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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마비루 Dec 17. 2024

기타노 다케시, 일본 영화계 거장이란 타이틀 속 삶

명문대 입학 후 가출, 영화배우로 잘나가다 오토바이 사고로 안면마비까지

1980년대 초 일본에서 유행한 만담 열풍과 함께 개그맨으로서 인지도를 높인 비트 다케시. 

뼈때리는 사회 풍자와 특유의 시니컬한 웃음으로 인기를 끈 그는 감독으로선 기타노 다케시로도 알려져있습니다. 소나티네, 하나비, 키즈리턴, 기쿠지로의 여름 등 90년대를 대표할만한 명작들을 남겼는데,

이렇게 영화계에서 이름을 날렸지만 정작 유년시절 영화는 거의 본적이 없다고 하는데요.


어린시절

기타노 다케시는 1947년 페인트가게를 운영하는 집안의 4째로 태어납니다. 도쿄 변두리에서 자라났는데, 어린 시절에 그가 살던 동네는 치안이 안 좋은곳으로 유명해 야쿠자가 눈앞에서 사망할 정도의 거친 동네였다고 합니다.

기타노 타케시와 어머니

정글 속에서 막 자랐을 것 같지만, 다케시는 막둥이에 형제들과도 나이가 차이가 났기 때문에, 할머니에게 예쁨을 받으며 성장합니다. 어머니는 자식들의 교육에 온갖 정성을 쏟아부었는데,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명문 메이지대의 기계공학과에 입학하게 됩니다. 


하지만 막상 대학은 그가 생각한 모습과는 달랐는데요. 집에서 학교까진 전철로 1시간 정도 걸렸는데, 학교에 흥미를 붙이지 못한 기타노다케시는 등교길에 어디론가 새기 일쑤였고, 자주 신주쿠에서 내려 이곳 저곳 방황하게 됩니다. 


그의 마음을 사로 잡은건... 신주쿠의 재즈카페.


학교 대신, 재즈 카페에 죽치고 앉아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고 급기야 여기서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합니다. 6년 동안 총 학교에 나간 날은 20여일이 안된다고 하는데, 학교대신 이곳에서, 손님이 틀어달라는 곡들의 이름을 외우면서 재즈 전문가로 거듭나게 됩니다. 


어머니의 소원은 힘든 그들의 세대와 달리, 다케시가 명문대의 공대를 나와 번듯한 샐러리맨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대학교 2학년에 다케시가 자퇴를 얘기하자 충격을 받은 어머니는 울다가, 화가 나서는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며 그를 내쫓습니다. 어머니의 족쇄에 풀려난 다케시는 당장 친구 집에 얹혀 살며 빌딩 해체공, 클럽 보이, 택시 운전사, 주유소 알바 등을 전전합니다.  속박에서 벗어나 하늘을 올려보자 그동안 빨갛게 보였던 신주쿠의 하늘이 더 없이 푸르게 보였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막상 막내 아들을 내쫓았지만 6년동안 혹시라도 다케시가 학교로 돌아올까하는 마음에 없는 형편에 등록금을 납부했고, 다케시 역시 나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인터뷰를 하다가 주저 앉아 펑펑 우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아래 영상 2:27초)


20대 여러 아르바이트를 거친 다케시는 이번엔 아사쿠사의 스트립쇼 극장의 엘리베이터 보이의 일을 하게 되는데요.  극장 엘리베이터의 문을 열고 닫아주는 일이 다였지만, 이 일을 하다가 사장이자 개그 스승인 후카미 센자부로를 만나게 됩니다. 그의 눈에 띈  다케시는 그렇게 연예계에 발을 들이게 됩니다. 


