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과 미술, 와인과 쇠고기 & 햇살을 좋아한다면, 떠나세요 토스카나로.
여행과 관련된 대화를 나누다 보면 으레 "어디가 가장 좋았어?"라는 질문을 받는다. 그러면 나는 반문한다. "관광지로서? 아니면 그냥 그곳이?" 질문이 정확하지 않기도 하지만 고르기도 쉽다. 그랜드캐년의 압도하는 자연, 자연을 꿰뚫은 마추픽추의 감동, 어이가 없게 만드는 기자의 피라미드... 여기에 감동 점수를 매기고 여행 인프라 지수를 객관적으로 기록해서 우열을 가리고 줄을 세우는 것이 가능할까요?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라고 말하려는데 생각해보면 줄을 세우는 것도 재미있을 듯하다. 뒤쪽에 있던 마추픽추가 피라미드 앞쪽으로 자리를 옮기자 피라미드가 "어이 이봐, 왜 새치기를..."하며 항의를 하는 것이다. 그러면 마추픽추를 머리를 긁적이며 (마침 정수리에 있는 '태양의 신전' 부분을 긁어대면 더욱 좋겠다) 말한다. "하하... 피라미드 씨, 이번에 잉카레일 기차를 새 것으로 교체하는 바람에 인프라 부분에서 점수가 높아졌지 뭐예요.. 헤헤헷~ 그러면 실례". 그러자 바로 앞줄의 에펠탑이 마추픽추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넨다. 그러나 그것은 형식적인 인사일 뿐 에펠탑은 내심 긴장하는 표정을 짓는다.
각설하고. 그럼에도 관광지로서 어디가 멋지냐고 내 멱살을 쥐고 흔든다면, 대개 유명한 순서대로 멋지다고 답하겠다. 많이들 방문하고 널리 알려져 있다면 그만큼 객관적으로 관광지로서 좋단 뜻이다. 당연히 미니애폴리스보다 뉴욕이 멋지고, 피사의 사탑이 치앙마이의 도이수텝보다 황홀하다. 그런 일반론은 차치하고 내 개인의 이야기를 하자면.
'그곳 참 좋았다'라고 내가 말할 때는 거기 갔을 때 '여기서 살고 싶다'라는 생각이 얼마큼 드는가로 판단한다. 2008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처음 갔을 때 여행 중 '살고 싶다'라는 생각을 처음 했다. 그다음에는 칠레에서 그랬고, 그다음에는 슬로베니아. 지금 진짜 어디 살고 싶은데? 한 군데 찍어봐,라고 묻는다면, 아마 '토스카나'라고 일단 말할 것 같다. 그래, 그곳 참 살고 싶지.
토스카나 주의 위치는 대략 위와 같다. 이탈리아의 북부 지역과 수도인 로마 사이. 이탈리아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탈리아 최고의 도시로 서슴지 않고 ‘피렌체’로 손꼽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는데, 피렌체가 바로 토스카나 주에 있다. 피사는 두말할 것도 없고, 이탈리아 최고의 광장을 가진 시에나, 탑의 도시 산지미냐노, 그리고 와인 애호가라면 놓치지 않을 끼안띠 지역 및 몬탈치노, 그리고 몬테풀치아노가 바로 토스카나에 있다. 아아.. 그렇습니다. 토스카나는 먹을 것과 마실 것이 풍부한 지역인 것입니다. 소도 많이 사육되므로 쇠고기가 매우 싸고 맛있다. 피렌체를 여행한 사람이라면 피오렌티나 스테이크를 먹지 않을 수 없었을 텐데, 그러니까 키아니아 품종의 소로 만든 1kg짜리 티본스테이크를 터억 내놓으면서 50유로 밖에 안 받는 놀라운 고장이 바로 토스카나다.
세계인의 음식이 되어버린 파스타 이야기 -한국도 파스타가 맛있다-를 이탈리아에서 할 필요가 없어졌지만, 토스카나라면 할 얘기가 있다. 바로 시에나 지역의 파스타인 ‘피찌(pici)’. 한국에서는 파는 곳을 본 적도 없다. 버젓이 리스토란테 간판으로 내건 곳들도 그렇다. 이게 재미난 것이 밀가루 반죽을 두 손바닥 사이에 놓고 손으로 돌돌 말아서 뽑아내는 파스타다. 당연히 면발이 굵다. 우리 생각보다 굵다. 수타 우동을 먹는 느낌의 파스타라니...
