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아한우주 Sep 27. 2022

<집사의 일기8>고양이가 없는 집

[내 고양이의 죽음에 대하여 40] Ⅱ. 책임에 대하여 ⑤

20200826 남원

집에 고양이가 없다. 우리 집에 산 것은, 숨을 내뿜는 것은 나 하나뿐이다. 벌레나 그런 미물들 말고 나와 온기를 나누고 눈을 맞추고 서로의 이야기를 주고받는 그런 존재로서의 산 것 말이다. 집에 내 고양이가 없다.


미미가 무지개다리 넘어 고양이별로 돌아간 지 한 달이 됐다. 시간은 나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아 가더니 다시 착실히 제 몫을 챙겨가고 있다.


10년을 함께 한 고양이가 없는 집, 아이의 죽음 후 들이닥친 그 적막감이 몹시 당혹스럽다. 아이가 없다는 상실감은 늘 커다란 파도 속에 삼켜진 채로 있는 기분이랄까. 그리고 그 상실감의 파도 안에 또 여러 갈래의 물결들이 있는데 집 자체가 하나의 웅덩이를 만들고 있다.


곳곳에 아이의 흔적이 남아있고, 아이를 떠올리게 한다. 아이가 투병한 석 달 동안 거의 집에 붙어 아이와 보내 더 그럴 것이다. 그래서 집에 있을 수가 없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10년을 붙어 산 고양이가 난 자리, 그것은 경험해 보지 못한 상실 혹은 부재이고, 너무 갑자기 찾아와 버렸다.


텅 빈 집에 너무도 많은 이야기가 있다. 아이가 자주 잠을 청하던 이불 위를 가만히 바라본다. 아이가 자주 뛰어올라 나를 깨우던 베개 맡을 손으로 더듬어 본다. 아이의 간식이 가득했던 서랍장을 열어 물끄러미 쓸어본다.


너에겐 이 공간이 우주였을텐데, 당연히 셀 수 없는 이야기를 품고 있겠지. 집에 남은 아이의 흔적들이 나를 웃고 울린다. 요즘 털공의 출몰 빈도가 부쩍 줄었다. 털공이 뭐라고 마음이 아프냐면... 아이의 흔적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고양이를 반려하는 사람들은 알 텐데 아이가 있을 때 하루에 몇 개씩도 나오는 그것. 얼기설기 둥근 형태를 한, 연한 솜으로 제멋대로 짠 듯한 털공들, 바닥을 마음대로 굴러다니는. 아이가 떠나고 하루 이틀에 하나쯤 나오더니 이제 못 본 지 일주일쯤 됐다. 초반에는 나오는 대로 웃다 울다 주워 버렸는데 이제는 한동안 식탁 위에 놓고, 냄새도 맡아보고, 돌돌 굴려도 보고, 얼굴에도 대보고 한다. 소중한 내아가.


청소기 먼지통을 비우는 횟수도 줄었다. 외출할 때 늘 습관처럼 옷 위를 굴리던 돌돌이 질이 금세 끝난다. 이러다 어느 순간 돌돌이가 필요하지 않은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이삼일에 한 번은 버리던 종량제 봉투가 일주일 지나도 차지 않아 볼품없이 찬 봉투를 내다 버린다. 터질 듯 가득 찼던 종량제 봉투의 초라한 변신에 주책맞게 눈물을 닦는다. 겨우 이런 것에도 너를 떠올리게 되는구나. 눈에 늘 눈물을 준비해 둔 것처럼 뜬금없는 순간에도 눈가가 젖는다.


혼잣말을 하다 상심한다. 내가 아이에게 얼마나 많은 아무 말을 했는지 아이가 떠나고 알게 됐다. 내 감정과 기분을 표현하는, 혹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말을 네가 있어했다는 걸 말이다. "바보, 자고 있어", "엄마 갔다 올게 예쁜이", "금방 올 거야 멍충멍충" 가방을 챙기고 신발을 신으면서 늘 했던 말이 더러 나온다. 집에 들어올 때도 늘 했던 말 꾸러미들이 튀어나오려 해 멈칫한다. 아이의 부재를 실감하는 순간이 너무 잦다.