개그맨, 비트 다케시 

투비트 당시 기타노 다케시

기타노 다케시가 처음 대중에 얼굴을 알린 것은 1970년대 ‘투 비트’라는 만담 콤비를 결성하면서부터입니다. 당시 일본 사회적으로 만담열풍이 불었었는데, 비트 다케시는 악랄한 독설을 청중들에게 퍼부어 주목받았는데요. 개그맨으로서 그의 챕터도 영화인 못지 않게 깊고 넓지만, 이번 영상에서는 영화에 더욱 주목하고 싶기에 이 정도로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다만, 시니컬한 유머와 사회풍조는 그의 아이덴티티로 영화뿐만 아니라 만담에서도 일관되었습니다. 


영화에 처음 출연한 것은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전장의 메리크리스마스>. 내용은 막상 모르지만 이름은 낯익은 이 영화는 사카모토 류이치가 OST를 만든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제 2차 세계 대전 중 일본 대위와 영국 포로의 동성애를 그리는데, 80년대 치고는 꽤나 파격적인 내용에 2차 세계대전의 가해자로서의 일본에 대해 주목했었기에 반향이 일었는데요. 잠시 이야기가 벗어나지만, 이 영화에 나온 사카모토 류이치와 기타노 다케시는 매우 다른듯 닮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듯합니다. 


신주쿠에는 골든거리라는 곳이 있어요. 좁은 골목에 3평 내지의 선술집이 즐비해있는 곳인데, 당시 신주쿠 골든거리에선 예술인, 작가들이 모여 열띤 토론을 벌이며 예술인 아지트로서의 기능도 했다고 해요. 사카모토 류이치 역시 대학 시절 학교보다는 이곳에서 취하고, 이야기하고, 예술을 했습니다. 


이 시기 방황의 토양은 뒤늦게 꽃피우는데, 기타노 다케시가 직접 영화에 출연하면서 감독을 맡기도 했다면 사카모토 류이치는 자신의 출연한 영화에 직접 OST를 붙이며 둘 다 배우를 뛰어넘어 예술인으로서 활동하게 됩니다. 

사카모토 류이치(왼쪽에서 두번째)와 기타노 다케시(맨오른쪽)

1988년 기타노 다케시는 영화 ‘그 남자 흉폭하다 その男, 凶暴につき’를 통해 처음으로 감독을 맡게 됩니다. 원래 이 영화에서 주연만 맡기로 했는데, 갑분 감독이 연출을 포기하면서 다케시가 연출의 세계까지 발을 들이게된 것인데요. 이 영화를 이후로 여러 영화에서 감독을 맡게되었죠.


오토바이 사고 

하지만, 그 어느 영화보다 그의 인생은 더욱 다이나믹했는데요...

1986년 12월 9일, 당시 국민개그맨으로 인기를 끌던 비트 다케시는 후배들을 데리고 잡지사 프라이데이를 습격합니다. 연예인 스캔들에 누구보다 목매는 프라이데이가 기타노 다케시의 스캔들을 보도하기 위해 주변인들을 스토킹 하는 등 막무가내로 취재를 벌였고, 가족들의 사진을 몰래 찍거나, 취재중 그의 내연녀를 다치게 하자 화가 머리끝까지 났기 때문인데요.


영화속 야쿠자 군단의 모습과 같이, 그는 후배 개그맨 11명과 함께 잡지사를 쳐들어갑니다. 그렇게 사무실을 무단 점거 후, 기물을 파손하고, 심지어는 편집부원에게 손을썼고, 결국 이런 기자회견을 남겼죠. 

그리고 그의 영화관에까지 영향을 준 또 다른 사건은 1994년 8월 2일 오전 1시 40. 한밤중 오토바이를 타고 내연녀를 만나러 가던 기타노 다케시.

당시 신문기사 

신주쿠 부근을 달리던 중에 사고를 일으키며 머리에 엄청난 중상을 입게 됩니다. 한적한 새벽이었기에 자칫 잘못하면 그대로 방치된 채 죽음에까지 이르를 수 있었지만 ,신의 뜻인지 우연히 근처에 있던 아이돌 光GENJI의 모로호시에 의해 병원에 이송됩니다. 


