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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tagamma Nov 07. 2023

환상적 리얼리티


  현실에도 판타지가 있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만약 그렇다면, 일상에서 마주하는 크고 작은 고통들을 참고 견딜 힘을 얻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현실엔 "그래서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답니다."와 같은 동화도, 위기에 처 때마다 마법처럼 나타나 자신을 구해줄 왕자님도, 시간을 돌려 과거로 돌아가는 따위의 판타지도 없다는 걸.


  그녀의 아버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가족 누구도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막대한 빚이 그의 죽음을 끝으로 수면 위로 떠오르자 슬픔도 잠시, 분노가 일었다. 빚더미를 자식들에게 내던지고 무책임하게 생을 향해 끝을 선언한 아버지를 증오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돈을 갚으라며 문을 두들기는 채권자들. 그리고 그들 사이 아버지 친한 친구들의 낯익은 얼굴들도 중간중간 끼어있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여성에 너무도 거친 욕설이 난무했지만, 정작 거기에 익숙해진 그녀는 어느 순간 그들의 분노 섞인 목소리가 마치 노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목소리가 하나로 합쳐지며 일종의 멜로디를 만들어냈다. 분노와 혐오, 경멸이 가득 담긴 거친 음성들이 아름다운 하모니로 들리기 시작한 게 그녀 스스로도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하나뿐인 남동생에게 달려가 노랫소리가 들린다며 들떠하곤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집은 천장부터 시작해 벽까지 모두 새하얗게 변해버렸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아저씨들도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누나는 여전히 그들의 노랫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누나는 "판타지는 있었어!"라며 가끔씩 외다. 처음엔 이해되지 않았지만 머지않아 그 노랫소리가 내 귀에도 들리기 시작하자 비로소 그 말이 이해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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