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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rra May 20. 2024

커리어가 꼬였다고 생각할 때

현재는 스타트업에서 PR과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하고 있지만, 처음 제 시작은 방송이었습니다.

아나운서 지망생 과정에서의 좌절과 험난함은 일단 차치하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마음과 의도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시간이었어요. 수업이나 의상, 메이크업 등 비용도 만만치 않고 바늘구멍 같은 합격과정에서  하나, 둘 씩 포기하거나 로스쿨, 은행 등 다른 진로를 택하게 된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끝까지 하면  ‘내가 원하는' 결과가 당연하다 느꼈던 당시에는 그들을 안타까워하며 포기하지 않았는데요.

당시 아카데미에서는 작은 방송국의 리포터 일 혹은 글을 잘 쓰는 몇몇을 신문사와 연계해 인턴으로 일할 기회가 주어졌는데요. 그렇게 6개월을 국민일보에서 인턴으로 일하며 정신없이 기사를 쳐내는 선배들 속에서 발제의 압박을 느끼며 기사 작성을 몸으로 익히게 되었고요.

종편이란 개념이 없던 시절 한국경제 tv나 매일경제 증권시황, 사내방송의 리포터와 국가 홍보물 촬영 등을 하며 경인방송에 소속돼 방송에 입봉하게 됩니다. 새벽 교통방송과 주말 해양뉴스를 진행하다 눈에 띄어 저녁에 ‘에이트'라는 가수와 함께 심야방송 진행을 맡기도 했죠.

잠실에서 인천까지 새벽 5시 30분에 출발하는 일을 1년이 넘게 하면서, 그 어려운 과정 속에 방송에 입봉했는데 전혀 미래가 보이지 않더군요. 수요보다 공급이 훨씬 많은 시장이었습니다.

커리어가 쌓이면 오히려 입지가 좁아지는 기형적인 직군, 나 아니어도 하겠다는 사람은 너무도 많은, 궁극적으로는 이 산업은 자본이 모이지 않는, 성장하는 시장이 아니란 결론이 나더군요.  그렇게 20대를 불태웠던 방송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접고 일반 기업으로의 취직을 시도하게 되었어요.

그렇게, 시작은 창대했지만 그 끝은 미미했고
일반적이지는 않은 경력으로 기업으로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돌아보면 몇 가지 깨닫는 것이 있어요.

1. 세상에 쓸데없는 경력은 없다.
돌아보니 지금의 10년은 앞으로의 10년을 준비하는 시간이고, 20대는 사회에서의 틀을 다지는 시간이었는데요. 당시엔 3,4년의 시간을 낭비했다는 자책이 들더군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오랜 시간을 들여 연습하고 준비했던 것들이 지금의 핵심 역량이 되어 저를 차별화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어요.

기본적으로 방송을 잘하는 것의 기반은 전달력, 문장력, 대중의 심리파악인데요. 편집국으로부터 전달받은 뉴스원고는 말로 전달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부분이 많아 수정을 하게 됩니다. 프로그램이나 인터뷰, 리포팅은 원고를 직접 써야 하고 때로는 길거리에서 카메라 앞에 얼어붙은 대중들의 인터뷰도 하게 됩니다.

초보시절 교통시황을 할 때 사람들은 출퇴근길 상습 정체 구간에 질려 있었는데요. 당시 국장님의 지시는 ‘(어차피 그게 그거니) 마음대로 해봐라' 였고요. 만우절날, ‘모든 대로가 다 뻥 뚫렸으니 제 목소리 들으며 기분 좋은 하루 되시라’는 ‘거짓말'로 멘트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멘트가 ‘먹힐 수 있다’는 대중에 대한 판단이 유효했습니다. 지방의 작은 방송사에서 팬덤이 생기기도 했고요.

‘대중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앵글로 우리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소위 먹히는 프레임으로 판을 짜는 것’은 방송의 핵심이기도 하고 기사의 핵심이기도 하고 PR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사실 문서작성과 피티, 핵심 요약 등은 회사생활에서 빠르게 두각을 드러낼 수 있었던 기본기기도 하고요. 전  이걸 정말 돈을 주고 혹은 돈을 받고 오랜 시간 트레이닝을 해왔던 거더라고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아무 쓸데없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하는 일은 최선을 다하세요. 그리고 다른 길을 모색해 보세요. 일과 일은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어 당신의 기본 역량에 그 쓸데없다 느끼는 일을 하며 익히게 되는 것들이 더해져 핵심역량의 바탕이 될 수 있을 겁니다.

2. 정말 하고 싶은 일은 해봐야 한다.
청년시절의 저는 재미와 의미 추구형이었어요. 내가 재미있고 하고 싶은 일이어야 하는 타입이었지만 가오(?)는 중요해서 시험 성적은 늘 좋은 편이었고 목표를 정하면 이루는 편이었기 때문에, 당시 동기들처럼 방송국이 아닌 의전원이나 로스쿨을 갔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가 있었죠.

그런데 아마, 제가 아나운서가 되지 않았다면 평생의 후회로 남았을 거예요. 방송 자체는 천직이라 느낄 만큼 잘했고 열심히 했고 즐거웠어요. 인터뷰도 타인의 얘기를 끄집어내 듣는 것이 의미 있고 짜릿했습니다. 할 만큼 했고 해 봤기 때문에 더 이상의 미련이 없을 뿐, 정말 해보고 싶은 일이나 도전하고 싶은 꿈이 있다면 꼭 이 일에 도전을 해봐야 한다 생각해요. 설령 실패한다 해도 죽기 전에 해서 후회한 것보다 하지 않아서 후회하는 것들이 훨씬 더 많고 깊을 테니까요.

3. 데드라인을 정해놓자.
언론사 시험준비를 할 때 먼저 방송에 입봉했던 선배 한 명이 그랬는데요. ‘데드라인을 정해 놓고 그 기간을 넘기면 미련 없이 관둬라'였어요. 제가 하지 못했던 부분인데요. 심지어 저는 언시생을 관둬야 하는 시점 즈음 방송을 시작하게 되어 다른 버퍼가 전혀 없었어요. 즉, 실패했을 때 플랜 B가 전혀 없었던 거죠.

진짜 너무 하고 싶은 일, 되고 싶은 것이 있다면 해 봐야 한다고 했지만 될 때까지 하겠다는 과거의 저 같은 방식은 너무 무모하다고 생각해요. 운이 좋아, 혹은 무언가의 역량이 눈에 띄어 시기를 놓쳐도 또 뚫고 나갈 수도 있지만 확률은 매우 낮기 때문에 될 때까지 올인을 하는 방식을 추천하진 않아요.

혹여나 실패를 해도 백업이 가능한 시기까지, 그렇지만 어느 정도의 충분한 시도는 해봤다는 기간을 설정해 놓고 그 기간까지 되지 않는다면 플랜 B로 갈 수 있는 과감함도 필요합니다.

*사진은 방송 끝무렵의 제 모습이에요. 과한 헤어와 메이크업, 느끼한 의상은 시대 흐름이었던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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