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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tagamma Sep 19. 2023

지팡이 든 남자

1


    키가 큰 남성을 유독 두려워했다. 가나다- 한글을 떼기 전에도 키가 큰 남자를 보면 울음을 터뜨렸고 대학을 가서 연애 대상을 탐색할 때에도 키는 중요한 조건이었다. 새로운 남자친구를 친구들에게 소개할 때마다 키 큰 남자는 만날 생각이 없냐는 볼멘소리를 듣곤 했다. 딱히 명확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키가 큰 남성에게서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고 그 본능적 감각에 충실했던 것뿐이다.


    이 얘기를 한 이유는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내 일생일대의 가장 극적이면서도 위험한, 아니, 죽을 만큼 두려운 순간이라는 걸 전하기 위함이다. 야근을 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향하던 중, 평소처럼 지나던 골목길에서 키가 전봇대만큼 큰 남성이 내 앞을 가로막은 게 불과 초 전의 일이다. 이 동네에서 4년을 살았지만 이런 남자는 본 적이 없었다. 전봇대는 과장이지만 멀대 같이 큰 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 와중에도 남들보다 하얗다는 건 알 수 있을 정도로 허여멀건 피부도 눈에 띄었지만 무엇보다 눈에 들어온 건 그의 오른손에 이상하게 들린 하얀 지팡이였다.


    그의 키만큼이나 기다란 지팡이. 그리고 그 지팡이가 일반적으로 땅을 딛고 있는 형태가 아니라 공중을 향해 거꾸로 들려있었다. 이건 그동안 키 큰 남자에게서 느껴온 맹목적인 공포와는 또 다른 차원의 공포였다. 눈앞의 남자가 어떤 부류의 인간인지 전혀 종잡을 수 없다는 데에서 오는 두려움, 27년 동안 살아온 경험치로는 이 남자를 내가 아는 부류로 카테고라이징 할 수 없을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단순히 키 큰 남자에 대한 두려움과는 다른 종류의 두려움이었다. 그래, 이질적인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생존에 대한 공포였다.

    "비가 많이 오는데 우산 필요하지 않아요?"

    별이 보일 정도로 맑은 하늘 아래서 그는 지팡이를 우산처럼 든 채로 허공에서 까딱거리며 말했다. 저걸 우산이라고 생각하고 저러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더욱 섬뜩했다. 심장박동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빨라졌고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야만 한다는 생각만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빠르게 발을 놀리며 도망쳤다. 지금 뛰어가는 방향이 집인지 버스정류장인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그 미친 남자에게서 빨리 벗어나는 것, 내 머리로는 도무지 어떤 인간이라고 분류할 수 없는 정체불명의 작자를 눈앞에서 치워버리는 것만이 중요했다.

    "그래, 그냥 어디 좀 아픈 사람일 거야. 조현병 환자가 요새 많다는데 그런 걸 거야."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도 뛰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얼마나 뛰었을까. 인파가 좀 있는 대로변 도착해서야 뜀박질을 멈출 수 있었다. 거의 넘어지듯 길 한가운데에 쓰러지며 숨을 몰아쉬었다. 지나가던 몇몇이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봤지만 이내 흥미가 떨어졌는지 제 갈 길을 갔다.


    심장박동이 천천히 제 자리를 찾으며 조금 정신이 들 때쯤, 후드득 소리와 함께 세찬 빗줄기가 쏟아졌다. 마치 지상에 어떤 원한이라도 있는 듯 바닥에 구멍이라도 낼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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