아의 망토를 펼친 모습을 상징한다. 광장은 부챗살을 그려 넣은 것처럼 9개의 구역으로 나누었다. 9개의 구역은 중세시대 시에나를 다스렸던 ‘9인의 위원회’를 의미한다. 광장을 빙 둘러싼 건물 사이사이에는 아홉 개의 길이 있어 어디서든 광장으로 쉽게 드나들 수 있다. 시에나가 언덕을 따라 형성된 도시여서 캄포광장도 경사가 진다. 광장은 예전에 투우장이기도 했고 사형장이기도 했다. 특히 세계적인 경마축제인 시에나 팔리오 축제(Palio di Siena)가 열리는 장소로 이름났다.
광장 앞에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푸블리코 궁전이 있다. 건물 한쪽에 파란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종루가 아름답다. 종루 맞은편에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이름을 딴 가이아분수(Fonte Gaia)가 있다. 아담과 이브, 마리아와 아기 예수가 조각된 부조 장식이 아름다운 분수는 13세기부터 500년 동안 시민들이 마시던 샘물이었다. 지금의 분수에서 보는 장식은 14세기에 퀘르차(Quercia)가 조각한 작품을 모방해 만든 모조품이고, 진품은 시립박물관에 있다.
캄포광장의 랜드마크처럼 우뚝 솟아 있는 푸블리코 궁전(Palazzo Pubblico)은 현재 시청사로 사용하는 건물이다. 파란 하늘에 닿을 듯 쭉 뻗어있는 전망대, 만자의 탑은 102m 높이로 시에나가 자치권을 확립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1297년 완성됐다. 건물 2~3층에는 시립미술관이 있다. 시모네 마르티니의 ‘성모마리아’와 암브로조 로렌체티의 ‘선한 정부와 나쁜 정부’ 등 ‘시에나파’라는 화파가 만들어질 정도로 중세 미술사의 획을 그은 화가들의 프레스코화가 장식돼 있다. 작품을 보면 14세기 크게 번성했던 시에나 사람들의 자부심이 느껴진다.
아름다운 그림을 감상했다면 건물 한쪽에 우뚝 선 만자의 탑에 올라야 한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500여 개의 계단을 오르면 중세도시의 풍경과 부채모양의 캄포 광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오래된 붉은 벽돌 건물과 어우러진 토스카나 전원의 풍경은 시에나파의 그림처럼 걸작이다.
◆성모마리아의 영광을 기리는 시에나 팔리오 축제
시에나는 작은 도시지만 17개의 교구로 자치구를 나눈다. 각 구역을 콘트라다(Contrada)라고 하는데, 콘트라다 사람들은 자신이 사는 지역에 애정이 깊다. 거리 곳곳마다 콘트라다를 상징하는 깃발과 동물 조각으로 장식해 놓았다. 시에나 팔리오 축제는 오랜 역사를 지닌다. 13세기, 토스카나 지방의 시에나와 피렌체는 경쟁 관계였다. 1260년 시에나 사람들은 피렌체 군과 전투를 앞두고 성모마리아에게 열쇠를 바치며 도시를 수호해달라고 기원했다. 전투에서 시에나 군은 승리를 거두었고, 시민들은 승리를 축하하며 성모마리아의 영광을 기리는 경마 경주를 열었다. 이렇게 시작된 시에나 팔리오 축제는 매년 7월 2일과 8월 16일에 열린다. 팔리오는 시에나의 각 마을을 상징하는 깃발을 의미한다. 팔리오 경주는 안장 없는 말에 앉아 팔리오를 들고 광장 세 바퀴를 가장 빨리 도는 말이 우승을 차지하는 승마 경주다.
콘트라다에 대한 애정은 시에나 팔리오 축제에 그대로 드러난다. 팔리오(Palio)는 자줏빛 비단 망토를 뜻하는 중세 라틴어 팔리움(Pallium)에서 유래했는데, 중세시대 황제나 영주들이 권력을 넘길 때 망토를 넘겨주는 것처럼 팔리오 축제에서 우승한 콘트라다에 승리의 깃발을 건네준다.
