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타다 히카루, 불안정한 인생 속에서 꽃핀 예술성
1998년, J - POP 역사에 한 획을 그을 가수가 나타나죠. 일본인의 컴플렉스인 영어발음까지 완벽하고, 소울풀 넘치는 아티스트. 풍부한 감성에 꽤나 연륜이 있을것 같았는데 알고보니 겨우 15살이었죠. 게다가 이 소녀가 작사와 작곡까지 직접 했다는 점에 일본 사람들은 크게 놀랍니다. 우타다 히카루는 그렇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1983년 뉴욕 맨해튼. 이곳에 살았던 한 일본인 부부가 있었습니다. 남편은 음악 프로듀서로, 16살 때 뉴욕 영화사에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이민왔었죠. 아내는 70년대를 풍미했던 일본 국민가수. 이 두 사람 사이에서 한 여자아이가 태어납니다.
우타다 히카루. 당연하게도, 가족의 생활은 음악을 중심으로 돌고 있었죠. 종종 부모님은 "히카루 여기 좀 불러볼래?"와 같은 부탁을 했었죠. 부모님은 일찍이 그녀의 재능을 알아보게되었죠. 그리고 전폭적으로 딸의 음악활동을 지원했는데, 우타다가 10살 땐, 연예사무소(U3 MUSIC)를 설립하고 U3라는 가족밴드를 결성해서 <STAR>라는 앨범을 발매한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부모님의 권유로 본격적으로 히카루는 작사/작곡을 시작했고, 그녀가 13살 되던해 여름, 자작곡과 일부 커버곡으로 이루어진 앨범을 녹음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사실만 보면 완벽한 부모님 밑에서 행복하게 재능을 발휘하며 살았던 것 같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우타다히카루가 3살 때 부모님은 처음 이혼하셨습니다. 처음이라고 말하는건 이후에도 이혼이 반복되었기 때문이죠. 부모님은 총 6번이나 이혼-재혼을 반복했고, 어떤 때는 2주만에 이혼하고 재혼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정신병이 있었던 어머니 때문에 그녀는 5살 때 이미 어른이 되었죠.
내가 음악을 시작한 이유는 가수가 되거나 성공하고 싶어서가 아니고, 단지 부모님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서였다
음악은 나 자신과 부모님을 연결하는 유일한 끈입니다
그녀에게 음악은 어찌보면 부모와 소통하기위한, 인정받기 위한 수단이었죠.어머니는 딸을 사랑했지만 병에 시달릴 때는 '내 자식이 아니야.'라는 말도 꺼냈었다고 합니다. 그럴수록 어린 히카루의 인생에서 음악을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어갔고, 97년 가을 어느날. 도쿄의 스튜디오에서 레코딩하던 중 디렉터 미야케 아키라의 눈에 띄어, “일본어로 해 보지 않을래?”라는 말을 듣고 곡을 씁니다.
그렇게 나온게 Never let go.
眞實は最高の噓で隱して 진실은 최고의 거짓으로 숨기고
現實は極上の夢でごまかそう 현실은 제일 좋은 꿈으로 속이자
ねぇ どうしてそんなに不安なの? 근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ゆるぎない愛なんてほしくないのに 변하지 않는 사랑따위 원하지 않는데..
(never let go 중)
미야케 프로듀서는 이 어린아이의 재능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이 때의 감동을 그대로 담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1998년 12월 우타다 히카루는 'Automatic/time will tell'로 데뷔합니다. 당시 나이 겨우 15세. 엄청난 가수의 탄생이었지만 첫 등장엔 오리콘 차트에서는 베스트 10권 밖으로 대중으로부터 크게 주목받진 못했습니다.
그녀를 주목한건 외국계 CD 판매숍이나, 라디오들이었죠. TV출연 없이 오직 라디오를 통해서 노래를 홍보했는데, 얼굴도 모르는 가수가 일본에서 생소했던 R&B 기반의 세련된 팝을 들고 나와 노래를 부르니 신선한 충격이었죠.
누가봐도 사회의 풍파와 시간을 어느정도 견딘것 같은 깊은 느낌인데 이 노래를 부른건 겨우 15세 중학생. 더 놀라운건 이 아이가 작사와 작곡을 직접했다는 점이었죠. 일본가수들조차 컴플렉스여서 가사속에서 어색하게 발음한 영어 가사들을 아주 자연스럽게 발음했고, 이 아이가 왕년에 일본의 국민가수의 딸이란 것이 알려지며 그녀는 순싯간에 돌풍을 불러일으키죠.
