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은영 장편소설
백 년의 시간을 감싸안으며 이어지는 사랑과 숨의 기록
나는 기쁨의 산마루, 희령으로 왔어요. 이곳은 그옛날 나의 엄마와 그 엄마의 엄마가 함께 있었던 추억의 장소입니다. 다시 돌아가지 못할 불귀의 땅이었지만 지상에서 벌어진 이혼의 상처를 땅 위에서 치유할 수 없어 먼 천상의 별빛 속에서 위무 받고자 천문대가 있는 이곳 희령으로 왔어요.
길고 날카로운 창으로 찌르는 엄마의 잔소리를 피해 이곳으로 왔지만 아직도 귓가를 맴도는 엄마의 말이 나를 괴롭히고 있어요.
아무리 허접한 남자라도 울타리는 되는거야. 때리지 않고 도박 안 하고 바람만 안 피워도 상급이라는 말.
나는 엄마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저 참고 견디는 것이 여자의 인생일까요? 남자에게 사랑받고 존중받지 못하더라도 허수아비같은 남편을 옆구리에 끼고 평생 살아야할까요? 남자의 외도가 어떻게 여자의 잘못이란 말인가요? 나는 남자 없이도 잘살수 있다는 것을 엄마에게 보여 주고 싶었어요.
아직도 이혼 자체가 여자에게 주홍글씨인 세상. 기괴한 색안경으로 이혼한 여성을 바라보며 혐오와 편견의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현실은 조선 5백년 차별의 역사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저는 정말 혼자의 힘으로 살아갈 자신이 있습니다. 이곳 기쁨의 산마루, 희령에서 말이죠. 다시 날아오르는 기쁨. 생을 다시 창조하는 환희를 느끼고 싶었어요.
그러다가 희령의 낡은 아파트에서 우연히 친할머니를 만났죠. 우리 엄마의 엄마. 내가 엄마와 불화이듯이 엄마와 할머니도 불화였습니다. 무엇이 원인이었을까요? 엄마와 같은 굴종의 삶을 살지 않겠다는 딸들의 단호한 의지가 원인이었을까요? 그런데 어떻게 여자가 여자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요?
그저 착하게 살아라, 말 곱게 해라, 울지 마라, 말 대답하지 마라, 싸우지 마라 등
그동안 차별을 받고 살아온 여자들이 이렇게 말을 해도 되는 것인가요?
하지만 엄마의 어머니인 할머니는 달랐어요. 내게 그 어떤 강요나 책망도 없었어요. 할머니는 처음부터 나를 알아봤지만 애써 자신의 치마품 속으로 안으려 하지 않았죠. 오히려 천천히 자신에게 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할머니의 이야기가 시작되었죠. 그것은 우리의 엄마들이 한 생애의 모든 것을 걸고 관통해온 고통의 기록들이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에서 6.25 전쟁까지 혼돈과 광란의 역사 속에서 질경이 같은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온 우리 어머니들의 이야기 그 어떤 서사보다 감동스럽고 위대했습니다.
희령에 사는 할머니의 엄마는 백정의 딸이었습니다. 이 나라에서 여자로 태어난 것도 죄인데 백정의 딸이라니. 정말 하늘을 원망하고 싶은 얄궂은 운명이었을 것입니다. 고름에 달린 검은 천은 온갖 고난과 박해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차별의 과녁이었죠.
하지만 비록 백정의 딸이었지만 남들의 시선에 주눅들지 않았고 비굴하지도 않았습니다. 밑바닥의 삶이란 더 이상 잃을 것 없는 맨손 인생이잖아요. 그녀는 남들에게 그 어떤 연민과 동정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한 남자를 만났답니다. 할머니의 엄마가 이 남자를 만나지 않았다면 저란 존재는 이 지상에 존재할 수 없었겠죠.
이 철길은 몇 리나 이어지는 기라요?