팔리오 축제가 열리는 기간에는 조용한 중세도시에 축제를 즐기러 온 다양한 국적을 가진 사람들로 북적북적하다. 경주가 열리기 전부터 축제의 열기는 뜨겁다. 자신이 사는 콘트라다를 상징하는 문장이 그려진 깃발을 흔들며 중세기사 복장을 한 사람들이 골목을 행진한다. 스카프처럼 콘트라다 깃발을 목에 두른 수많은 사람들이 행렬 뒤를 따른다. 거리를 꽉 메운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지만 그 속에는 흥겨운 질서가 있다.
축제의 열기가 넘실대는 캄포광장에 들어서면 광장을 비추는 태양 아래서 사람들의 얼굴이 환하게 빛나고 있다.경주가 열리는 트랙 주변, 광장을 둘러싼 건물, 상점의 창가와 발코니에 3만 3000개의 관람석이 설치된다. 이 좌석은 축제가 열리기도 전에 예약이 끝나버린다. 관람석에 앉지 못한 2만 8000여 명의 관중은 광장 한복판에 서서 경주를 구경한다. 미처 광장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광장이 바라보이는 집과 건물의 옥상과 지붕에 올라 경주를 관람한다.
축제도 흥겹지만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아버지 등에 무동을 탄 어린아이, 광장 한복판에서 키스를 나누는 연인, 패션의 나라답게 한껏 멋을 부린 노신사까지 영화 같은 축제의 한 장면이 된다. 뜨거운 태양의 열기로 달아오른 광장은 축제의 열기가 더해져 들끓고 있다. 시에나 사람들에게 팔리오 축제는 열정의 삶 자체다.
오후 4시, 만자의 탑에서 종이 울리면 경주에 참여하는 콘트라다의 기수들과 중세풍 복장을 한 행렬이 깃발을 앞세우고 등장한다. 나팔수, 북 치는 사람, 군악대, 팔리오를 덮은 말과 기수들이 행진을 준비한다. 이들이 등장하면 축제 분위기가 한껏 고조된다. 5시가 되면 화려한 행진이 시작된다. 걷기조차 힘들 정도로 수많은 인파 속에 묻혀 열광의 축제를 온몸으로 느낀다. 건물 높은 곳에는 카메라를 설치하고 이탈리아 전역에 축제의 모습을 TV로 생중계한다.
7시 30분, 드디어 경주가 시작된다. 말이 달리자 광장의 열기는 절정에 이른다. 깃발을 들고 돌진하듯 트랙을 도는 말과 기수들에게 열렬한 응원을 보낸다. 각 콘트라다의 깃발이 휘날리고, 말이 트랙을 세 바퀴를 도는 90초 동안 울려 퍼지는 함성은 광장의 하늘을 뒤덮는다. 드라마 같은 풍경 속에서 우승자가 가려지면 팔리오를 수여한다. 우승한 팀은 포도주를 마시며 거리를 행진하고 패배한 팀은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고 승자에서 선물을 바친다. 패배하여 흥분한 콘트라다 사람들이 싸움을 벌이기도 하지만 이를 말리기 위해 경찰들이 나서지도 않는다. 이런 행동마저도 축제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조용한 소도시지만 열정이 넘치는 시에나는 깊이 숙성된 와인의 묵직함과 톡 쏘는 스파클링 와인의 청량함이 교차하는 오묘한 도시다.
◆여행메모
시에나는 보통 피렌체에 머물면서 당일로 여행하는 경우가 많다.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역에서 시에나역까지 기차로 1시간 30분(편도 8.7유로) 걸린다. 시에나역에서 구시가지까지는 오르막길이고 거리도 멀어 시내버스(승차권 1.5유로)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피렌체에서 버스를 타면 그람시 광장까지 바로 가기 때문에 버스를 타는 것이 편하다. 버스로 1시간 15분(8.5유로)이 걸린다. 팔리오 축제가 열리는 동안 시에나에 머물려면 3~4개월 전부터 미리 숙소를 예약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