우타다 히카루가 등장하기 전까지만해도 J-POP은 코무로 패밀리의 전성시대였죠. 아무로 나미에, 카하라 토모미, TRF 등을 프로듀싱한 코무로는 1996년 데일리 (4월 15일자) 오리콘 싱글 차트에서는, 1위부터 5위까지 모두 그가 프로듀스 작품이 순위를 자리잡기도 했죠. 당시 일본 부자 순위에서 4위를 기록할 정도로 엄청난 돈을 벌기도 합니다.
그런 코무로 테츠야 붐을 한방에 끝내 버린 것이 우타다 히카루였죠.
코무로 테츠야는 인터뷰에서 "우타다 히카루가 데뷔했을때 나의 시대는 끝났고 새로운 시대가 왔다"
모닝구무스메의 프로듀서 층쿠는♂ 역시 우타다 히카루를 듣고 “이것은 당해낼 수 없다” 라고 말했습니다.
우타다 히카루는 순식간에 엄청난 것이 되어버렸다. 그녀의 출현으로 그 전까지 기세등등하던 사람들이 모두 퇴색해 보이는 것이었다, 宇多田ヒカルはあっという間にすごいことになってしまった。彼女の出現で、ちょっと前まで勢いのあった人達がみな色褪せて見えてしまうのだ
-가요평론가이자 뮤지션, 오카타 하루오-
99년엔 두 번째 싱글 <Movin' on without you>이 발매되었고, 이 역시도 100만장 이상 판매됐죠.
그리고 일본의 음악사에 남는 대망의 1집 앨범 first love가 발매됩니다. 발매 첫주에 출하된 200만장이 모두 매진되는 등 대박을 쳤고, 최종적으로 오리콘 기준 765만 장을 팔아치우며, 뉴스에서도 다룰 정도로 인기를 끕니다.
이 앨범의 전곡 작사 작곡을 모두 우타다가 했는데, 버릴 곡이 하나도 없었죠. (저도 이 앨범 가지고 있는데, 모든곡들이 진짜 취저입니다)
First love를 들으보셨다면 알겠지만 도입부 가사부터가 그전의 J-POP과는 달랐습니다.
당시 우타다는 도쿄와 뉴욕을 오가며 학교 방과후와 주말에 곡작업을 했는데, 방과후의 연장선으로 생각한 데뷔앨범이 사회현상이 되어버리자, 정작 본인은 매우 당황했습니다. 빵집에 앉아 샌드위치도 맘대로 못 먹게 되자 한동안은 ‘가수생활을 괜히 했나’란 생각도 했습니다.
最後のキスは タバコのflavorがした flavor 마지막 키스는 담배의 향기가 났지요
にがくて せつない 香り 씁쓸하고 애닯은 향기
You are always gonna be my love いつか だれかと また 戀に 落ちても
언젠가 누군가와 또 사랑에 빠지더라도
I'll remember to love You taught me how You are always gonna be the one
-first love 중- (이게 10대가 쓴 가사의 깊이..)
그렇게 우타다히카루는 어머니와 함께 밀리언셀러 기록을 만들어냅니다. )어머니인 후지 케이코는 1969년 18세에 신주쿠의 여자로 데뷔했는데, 딸보다 30년 정도 먼저 데뷔했음에도 이미 당시에 3장 연속 밀리언 셀러를 달성했었죠) 역대급 신인이라고 요즘엔 수식어처럼 붙지만, 우타다히카루야말로 그 단어에 어울리는 가수였죠.
그 전까지만 해도 학업을 병행하며 잡지나 라디오 방송만 하고 있었지만, 이후에는 방송에도 나옵니다. 물론 예능 등에 자주 출연하는 건 아니고, 간판 음악방송 위주로 몇번 나왔지만 나올 때마다 엄청난 기록을 세웠습니다. 첫 뮤직스테이션으로 출연 당시엔 28%로 역대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고, 우타다가 노래를 부르고나서 순간시청률은 33.6%로 역대 2위의 기록했는데....
이후에도 <Addicted To You> <Wait & See ~リスク~> <For You/タイム・リミット> 등 명곡을 차례차례 내며 반짝 인기가 아님을 보여줬죠. 이런 바쁜 와중에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에 입학합니다.
