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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iden Oct 23. 2023

마음이 죽은 사람들의 증상


  남자는 길을 걷다가 마주치는 모든 장면들을 조금도 놓치지 않았다. 갈색 동공에 담긴 온갖 형태와 색깔, 코 끝을 스치는 알 수 없는 냄새들, 간간이 들려오는 누군가가 중얼거리는 소리. 그 어느 것도 놓치지 않기 위해 온몸의 감각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상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의 미간이 살짝 찌푸러졌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느껴졌던 생생한 감각들이 전부 사라져 버린 것만 같았다. 이럴 리가 없는데-라는 말과 함께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지나치는 사람들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수많은 얼굴들이 남자를 지나친다.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는 아이들, 한 손엔 커피를, 다른 한 손엔 노트북 가방을 든 청년, 횡단보도 앞에 서서 전화를 하는 중년의 여성.


  미소 짓는 듯한 입가의 곡선, 짜증이 난 듯 잔뜩 치켜 올라간 눈썹이 그들의 얼굴에 표정이라는 걸 만들고 있었지만, 그들 모두 눈동자에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얼굴에 드러난 표정이 그들이 느끼는 감정을 표출하는 번역기 역할을 하고 있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눈이 텅 비어 있었다.

  "안경이 잘못 됐나."

  남자는 쓰고 있던 안경을 검지로 살짝 내렸다가 다시 올리기를 반복했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여전히 그들의 눈동자에선 그 어떤 색깔도 찾아볼 수 없었고,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선 어떤 냄새도 맡을 수 없었다. 원래 같았더라면 그들의 눈동자는 다른 누구와도 겹치지 않는 각자만의 고유한 색으로 빛나야 했고, 조금씩 다른 냄새로 자신을 드러내야 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다들 마음이 죽었어요."

  인기척도 없이 다가온 여자가 무심하게 툭- 내뱉은 말에 남자는 그녀를 한 번 쳐다봤다가 이내 쯧- 소리와 함께 눈길을 거뒀다. 무슨 말이냐고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충분히 어떤 상황인지 이미 남자는 알고 있었다. 사실 아주 오래전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다만, 이리도 빨리 색과 향이 흐릿해질 거라곤 예하지 못했다.

  충분히 대비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던 것이다. 마음이 죽은 사람들의 대표적인 증상은 눈동자와 체취에서 가장 먼저 나타난다. 첫 번째, 눈동자의 색을 잃고 그 너머가 텅 비어버린다. 그다음은 냄새를 잃어버린다. 그러다가 증상이 악화되어 감정을 표출하는 번역기가 고장 나면 표정마저 잃게 된다.


  "이미 늦었어요. 아무리 해봐도 소용없다는 것 알잖아요. 이제 포기해요. 우리라도 살아남아야죠. 저런 껍데기가 되지 않으려면."

  남자는 여자의 말을 뒤로한 채 길 한가운데에서 기타를 꺼내 들었다. 곧이어 기타 선율이 길거리에 울려 퍼졌다. 이곳에 색깔과 향기가 조금이나마 남아있을 것이란 일말의 희망을 품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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