이 짧은 질문이 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할머니의 아버지는 집안의 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백정의 딸을 자신의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그 당시 사회의 통념을 깨뜨린 배경에는 동학이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느님 아래에 모두 평등하며 어느 누구도 더 존귀하거나 비천하게 태어나지 않았다고 하는 평등사상이 천민의 딸을 품게 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의 아버지는 할머니의 엄마가 안고 있는 고통을 이해하지 못했고 도리어 자신의 행복이 천한 출신의 여자로 인해 망가졌다고 생각합니다. 동학을 하늘 높이 머리에 이고 있을 뿐 땅 위에서는 씨알을 뿌리지 못하는 나약한 남자에 불과했습니다.
심지어 할머니의 아버지는 이미 북한에서 한 번 결혼한 적이 있는 남자에게 할머니를 시집보내고 맙니다. 딸의 행복, 여자의 행복에 대한 관심이 없었던 할머니의 아버지. 할머니와 할머니의 어머니는 용서할 수 없었죠.
당신이 기러고도 안간이시까? 해도해도 너무하디.
오랫동안 억눌려왔던 설움과 억울함이 일시에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할머니의 저주 섞인 독설은 결국 아버지의 죽음을 불러 왔습니다. 평생 처음으로 지아비에게 말대꾸를 했던 할머니의 어머니.
내가 알고 있던 남자들이란 하나같이 자기 중심적이었으며 여자를 존중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든 지출을 아내의 돈으로 하는 사람. 가장 좋은 자리에서 잠을 잤고 어떤 것도 딸에게도 양보하지 않았던 남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한 위로는 새비 아주머니 가족이었습니다. 새비 아주머니와 할머니의 어머니, 희자와 할머니와의 깊은 정은 가족 이상의 그 무엇이었습니다.
새비 아주머니는 세상 어느 누구로부터 환대받지 못하는 백정의 딸을 친구로 받아 주었고 죽는 날까지 우정과 사랑을 나눈 절대적인 인물입니다. 육이오 전쟁의 대혼란과 참담함 속에서 서로를 걱정하고 위로하는 두 사람의 관계는 극한 상황에 몰린 인간들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윤리적 가치였습니다.
새비 아주머니는 우리 할머니의 어머니에게 네 동무 삼천이는 죽지 않으려구 평생을 사는 길만 찾았다. 흙이랑 먼지만 먹고 사는 벌레처럼 살았다며 할머니의 어머니에게 허느끼는 장면은 제 마음을 슬프게 했습니다.
나는 개성에서 서울, 서울에서 대구까지. 이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두 분의 지극한 관계는 세비 아주머니의 딸 희자와 할머니가 이어 받으며 고단한 현실을 극복해 나갑니다.
나의 할머니와 희자가 주고 받은 낡은 편지를 읽고 있으면 남편 없이 세상풍파를 헤쳐 나온 할머니의 인생역정과 홀어머니 밑에서 공부하며 먼 미래를 꿈꾸던 희자의 열망도 느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서로의 처지를 걱정하며 위로와 용기를 주고 받는 두 여자의 우정은 빛나는 연대의 표상입니다. 할머니는 희자와의 관계에서 다소 자격지심을 느끼곤 했습니다.
배움을 너무 쉽게 포기했다는 것. 아무것도 꿈꿔보지 않았다는 것. 일이든 사람이든 무언가를 위해서 단 한 번도 노력한 적이 없었다는 것 등이 항상 자신을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희자의 어머니 새비 아주머니는 항상 큰 공부해야한다. 멀리멀리 가야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저는 이 말이 여성의 자립적이며 주체적인 삶을 고양시키는 잠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할머니의 어머니. 그리고 할머니. 또 그리고 나의 어머니. 평생동안 여자로 태어난 원죄에서 속박 당한 채 굴종과 멸시, 차별 속에서 살아야 했던 나의 어머니들.
나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것은 우리 여자들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4대에 걸친 여성들의 서사는 아주 어두운 밤이었지만 그것은 환한 밝음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