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남편이 남자친구이던 시절, 6주년을 앞둔 내 생일에 처음으로 오마카세 레스토랑을 가게 됐다. 물론 내가 예약했다. 남자친구는 식당 예약이나 서프라이즈 이벤트에는 관심이 없던 사람이다. 연애가 길어지면서 언제부턴가 우리는 서로의 생일 선물을 생략했고 기념일을 깜빡하기도 했다. 그래서 깜짝 케이크나 손 편지가 없어도 그러려니 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날은 좀 달랐다. 비싼 밥 한 끼로 때우는 게 아니라, 남자친구가 정성껏 준비한 선물이 받고 싶었다. 그래서 기대는 없지만 장난 반 진심 반으로 투덜거렸다.
"내 생일 선물은 어딨어? 나 몰래 숨겨뒀나?"
난감해하며 쩔쩔맬 거란 예상과 다르게 남자친구는 잠깐 멈칫하더니 벌떡 일어나 안방으로 향했다. 침대 밑을 한참 뒤적이더니 올리브영 쇼핑백을 내 눈앞에 들이밀었다.
'아이크림이 떨어진 걸 알고 사 온 건가? 저 오빠한테 이런 센스가 언제 생긴 거지?'
설레는 마음으로 쇼핑백을 연 나는 입을 떡 벌린 채 남자친구를 쳐다봤다. 안에는 반지 상자가 들어있었고 남자친구는 "니꺼다."라고 했다.
반지 케이스에는 기본 문구인 "Marry Me"가 인쇄되어 있었고, 반지는 영화에서 몇 번 본 것 같은 디자인이었다. 당황스러웠지만 이게 청혼인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하지만 정신을 빨리 차려야 했다. 청혼을 "니꺼다."라는 한마디로 끝낼 순 없었으니까. 최소한 "결혼할래?"라고 물어야 내가 "응"이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다른 할 말은 없는지, 결혼하자는 게 맞는지 재차 물었으나 남자친구는 얼굴을 붉히며 상자에 적혀있지 않냐며 얼버무렸다.
청혼 멘트는 일단 뒤로 하고,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반지를 구경했다. 결혼하자는 말은 안 했지만 어쨌든 이 남자가 날 위해 사온 반지가 아닌가. 작고 반짝이는 보석 앞에서 남자친구는 영웅이 되었다. 몰래 반지를 사놓고, 들키지 않게 올리브영 쇼핑백으로 위장을 해서는, 내가 절대 청소하지 않을 곳에 숨겨두었다는 얘기는 영웅담이 되었다. 환불이 절대 안 된다고 해서 매장 문 앞을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했고, 반지가 침대 밑에 있은 지 이미 2주가 넘었으며, 원래 그날 주려던 건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사실은 편지도 썼다고 했다. 핸드폰 메모장에 저장된 편지는 '우리가 만나지 벌써 6년이 다 되어간다'는 말로 시작했다. 초등학생이 어버이날에 쓴 편지처럼 귀여웠고, 오랜만에 보는 낯간지러운 말 때문에 읽는 나도 쑥스러워졌다. 다만 그 메모는 내가 얼마나 좋은지, 언제 예뻐 보이는지, 왜 결혼하고 싶은지를 담지 못하고 중간에서 멈췄다. 남자친구는 너무 쑥스럽기도 하고 뭐라고 써야 할지 몰라서 완성을 못 했다고 했다. 하지만 진정성이 넘치는 건 내가 꼭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가 평소에 쓰는 글이라고는 이메일뿐이었는데 요즘에는 그마저 AI가 대신 써준다. 프러포즈 편지도 검색 몇 번이면 그럴싸한 문장을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청혼하는 사람의 마음이야 비슷할 테니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어떤 문구를 썼어도 남자친구의 마음을 대변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을 거다. 하지만 남자친구는 청혼만큼은 꼭 자기 말로 하고 싶었다고 한다.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 반쪽짜리 편지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미완성이라도 고민해서 직접 쓴 문장이지 않은가. 어설프더라도, 그 쓰다 만 편지는 내 남자친구만이 쓸 수 있는 특별한 고백이었다. 인터넷에서 찾은 수려한 문장으로 청혼했다면 나는 바로 알아챘을 것이다. 그리고 청혼할 때 커닝했다며 평생 놀렸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