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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아한우주 Sep 26. 2022

너무 많은, 하찮은 죽음 :길 위의 죽음에 대하여

[내 고양이의 죽음에 대하여 39] Ⅱ. 책임에 대하여 ④

해가 바뀌어 차로 약 한시간 거리 직장에 다니고 있다. 왕복 4차선 국도를 타고 열심히 액셀을 밟는 출근길, 한동안 매일 만나는 친구가 있었다. 서해로 중앙선 가드레일 아래 조용히 잠든 것처럼 보이는 검은 고양이. 어찌된 일인지 차도 사람도 닿기 어려운 그곳에 가만히 누운 어린 고양이. 뿌연 더께가 쌓인 녀석은 그렇게 같은 자리에 누워, 출근길 내 마음을 가라앉히곤 했다.


가치와 의미가 박탈된, 흡사 나무토막 같은 마른 사체를 보며 마음이 괴롭다. 저 아이는 어떤 생각으로 길을 건너려 했던 것일까. 채 다 자라지도 못한 작은 아이가 무엇을 하고자 도로 위를 거닐던 것일까. 어미를 찾아나선 것일까. 혹은 어미에게 독립을 요구받고 새 길을 찾아나선 것일까. 그저 배가 고팠을까. 모두 다였을까. 사나운 길 위에서 죽음이 덮치던 순간, 작은 고양이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무라카미 하루키가 젊은 시절 아테네에서 첫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하고 쓴 글에는, 길 위에서 목숨을 잃은 동물을 세며 의기소침해하는 장면이 나온다. 42km 마라톤 구간을 달리는 동안 하루키가 마주한 죽은 동물은 개 세 마리, 고양이 열한 마리다. 하루키의 첫 풀코스 완주라는 감흥 만큼 내게 인상에 남은 것은 그가 달리면서 마주친 길 위의 죽음에 대한 심드렁한 전언이었다.


운이 좋았다면 따뜻한 주인 품에서 사랑받으며 살았을 텐데. 나 역시 통근 산업도로의 살풍경을 완성하는 오브제로 그저 누운 동물들을 짧은 시간 응시하며 지나칠 뿐이다. 그야말로 완전히 짓이겨진 아이들도 있다. 커다란 차에 몸체가 정확히 밟힌 듯 몸이 흩어져 있다. 똑바로 볼 자신이 없어 재빨리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기고 액셀을 꾹 밟는다. 마음이 요동친다. 동물에 대한 애호 여부를 떠나 이런 광경은 누구도 아무렇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고양이로 치자면 나 역시 먹잇감을 찾아 나선 출근 길, 서울을 벗어나 장거리 출근을 하기 전에는 로드킬이 이렇게 일상적인 풍경은 아니었는데. 슬프고 당황스럽고 화가 난다. 봐도 봐도 무감해지지 않는다.


가여운 아가, 언제부터 거기 있었니. 고단한 삶이었지? 이승에서 힘들었던 기억은 모두 잊고 훌훌 날아가렴. 양지바른 무지개 동산에서 고양이 친구들과 편히 쉬려무나. 다시 태어나면, 사랑 많은 누군가와 건강한 가족이 되기를. 미안하다 아가야.


길 위에서 생을 마감한 아이들을 보면서 짧은 인사를 건넨다. 아픈 마음으로 명복을 빌어준다. 이 아이들에게도 고작 몇 달, 몇 년 짧은 생을 살다간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한동안 매일 마주친 어린 검은 고양이의 주검은 가차 없는 인간들에게 길 위의 생명도 가치 있는 것임을 알리는 시위였을지 모른다.


국립생태원 로드킬 정보시스템에 따르면 2020년 한해 집계된 전국의 로드킬 신고는 1만5000여건에 달했다. 통계에 잡히지 않고 사라진 생명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많은 길 위의 죽음에도 내가 다니는 39번, 24번 국도엔 야생동물을 주의하라는 표지판 하나 보이지 않는다. 로드킬 당한 동물을 마주쳤을 때 행동 지침을 알리는 표지판도 물론 없다.


개체수가 드문 동물만 귀한 것은 아니다. 모든 무고한 생명이 가치가 있다. 누군가는 개체수가 너무 많은 길고양이들은 로드킬로 자연스럽게 개체수가 조절되는 것이란 주장도 하지만, 이런 식의 자연감소는 누구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다. 이렇게 빈번하게 로드킬이 일어나는 길이라면 생태통로를 만들어 동물들이 이동할 길이라도 내줘야 할 것이다.


동물들의 목숨도 아깝지만 로드킬로 인한 교통사고, 사체를 치우거나 피하려다 발생하는 2차사고 등 인간이 치르는 비용도 작지 않다. 인간의 일로 도로를 내기 전에 이 땅은 동물들의 것이었다. 생명으로 태어난 이상 그 삶의 가치는 존중받아야 한다. 그것이 사회적 비용이나 불편도 줄이는 길이라면 망설일 이유가 없을 것이다.


주말을 보내고 출근하는 월요일, 늘 새로운 동물들이 길 위에 합류해 있다. 고라니 같은 대동물이 누운 날도 더러 있다. 이튿날이면 말끔하게 치워진 그 자리에 내가, 또 당신이, 누군가의 소중한 이들이 눕는 일은 없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그 하찮은 죽음들이 얼마나 많아야 그 목숨들이 우리의 목숨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될까. 매일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출근길에 나선다. 내일 출근길엔 새로 누운 동물친구가 없기를, 사람도 야생동물도 길 위에서 안전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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