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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계사 부부의 12월

by 김호누

감사본부에서 내가 비지 시즌을 내는 걸 봐온 친구, 가족들은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요즘 연말이라 많이 바쁘지?" 라며 걱정 섞인 안부를 물어온다. 각기 다른 분야에서 일하면서도 내가 겨울마다 바쁘다는 걸 기억해 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내가 겨울이면 약속도 안 잡고 연락을 하더라도 바쁘다, 힘들다는 얘기만 늘어놓으니 알아달라고 광고한 꼴인 것 같기도 하다.


단골 미용실 선생님도 이번 12월 초에 가게에 갔을 때 "이제 한 동안 못 오시겠네요"라며 아는 체 하셨다. 미용실 선생님은 내가 연말정산 때문에 바쁘다고 알고 있다. 연말정산이 아니라 기말감사라고 몇 번 설명드린 적은 있지만, 재미없는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는 것보다는 그냥 연말정산이라고 알고 계셔도 아주 틀린 건 아닌 것 같아서 설명을 그만두었다.


그런데 사실 12월에는 그렇게까지 바쁘지 않다. 오히려 크리스마스 연휴에 여행을 가기도 하면서 마지막으로 숨을 돌릴 수 있는 시기다. 나는 몇 년 전에 빅펌에서 로컬 법인으로 이직한 후, 특히 올해는 업계가 더욱 불황인 덕에(?) 여유로운 연말을 보내고 있다. 이번 12월엔 딱 이틀, 9일과 10일에만 고객사에 출근했다. 나머지 시간은 가끔 메일에 답장하고 전화를 받으며 집사람답게 집을 잘 지켰다.


아직 빅펌에 다니고 있는 입사 동기인 남편은 이런 나를 보며 '꿀 빨아서 좋겠다'라고 깐족댈 때가 있다. 꿀이라니! 나도 할 일을 제때 하는 성실한 일꾼이라고 발끈하긴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인정할 수밖에 없다. 다른 로컬 회계사에 비해서도 일이 적은 편이고 공식적인 일이 없으면 출근을 안 해도 아무도 날 찾지 않으니, 꿀 맞는 것 같다.




나는 로컬에서도 "반개업"이라고, 원하는 연봉만큼만 약속된 일을 하고 나머지는 알아서 영업한 일감으로 돈을 벌면 되는 구조로 입사했다. 내가 영업왕이어서 스스로 따온 일감이 많았으면 평소에도 더 바빴을 수도 있겠지만, 영업은 포기한 지라 가끔 다른 회계사님께 하청을 받을 때만 잠시 바빠지는 편이다.


그 와중에 일도 빅펌에 비해 더 "융통성 있게" 일하다 보니 남편이 날 베짱이 취급해도 할 말 없다. 로컬은 빅펌처럼 체계적으로 관리되지는 않지만, 대신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아 훨씬 효율적으로 업무를 진행할 수 있다. 처음 이직했을 땐 이런 방식이 낯설고 '이렇게 해도 되나?' 불안하기도 했지만, 로컬 3년 차인 지금의 나는 융통성을 아주 잘 발휘할 줄 알게 되었다.


반면에 빅펌은 매년 모든 절차가 체계화되면서 '이렇게까지 해야 한다고?'라는 생각이 들 만큼 문서를 작성해야 할 때가 있다. 아마 남편도 이런 문서를 쓰느라 야근을 하는 것 같다. 내가 다닐 적만 해도 12월에는 매일 야근을 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요즘 남편은 저녁을 먹고 나서도, 주말에도 노트북을 계속 켠다. 분명 같은 업계에 있고 연봉이 두 배씩 차이 나는 것도 아닌데, 남편은 금요일 밤 10시에도 야식을 먹다가 전무님 전화를 받으러 방에 들어간다.


남편에 비해 내가 일이 없는 거처럼 보이지만, 아무리 로컬이어도 시즌은 시즌이다. 1년 치 밥벌이를 할 수 있는 성수기인지라 1월 초부터 4월 초까지 꽉 채워서 달린다. 이제 12월도 끝나가니까 정말 마지막 휴식이 될 수도 있겠다. 언제 다시 미용실에 갈 수 있을지 모르니 이번에 한동안 손질할 필요 없게 머리를 좀 다듬으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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