일찍 봄이 찾아와 5월이면 우리 초여름처럼 신록이 가장 짙은 곳, 그래서 곡식과 과일도 여물게 열리는 곳. 그 신선한 풀을 먹고 무럭무럭 살 찌우는 소들이 있는 곳. 선홍색 양귀비꽃이 지천에 펴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곳, 푸르디푸른 들판과 사이프러스 나무 사이로 드라이브를 하다가 아무렇게나 들른 에노테카(와인 판매점)에서 와인 한 병을 시켜도 지갑에 부담 없는 곳. 와인과 함께 먹으려고 아무렇게나 시킨 요리가 결국 빈 접시로 쌓이고 쌓이게 되는 곳. 토스카나... 그래, 바로 이곳이 내가 있을 곳이야...
토스카나하면 르네상스를 빼놓을 수가 없다. 그럴싸하게 표현하자면 르네상스가 창발한 장소, 이탈리아 문화의 고갱이가 바로 토스카나다. 굳이 르네상스 3대장인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그리고 메디치 가문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토스카나에 7개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짐작이 가능하다. 피렌체는 도시 전체가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럼에도 정말 시간이 남아돈다면 G.F.영의 <메디치 가문 이야기>라는 책을 읽어보길 바란다. 메디치 13대에 걸친 가문의 역사를 술술 읊어두었는데 제법 술술 읽힌다. 유럽 여행을 하다 보면 메디치와 합스부르크, 이 두 가문의 흔적들이 여기저기서 발견되기 때문에 도대체 그들은 누구? 하는 호기심이 절로 끓어오른다.)
유럽을 대표하는 국가 중 하나다 보니 이탈리아가 오랜 국가인 것 같지만 실은 하나의 국가 개념으로 이탈리아라는 나라가 형성된지는 혹은 통일된지는 불과 150년도 채 되지 않았다. ‘네? 뭐라구요? 2천 년 전 로마제국은 어쩌라구요? 카이사르가 지하에서 웁니다’라고 반론하고 싶겠지만 그건 이탈리아 반도라는 ‘지역’의 일이다. 그렇게 우기면 로마제국의 영토였던 튀니지도 이탈리아 국가라고 해야 하나? 게다가 로마제국의 정통성은 프랑크왕국으로, 또 합스부르크 가문이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이름으로 가져갔는데 거기도 이탈리아?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는 제법 오래 노르만족의 국가였고. 유럽의 국가 개념, 민족 개념이란 혼란스럽기 그지없으니까 더 얘기하는 건 그만두기로 하자.
한마디로 150년 이전만 하더라도 나폴리 사람과 베네치아 사람은 ‘우리는 같은 나라 사람. 혹은 우리는 같은 민족’ 이런 동질감이 하나도 없었단 얘기다. 19세기 후반 이탈리아 통일 이전까지만 해도 각 지역에서 쓰는 이탈리아어들이 매우 달랐는데, 현재 표준 이탈리아어가 토스카나 지역의 방언을 토대로 한다. 단테, 마키아벨리, 보카치오 같은 대문호들이 토스카나 지역의 언어로 글을 남겼고 그것이 표준 이탈리아어로 자리 잡는데 상당한 기여를 했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다. 당연히 이탈리아 내에서 토스카나가 차지하는 문화적 영향력, 정치적 영향력이 실제로 가장 중요한 원인이겠지만.
p.s. 피렌체와 시에나가 언급되는 바람에 생각난 이야기.