오늘처럼 여행을 할 때 부모님께 아이를 맡기곤 했다. 며칠간의 일탈에서 돌아와 아이보다 먼저 집에 도착하면 집은 휑하니 비어 있다. 그럼 나는 얼른 짐을 내리고, 여독을 느낄 새 없이 한 시간 거리 부모님 댁에 아이를 데리러 갔다. 집까지 가는 길 위에선 항상 아이를 향한 마음이 고조되기 때문에 도착하면 그야말로 계엄군처럼 쿵쾅쿵쾅 집에 들이닥쳤다.


그리고는 잔뜩 혀 짧은 소리로 요란하게 아이를 부르고, 엄마는 그런 나를 보며 혀를 끌끌 차고, 그럼 나의 야옹이는 '이놈의 집사 또 어디를 갔다 왔냐옹' 하는 조금은 책망하는, 하지만 부모님과 잘 지냈던 게 분명한 티를 내곤 했기에 그 과정 역시 내 여행의 일부였고, 집으로 마침내 완전히 돌아오는 의식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그건 어디까지나 사랑하는 우리의 아주 잠시 이별이었으니까. 다시 만날 것이 분명한 설레는 이별.


하지만 이젠 녀석이 고양이별로 떠나버렸기에 그런 의식을 다시 할 수 없다. 분하다. 어제도 오늘도 나의 고양이는 집에 없고, 지금 남원에서 열심히 지리산을 오른 뒤 돌아가도 집은 적막감에 시들어 있을 뿐, 나는 너를 어디서도 찾아올 수 없는 것이다. 나의 설렜던 귀가 의식은 영원히 종료됐다.


너는 내게 그런 존재였구나 아가야. 네가 곧 나의 집이었다. 그래서 난 돌아갈 곳이 없는 마음이란다. 네가 없는 집에 가고 싶지 않구나. 자꾸 집 밖으로 도는 내가 언제쯤 다시 집에서 편안할 수 있을까. 이사를 가야 할까.


이사 생각도 한다. 하지만 아이의 커다란 흔적 하나를 영영 지우는 것 같아 두렵다. 이제 물리적인 흔적은 한번 지우면 다시 복구할 수 없다. 죽음이란 돌이킬 수 없는 것이고, 이런 것이 '영원'임을 실감한다. 새로 추억을 만들 너는 이승에 없기 때문에.


집에 돌아가면 늘 그랬듯 나는 문을 열자마자 아이에게 무사 귀가의 인사를 건넬지 모른다. 그 말을 들을 고양이는 없고, 그저 다리 힘이 풀려 주저앉을 테지만, 너무나 익숙한 그 무의식에 가까운 발화를 어찌할 수가 없다. 집안 곳곳에 걸어둔 사진 속 아이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내 집이 아닌 집. 아이와 함께 어떤 온기와 행복이 빠져나간 집. 너무나 큰 그 상실을 어디서 어떻게 회복할까. 이성으로 그 정도는 알고 있다. 내 소중한 고양이를 돌봤던 것처럼 나를 돌봐야 할 텐데... 아직은 고통의 시간. 짬이 나면 운동을 하고 또 한다. 고통으로 나를 채찍질하고 땀을 흘린다.


지리산의 부드러운 산줄기를 넋 놓고 바라보며 너의 둥근 몸, 움직임을 생각했다. 지리산 자락에 지천으로 핀 배롱나무 꽃을 보면서 꽃 같던 너를 혹은 진분홍 너의 콧망울을 떠올린다. 가슴이 뻥 뚫리는 성삼재 정상, 멀리 와서 높이 올라야 볼 수 있는 풍경들을 마주하고 너에게 이런 세상을 보여주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나는 내일도 지리산 자락을 다시 오르며 다리와 심장에 고통을 새기고, 문뜩문뜩 네 생각을 할 것이다. 정령치에 올라 네 이름을 부를게 아가야. 너는 어디에나 있으니까. 정령치의 무지개 너머에서 나를 보고 인사해주렴 아가야.


돌아가면 집은 조금 다른 곳이 되어 있을까.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이렇게 가끔 모든 게 너라서 힘들지만 또 행복하다는 생각도 한다 나는.

매거진의 이전글 너무 많은, 하찮은 죽음 :길 위의 죽음에 대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