생명은 유지했지만 타격은 커서 퇴원 직후엔 안면이 마비됐고, 어색한 입꼬리와 아직은 마비가 풀리지 않은듯한 모습은 대중에게 충격을 줬습니다. 


퇴원 후 기자회견, 그는 이 큰 사고를 겪고도 시니컬한 유머는 유지했는데요. 머리에 볼트가 들어 있어 비행기 금속탐지기에 걸린다고도 얘기하고, 만약 안면마비가 낫지 않으면 예명을 안면으로 붙이려고 한다며 본인을 개그 소재로 삼았습니다. 사고후 비대칭적으로 바뀐 얼굴은 영화에서 묘한 이질감을 주며 한쪽은 웃지만 한쪽은 웃음짓지 않은 모나리자와 같은 신비감을 풍기기도 합니다.

안면마비가 온 기타노 다케시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 세상을 가장 열심히 살아간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란 질문은 정확히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가장 진지한 성찰이기 때문이다

이 사고는 기타노의 작품에도 영향을 줬는데요. 


1994년 이전 작품들은 죽음이나 자살을 동경하는 정서가 깊이 깔려있는데, 사고 이후로는 삶을 강조하는 작품이 나오거나, 부쩍 주인공들이 웃는 얼굴이 많이 나오기도 합니다. 사고 전에 만들어진 영화 소나티네에선 적었던 웃는 장면이, 이후 만들어진 영화 하나비에서는 많이 보이는 이유기도 하죠. 


하나비는 영화인으로써의 기량이 만개했음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기타노 다케시가 직접 감독, 각본, 편집, 주연을 맡았습니다. (요약 내용은 9:42~)



이 작품의 완성도를 인정 받으며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일본 작품으로는 40년 만에황금사자상 수상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본문화 개방 이후 공식적으로 개봉한 첫 일본 영화로 유명합니다. 그의 영화는 야쿠자들이 나오며 강도높은 폭력이 묘사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기자가 질문하자, 그는 

"내 작품 주제는 폭력이 아니라 죽음이다. 폭력은 죽음에 가장 가까운 것이라 택했을 뿐이다”라고 말합니다. 



기쿠지로의 여름 

사고 후 사경을 헤맨 뒤에는 키즈리턴, 기쿠지로의 여름 등 과거 필모들과는 사뭇 다른 순수하고 풋풋한 분위기의 영화들도 나왔습니다. 

히사이시조의 ost로 더 유명한 기쿠지로의 여름은 칸 영화제에서 5분간 기립박수를 받으며 세계적으로도 인정받은 영화입니다. 주인공인 마사오는 돈을 벌러 떠났다는 엄마를 찾아 사진 한장을 가지고 무작정 길을 나섭니다. 그리고 그 여정에 함께 한게, 마사오보다 더 아이같은 철없는 다케다 아저씨였죠. 기타노 다케시는 이 영화를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같은 고전에 도전하는 심정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는데 그의 말처럼 20년 전 영화이지만, 시대에 상관없이 여전히 찐한 여운을 주는 명작입니다. 여담인데 제목의 '기쿠지로'는 다케시의 죽은 아버지의 이름인것도 생각하게 만드는 포인트죠. 


그의 인생을 되돌아보며


한참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방황하던 스무 살 무렵을 돌아보면, 폭발하기 위해 몸을 움츠리고 있던 것 같다고 기타노 다케시는 말합니다. 아르바이트만 하다가 하루가 끝나기도 했지만 '어차피 어떻게 될 거야'라며 미래를 기약했다고 하는데요.


5년이나 10년에 잠재력이 폭발해 성공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이는 100년을 기다려 폭발하기도 한다

시간은 절대적이지만 인간이란 저마다의 시기를 가지고 있는것 같습니다. 만약 지금 힘든시기를 거치고 있는 분들이 계시다면 그건 어쩌면 몸을 움츠리고 있는 시기가 아닐까…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기타노 다케시의 인터뷰와 함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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