피렌체와 시에나 사이 끼안띠 지역의 와인을 끼안티 클라시코라 부르는데, 병에 ‘검은 수탉’ 엠블럼이 붙어있다. 와인을 고르다가 검정 수탉 그림이 있으면 ‘아! 토스카나 지역 중 끼안띠의 와인이로군’하고 알은 채 하면 좋다. '끼안띠'라고만 적혀 있는 것보단 '끼안띠 클라시코'라는 글자와 함께 검은 수탉이 있으면 더 맛있는 와인이라고 생각해도 되고. 아무튼 이 검정 수탉에는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
13세기 이탈리아에는 당연히 국가 개념도 없었고 그냥 봉건영주들이 지배하는 영지, 교황령, 민주정으로 꾸려나가는 도시 등 다양한 형태의 작은 국가, 도시들이 난립하고 있었다. 그리고 영토가 명확하지 않았고. 토스카나의 대표 도시국가로서 세력이 대등하며 앙숙이었던 두 도시인 피렌체와 시에나가 영토의 경계를 정해야 할 시점이 왔다. 당연히 전쟁을 하는 것이 마땅하나 기후가 온화하고 풍요로운 땅이었던지라 마음도 풍만하였던 걸까, 특이한 방법으로 두 도시 간의 영토를 정하기로 했다. 그 방법이란, 새벽에 수탉이 꼬끼오 하고 울면 두 도시에서 서로 말을 달려 상대 도시를 향해 가다가 양쪽이 서로 만나는 지점을 경계로 하기로 한 것. 새벽에 울어줄 닭을 정하는데 피렌체는 검은 수탉으로 골랐고, 시에나는 흰 수탉으로 골랐다. 시에나는 자신의 닭에게 먹이를 많이 주고 새벽에 우렁차게 울어줄 것을 기대했고, 피렌체는 자신들의 검은 수탉을 쫄쫄 굶겼다는데, 과연 그 결과는? 배고픈 피렌체의 닭이 밥 달라고 일찍 일어나 울어대는 바람에 피렌체의 기병들이 먼저 출발을 했다. 배부른 시에나의 흰 닭은 늦잠을 잤고. 양 도시의 기병을 서로 만난 곳은 시에나에서 매우 가까운 곳. 그래서 피렌체는 시에나보다 3배나 많은 땅을 차지하게 되었고 끼안띠 지방의 대부분이 피렌체의 영토가 되었다. 그 바람에 대등한 세력이었던 두 도시 중 피렌체는 번창하게 되었고 시에나는 쇠락하게 되었으니 수탉이 두 지역의 운명을 가른 것이다. 이것이 바로 키안티 클라시코의 상징이 검은 수탉이 된 이유다.
- 피렌체(firenze)는 이탈리아어로 '꽃'(fiore)에서 이름이 유래되었다. 별명도 '꽃의 도시'(citta del fiore)다. 심지어 피렌체의 영어 이름은 플로렌스(florence <-flower)다. 이탈리아 각 도시마다 있는 두오모 성당, 그중 피렌체의 두오모 성당의 정식 명칭은 '꽃의 성모 대성당' (Santa Maria del fiore)이다. 그리고 실제로 봄에 피렌체를 방문하면 도시에 들어서는 순간 여러 꽃향기가 진동을 한다. 운전을 하고 피렌체로 들어섰다가 차 안에서 꽃내음을 맡고는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그야말로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도시이자 '꽃'의 도시인 것이다.
- 이탈리아의 각 도시에 있는 성당(까떼드랄) 중 그 지역을 상징하는 성당을 '두오모'라고 한다. (그 도시를 책임지는 총주교가 있는 성당을 두오모라고 한다는 잘못된 정보도 있다. 두오모이지만 총주교좌가 아닌 성당도 있다) 혹시 돔(dome) 구조로 된 성당을 '두오모'라고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상상을 하는 사람도 많은데 그것은 피렌체 두오모로 인해 생긴 오해다. 피렌체 두오모가 돔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밀라노 두오모만 하더라도 첨탑이 뾰족뾰족한 고딕 양식이다. 영어 dome과 이탈리아어 duomo은 아무 관련 없는 단어다. 두오모는 이탈리아어로 그냥 '성당'을 뜻한다. 뭔가 대단하고 색다른 뜻을 기대했다면 실망시켜서 미안합니다. 제가 미안해할 일인지 모르겠지만.
- 산지미냐노는 피렌체에서 차로 1시간 거리. 토스카나의 소도시 가운데 압도적인 관광객을 자랑한다. 그야말로 인산인해. 그렇지만 정작 이탈리아인들은, 특히 토스카나 사람들은 산지미냐노 따위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사람들이 몰려가는지 투덜투덜거린다. 더 좋은 곳이 많다며.
그치만, 산지미냐노에는 Dondoli 라고 하는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어서 젤라또 성애자라면 아니 갈 수가 없다. 젤라또 월드 챔피언십 1위를 -도대체 그런 행사는 누가 치르고 누가 판정하는지 미심쩍지만- 한 젤라떼리아라고 하니... 2012년과 2018년 그렇게 두 번 먹어봤는데 두 번 모두 문전성시 인산인해였다.
- 양귀비꽃은 아편의 재료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토스카나에서 (혹은 제주도에서도 자주 보입니다) 양귀비꽃을 발견한다 하더라도 이상야릇한 생각 따위는 접는 것이 좋다. 아편 만드는 양귀비꽃 품종은 따로 있어서 흔히 볼 수도 없을뿐더러 국가에 의해 관리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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