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먹으려고 남편과 식탁에 앉았는데, 아들이 전화를 했다. "만삭이 성별 나왔어요. 오늘 만삭이 엄마가 병원에 갔는데 알려줬대요."
"와~~ 정말? 잠깐. 마음 준비 좀 하고." 심호흡을 한 후 "만삭이는딸, 아들?"하고 물었다.아들이"저도 몰라요."라고 답했다."엥~~ 너도 모른다고?" 내가 놀라 물었다. "네. 만삭이 엄마가 풍선을 터뜨려 성별을 공개한대요. 지금 페이스톡 할 수 있으세요?"라는 아들 말에 "지금? 물론 할 수 있지!"라고 바로대답했다.
며느리는 지금 둘째 만삭이를 임신하고 있다. 첫째 때 입덧이 심해 병원까지 입원했었는데, 둘째 임신도만만치 않다. 며느리는 40주 견디면 첫째 같이 예쁜 아가가 태어난다는 걸 알기 때문에 버틸 수 있다고 했다. '만삭까지 잘 버티자'라는 바람으로 둘째의 태명을 만삭이로 지었다. 며느리가 안쓰럽고 고마울 따름이다.
사돈댁도 같이 페이스톡을 한다고 해서 남편과 나는 입고 있던 후줄근한 웃옷을 부랴부랴 바꿔 입고휴대폰보다 화면이 큰 태블릿의 스위치를 켰다.
설레는 마음으로 페이스톡 단추를 눌렀다.화면의 상단에 우리 부부가 보이고,하단에는두 개 창이떠있었다. 하단 왼쪽 창에서 앞니를 드러내고 웃는손자에게 "안녕" 하며 손을 흔들었다.하단 오른쪽 창에 있는 사돈댁에게도 고개를 숙여반갑게인사를 건넸다.
잠시 후손자 대신 까만 풍선이 화면에 잡혔다. 풍선에는 파란색으로 Boy, 분홍색으로 Girl이 쓰여 있었다. 곧이어아들이1년 5개월 된 손자를 오른팔에 안고,왼손에는 핀을 들고화면에 나타났다. 며느리가 "남자일까요? 여자일까요? 남자면 풍선에서 파란색 색종이가 나오고, 여자면 분홍색 색종이가 나와요."라고 말했다. 안고 있는 손자에게 아들이 물었다. "너는 여동생이 좋아? 남동생이 좋아?" 요즘 동그란 공에 빠져있는손자는 아빠 말에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고풍선을잡으려고손을 뻗자며느리가 "하나, 둘, 셋!"을 외쳤다. 아들은 왼손으로 풍선을콕 찔렀다. 풍선이 두꺼운지 터지지 않았다. 아들은 손자를 왼팔에 바꿔 안더니 이번에는 오른손으로 핀을 눌렀다. 그래도 터지지 않자 핀을 꾸욱좀 더 강하게비틀면서찔렀다. 그랬더니 풍선에서 분홍빛 색종이 조각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와~ 딸이다!대박!대박!" 아들은 기뻐 소리쳤다. 애기 손자에게 "여동생 생겼다!"라고 말하며 바닥에 떨어진 분홍색 조각들 위에 손자를 앉혔다. 조만간 오빠가 될 손자도 분홍 색종이를 깔고 앉아 신났다. 아들은 색종이 조각을 한 움큼 집어 손자 머리 위에 뿌렸다.
딸이라는 소식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좋아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니 나도 벅찬 마음이 되어 축하한다고 외쳤다. 아들과며느리는 내심 딸을 원했나 보다. 남편도 사돈댁도 함박웃음을 지으며축하한다는 덕담을 나누었다. 사돈댁과 우리 집은 모두 딸을 먼저 낳고 아들을 낳았다.두집이딸도 키워보고 아들도 키워보는 행운을 누렸는데, 아들과 며느리도 남매를 두게 되어 무척 기쁜가 보다.
첫째 아이를 미국 유학 중에 가졌던 나는아마도 편지로한국에 있는 양쪽 부모님께 딸이라고 말씀드린 것 같다. 편지를 많이 쓴다고 '편순이'라는 별명이 있기도 했지만, 그때는 국제전화가 비싸 다급한 일 아니면 전화를 안 하던 때였다. 귀국 후 몇 달 지나낳은 둘째 아이는 전화로 아들이라고 알려드렸다. 우리보다먼저 결혼한 시댁 아주버님네와 시동생네가 이미 딸을 둘씩 낳았고 이어서 우리가 첫딸을 낳은 터라 내색은 안 하셨지만 시아버님과 시어머님은손자를 많이 기다리셨나 보다. 아들이라는 소식에 "이제 나도 손자 있다!"라며 좋아하셨다. 어머님은 혹시 부정 탈지도 모르니 아들을 낳을 때까지 두 동서들은물론 아무에게도 아들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셔서 빵 터졌던 기억이 난다. 다섯 명의 손녀들 투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자 사랑이 유난하셨던 고인이 된 아버님과 어머님도 남매를 갖게 되는 손자를 하늘나라에서 내려다보며 뿌듯하게 웃고 계실 것 같다.
아기의 성별 공개 풍선 이벤트는 재미있고 흥미진진했다.의도적이지는 않았겠지만 풍선이 세 번만에터져 더 아슬아슬하게 느껴졌다. 풍선을 찌를 때마다 설레고 조마조마했다. 작년 손자를 가졌을 때는 전화로 소식을 들었는데, 그사이 성별 공개 유행이 바뀌었나?
궁금해서 인터넷을 검색하니 성별 공개 이벤트는 2008년 미국 LA에 사는 작가 겸 변호사인 제나 카버니디스가 처음으로 선보였다. 여러 번의 유산 끝에 어렵게 아이를 갖게 된 카버니디스는 지인들에게 딸이라는 기쁜 소식을 알려주기 위해 파티를 열어 분홍색 아이싱 케이크를 잘랐다. 바로 이 케이크커팅이 '성별을 밝힌다'는 의미의 '젠더 리빌' 파티(Gender Reveal Party)의 출발점이다. 특히 블로거이기도 한 카버니디스가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이 빠르게 확산되면서 젠더 리빌 파티는 대중적인 문화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점차 더욱 극적이고 창의적인 이벤트를 추구하면서 예상치 못한 대형 사고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2020년 9월,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부부가 야외 공원에서 젠더 리빌 파티 불꽃놀이를 하다가23일이나 지속된 대규모 산불이 발생했다. 이 사고로 소방관 1명이 사망하고 15명이 부상을 입었다. 2019년 미국 테네시에서는 할머니가 폭죽 폭발물 사고로 목숨을 잃기도 했다. 좋은 의도로 재미 삼아 시작된 이벤트가 뜻하지 않은 대형 사고로 이어지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조촐하게 풍선을 터뜨리거나 케이크를 자르는 정도면 충분할 것 같다. 지나침은 무리를 낳는다. 과유불급이다.
남편과 나는 요즘같이 아이가 귀한 시대에 아들 부부가 두 아이를 갖겠다고 한 것만으로도감사하다. 특히 심한 입덧에도 불구하고 며느리가 기꺼이 둘째 임신을 결정해 더욱 고맙다. 아들이든 딸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건강한 아이가 태어나기를 소망할 뿐이다.
한바탕 웃으며 사돈댁과깜짝페이스톡축제를 만끽한 후, 뿌듯한 마음으로 남편과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