인기에 엄청난 부도 축적하게 되죠. 16살에 앨범 판매만으로 이미 70억원을 벌었고, 2005년까지의 추정소득이 500억원이 넘었습니다. Hey Hey Hey에 나왔을 땐, 그녀가 얼마 벌었는지가 대화소재였죠. 다운타운은 “이 어린게 나보다 많이 벌다니"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엄청난 부자였지만 막상 그녀는 소박하고 평범한 생활을 즐겨서, 100엔샵이나편의점 등을 자주 이용했죠. 옷차림도 수수하고 연예인 답지 않아서 한번은 일본 활동중이던 SS501이 우타다 히카루를 스탭인 줄 알고 의자 및 음료 심부름을 시키키는 해프닝도 있었습니다. 물론 히카루는 아무런 말이 없이 친절하게 음료도 가져다 주고 의자도 건냈습니다(ㅎㅎ)
우타다 히카루가 활동할 당시 일본엔 거물급 아티스트들이 있었죠. 같은 시기 정상에 있었던 하마사키 아유미는 종종 우타다와 라이벌 구도가 형성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2집 Distance를 발매했을 때, 하마사키 아유미도 베스트앨범 (A BEST)를 발매하며 엄청난 관심을 이끌었습니다. 둘다 최전성기였는데, Distance가 첫주에 300만장을 팔며 위클리 1위를 가져갔습니다. (아유는 280만장)
여성솔로 싱글 총매출에서는 하마사키 아유미가 앞섰죠. 아유는 패션과 이미지 모든 것을 복합적으로 CD 매출에 반영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우타다 히카루는 노래만으로 승부하는 경향이 강한 가수였기 때문에 약간은 결과 방향성이 달랐다고 할까요.
예를들어, 우타다 히카루가 「Flavor Of Life」를 발매했을 때에 뮤직 스테이션에서 하마사키 아유미와 공동 출연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유는 혼자서 걷기 힘든 드레스를 입고 출연한 반면, 우타다는 후드티에 청 반바지의 프리한 모습으로 등장했죠.
우타다는 노래만으로 승부한다는 느낌이 강했던 반면 아유는 가사를 통한 공감과, 패션을 유행시키며 아티스트에 자리매김했었습니다.
아직 스무살도 안된 여자아이가 J-POP의 흐름을 바꿔놓으며, 성공가도를 달릴 줄 알았는데, 인생 행복 총량의 법칙이랄까요. 그녀에게도 힘든시기는 찾아오죠.
일본이란 세계가 작았던지, 2002년 미국진출을 발표하고 해외활동을 위해 앨범녹음에 박차를 가했지만 이상하게도 온몸이 피곤했죠. 급격한 체력 저하로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난소에 양성종양이 발견되며 수술을 받게 됩니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났을만큼 심각한 상태였고, 설상가상으로 호르몬 치료로 인해 일상생활에도 지장이 옵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 라이브 컨디션의 기복도 심해졌죠. 결국 난소종양을 발표하며 모든 프로모션 일정을 취소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중 19세의 어린 나이로 15살의 연상 사진작가 겸 감독인 키리야 카즈토시와 결혼을 발표합니다. 그는 디스턴스'(Distance) 앨범 재킷 촬영을 담당하며 우타다 히카루랑 가까워졌는데, 병 투병을 하며 결혼에 대한 결심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결혼은 5년 뒤인 2007년에 종지부를 찍었죠.
난소종양으로 발매가 늦춰진 EXODUS로 미국 진출을 시도하지만, 여기서도 그리 좋은성적을 못냈죠. 영어도 자유자재로 하고, Feel도 충만했기 때문에 일본은 내심 기대했었지만, 빌보드 차트에서 160위를 기록하며 사실상 실패를 합니다. 굳이 미국 사람들이 처음보는 아시아의 가수를 소비할 이유는 없었던 것이죠.
일본 언론에선 미국시장의 “신인”으로 보면 나쁘지 않은 성과였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EXODUS 앨범은 팬들 안에서도 너무 난해하단 얘기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사생활의 영역에 있어서 암흑기는 더욱 지속됐는데, 2006년엔 어머니가 미국 공항에서 미량의 약물 성분이 묻어있는 지폐를 가지고 있는 게 발견되어 전액 압류됩니다. 이 때 압류금액이 약 5억원이었죠. (이 큰돈을 가지고 기내에 반입하려고 하니, 조사당국은 당연히 검은 돈이라고 생각했겠죠)
조사결과 약물과는 무관하고 단지 카지노를 하기 위한 돈으로 3년 뒤에 다시 돌아갔지만 이 사건이후 어머니의 행동이 더욱 이상해졌습니다. 지인들과도 연락을 끊었고, 횡설수설하고 불안해하며 사건 이후 더욱 이후 이상행동을 보였습니다.
