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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유리 Mar 29. 2024

4부 1화 기적

섭식장애 및 각종 정신질환과 동행하는 인간의 삶



내가 아직 섭식장애의 관해 속에 머물고 있다 한들 구토하지 않는 삶이란 내겐 기적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되고 활동 반경이 넓어지고 "응, 너 먹고 싶은 거 먹자!"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으며 체력이 허락하는 한 원하는 모든 걸 할 수 있다.


 구토에서 벗어난 이유에 대해 그나마 내게 도움이 됐던 것들을 읊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2. 나는 그저 3일간 토하지 않은 이 생활을 조금 더 이어갈 순 없을까? 토하고 싶지 않은데...라고 생각했다. 다. "이 3일의 절식을 조금만 더 유자 해보자. 이미 3일이나 구토하지 않았잖아. 맛이 느껴지지 않는 음식을 먹고 토하고 변비를 걱정하는 삶. 그게 여전히 좋아? 벌써 3일이나 구토하지 않았다고. 조금만 더 참아볼 순 없을까. 이 몸무게가 어떤 용량의 음식으로 유지되는지 눈으로 확인해 보자."가 그 당시 생각이었다.

그날부터였다. 구토하지 않는 기적이 시작된 건. 그건 곧,

매일 끊임없이 이어지던 철도가
아주 작은 꽃송이 하나로 경로를 이탈한 기분이었다.


 나는 여전히 술이 필요했지만 술과 함께 조금씩 음식을 먹었고 구토하지 않았다. 하루 이틀은 어렵지 않았다. 삼일 사일, 일주일정도는 입원해 있는 셈 치지 뭐, 라며 대수로워하지 않았다. 음식을 아예 차단하는 게 아니라 소식을 해 나가다 보니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폭식의 욕구가 들었을 때 나는 뒤를 돌아봤다.

 뒤돌아 서 내가 걸어온 발걸음을 바라봤다. 힘겹지만 삐뚤빼뚤 찍혀있는 내 굳은 발자국들이 나를 반겼다.

그래, 나 벌써 여기까지 왔잖아. 내 발걸음들이 벌써 선을 이을 만큼 길어졌어!


 처음 지인들과 다녀온 3일의 여행, 그리고 내가 스스로 노력했던 몇 주를 보내니 그 시간이 아까워서 라도 다시 구토를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며칠째 이걸 이겨내고 있는데 그 기록을 깨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었다. 금주할 때 그랬던 것처럼.


 물론! 구토하지 않다가 다시 구토한다 해서 그것은 잘못이 아니다. 심지어 실패도 아니다. 1권에서 항상 말해온 것처럼 인생은 나선형이기에 넘어짐 역시 진보를 위한 거룩한 한 걸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혹시라도 긍정적인 방법을 시도하다가 잠시 멈춰 섰을 때 너무 자신을 몰아붙이지 않길 바란다.

그 또한 아주 소중한 한 걸음이기에.



 나는 이 감각이 매우 크게 느껴졌다.

"내가 이 만큼 왔어. 말도 안 돼 내가 3주 동안 구토를 안 했다고? 4주를?"

이런 흥분감 속에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가장 도움이 됐던 건 금주할 때와 마찬가지로 그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니 오히려 실망만 가득한 하루였더라도 구토하지 않았다는 단 하나의 일이 그날그날의 엄청난 성공이었고 그날의 전부였다. 그렇게 난 성취감 중독됐다.


 어떤 날은 너무너무 폭식하고 싶었다. 단 음식들을, 그렇게 바라던 흰쌀밥을, 맛있는 반찬들과 삼키고 싶었다. 그리고  결국은 토하지 뭐.라는 생각을 하며 삼켰다. 그러나 나는 결국 토하지 않았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라고 수천번 읊조렸다. 소화해도 된다고. 소화할 수 있다고.

이거 오늘 하루 먹은 거 모두 너의 머리카락과 두뇌와 너의 살점들 수많은 세포들이 되어 널 살릴 거라고 잘한 거라고 아주 잘한 거라고 밤새 칭찬했다.


기적이 일어난 두 번째 이유를 정리하자면 하루하루 이어지는 나의 노력이 길어질수록 그 노력이 아까워서라도 계속해서 노력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거나 속상한 날에도 가장 강력한 성취감을 내게 안겨주었다. 그 두 기쁨이 나를 조금 더 건강하게 만들어 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3. 세 번째는 조금 더 단순한데 어쩌면 나에겐 가장 중대한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 손등의 러셀사인을 엄청나게 싫어하고 부끄러워했으며 모든 날 아는 사람들이 내 손을 볼 때마다 몸이 얼어붙곤 했다. 이 러셀 사인 역시 언젠간 사라질 거야. 영원히 거북이 등껍질처럼 내 손등을 뒤덮고 있지 않을 거야. 분명 그럴 거야.라고 분명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언젠간... >이란 단어는 희망을 품고는 있지만 역시 너무 터무니없이 느껴지고 기한이 없으니 답답하기만 하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나는 몸에 생긴 흉이 시간이 지나면 옅어지고 사라지듯이 계속해서 구토하지 않으면 이 러셀 사인 역시 사라질 거라고 믿었다.

 효과는 빨랐다. 한 달, 두 달 그 정도만에 변화가 찾아왔다 손목 쪽으로 보이는 작은 흉들은 사라지려고 하고 짙었던 손가락 뼈 사이의 흉들도 그 색이나 형태가 점점 변해갔다. 너무 기뻤다.

너무 기뻐서 춤이라도 추고 싶었고 러셀사인이 사라지니 섭식장애에 있어 모든 다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의 힘까지 생겼다. 그래서 한때는 두렵기까지 했다. 내가 못 참고 한 번이라도 다시 구토하면 러셀사인이 돌아올까 봐. 다시 흉 지는 게 너무 싫어서 참고 또 참았다. 그렇게 긴 시간을 지나 보내고 다시금, 원래의. 뽀얀 내 오른손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정말 이 기적 같은 일들에 너무도 감사하고 날 칭찬한다.

사실 엄청나게 도움이 될만한 것들을 정리해 의미 있는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덧붙일 말이 없을 만큼 이토록 간단하게 이 몇가지 정도의 이유 외엔 소개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어쩌면 완쾌는 생각보다 가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 세가지도 절대 간단한 건 아니지만 말이다. 구토없이 살아보니 삶의 다른 부분들에도 자신감이 든다. 내가 희망하는 대로 잘 이루어질 거란 믿음 말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제발 희망을 잃지 말자. 꼭 우리는 더 나은 사람을 살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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