우타다도 영향을 받았는데, 2006년에 낸 앨범 <ULTRA BLUE>는 그녀의 감정을 담아냈죠. 우울한 감정을 담아 제목조차도 ULTRA BLUE였다고 합니다. 가사에서도 이런 난해한 심정이 드러났습니다. 성대에도 문제가 생겨 투어중엔 목소리가 안나올 정도로 심각해졌죠. 이 때문에 라이브가 불안정하다는 얘기도 들리게 되었죠.
이런 와중에도 묵묵히 음악을 하며 꽃보다 남자 리턴즈의 주제곡으로「Flavor Of Life」(2007,18th 싱글), 극장판 에반게리온의 주제가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서)로 Beautiful World 등을 발매했습니다.
알다시피 우타다히카루는 15살 때부터 달려왔잖아요. 일도 일지만, 사생활과 건강등의 문제가 겹쳐 매우 버거웠던것인지 2011년엔 활동중지를 선언합니다.그리고 2013년, 그녀를 가수의 길로 이끌었지만 어렸을적부터 시련을 주기도했던 어머니의 사망 소식이 들려옵니다.
어머니의 극단적인 선택에 우타다는 충격을 받아 어떤 행동도 못 할 정도였죠. 70년대 일본의 국민가수이자 우타다히카루의 어머니란 존재의 죽음에 언론은 엄청나게 집중을했고, 영구차를 가로막고 취재를 진행하며 눈살을 찌푸리게 했죠.
우타다의 어머니도 인생이 파란만장했죠. 이른 나이에 국민가수가 되었지만 막상 부모는 그녀를 돈을 버는 수단으로 생각했죠. 이런 영향 때문인지 우타다히카루를 출산한 이후에도 감정 기복은 심했는데요. 이 때문에 가족들과의 마찰도 많았죠. 우타다히카루와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보며 대부분 참고 있었지만, 2001년엔 우타다가 어머니에게 나가라고 한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딸한테 미움받는다며 자책했지만 딸과 어머니의 관계는 증오보단 애정에 가까웠던것 같습니다. 사건 이후 하도 추측이 난무하자, 우타다히카루는 성명문을 통해서
어머니가 오랜 고통에서 해방되기를 바라는 반면, 마지막 행위는 너무나 슬프고 후회스럽다母が長年の苦しみから解放されたことを願う反面、彼女の最後の行為は、あまりに悲しく、後悔の念が募るばかり
그리고 우타다 히카루는 ‘'꽃다발을 너에게'로 2016년 활동을 재개합니다. 세대를 막론하고 우타다의 재개를 기다리고 있었죠. 이곡은 기존의 우타다의 곡과는 약간 다른 일본스런 악곡이라는 평이 많습니다.
데뷔전에는 홍백가합전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도 했고, 이후에도 줄곧 출연하지 않았던 그녀였지만 2015년도에 첫 출전을 하기도 합니다.
8년만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한 앨범을 발매하기도 했죠. 그런가 하면 두번째 남편과도 이혼을 발표합니다(첫번째 이혼 후 외국인 남성과 재혼했었음) 언론에선 두번째 이혼에 가십성 헤드라인을 찍어냈지만, 개인적으로 우타다히카루야 말로 사회의 시선과 테두리에 가둘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서전격인 앨범 ULTRA BLUE에서 젤 좋아한다는 곡엔 “행복이라던지 불행이라던지 기본적으로 틀린 개념”이란 가사가 있죠. 이 말엔 사회적으로 정의하는 행복이나 불행이 모두에게 적용될순 없지 않느냐란 뜻이 숨어있는것 같습니다. 다른 곡에서도 많이 언급하듯 그녀는 그 어떤것에도 구속받고 싶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21년엔 내 성별이 무엇인지, 내가 결혼을 했는지 안 했는지 규정되는게 불편하다며 논 바이너리를 선언합니다. 논바이너리는 남성과 여성 어느 성별로도 정의하지 않는 개념이죠. 한번은 "당신은 양성애자 입니까?" 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이에 대해 "왜 내가 이성애자라고 생각하는 거지?"라는 답변을 했었죠.
우타다 히카루는 정말 일본음악 황금기 안에서도 가장 빛났던 가수였던거 같아요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로 변하는 전환기, 우타다 히카루의 세계는 새로운 J-POP의 흐름을 만들어냈습니다. 유튜브에 달린 댓글로 글을 마무리하며... 아래 영상도 봐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