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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트루 Oct 29. 2021

영화 리뷰 - <블랙 위도우(2021)>

나타샤를 모욕하고, 마블 팬들을 조롱한 영화



여는 글



여느 때보다 강한 소제목으로, 영화 <블랙 위도우>를 비판하며 글을 시작하고 싶다.


<블랙 위도우>를 본 이후, 필자는 여태껏 해갈되지 않는 찝찝함 비슷한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 영화가 필자의 기대에 전혀 미치지 못한 처참한 퀄리티의 영상물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 기저에 깔린 매우 사악한 의도에 비해서는 너무나도 좋은 평가를 받고 넘어가 버린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 도무지 가시지를 않았기 때문에. 비록 대놓고 비판하기에는 모호한 경계선에 걸쳐있는, 그 기묘한 느낌에 많은 분들이 이 영화에 '애매하다'는 평가를 하는 데에 그치셨으리라 생각하지만, 나 또한 그렇게 이 영화를 묻어버리기엔 이 영화의 문제들이 그리 가볍지가 못하다 생각하기에, 시간이 꽤나 많이 지났음에도 이렇게 굳이 긁어 부스럼을 내보려 한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굉장한 책임감을 가지고 만들었어야 할 영화, 블랙 위도우


본격적으로 이 영화를 때리기 전에 애써 심심한 위로의 말을 굳이 해주자면, 블랙 위도우라는 캐릭터가 굉장히 다루기 어려운 소재였다는 것이다.


1) 우선 블랙 위도우라는 캐릭터가 이미 <엔드 게임>에서 사망했기에, 어떤 사건을 가지고 이 영화를 만들어야 할지, 어떤 방향으로 이 캐릭터를 만들어 나가야 할지가 상당히 애매해졌고,

2) 다른 히어로들은 이미 솔로 무비를 대부분 찍은 데다가 개중에는 <윈터 솔져>, <시빌 워> 같은 뛰어난 작품성을 지닌 영화들도 있었기 때문에 후발주자로서의 부담감 또한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 영화가 상당히 많은 역할을 해줘야 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연출을 맡을 감독이 느낄 부담감은 상당히 컸을 것이다. 크게 세 가지 정도라 생각하는데,


1) 나타샤 로마노프의 솔로 무비
-> 그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할 역할. 나타샤의 과거를 전체적으로 조명하면서 그녀가 어떤 과정 속에서 '블랙 위도우'로 거듭날 수 있었는지 보여주고, 그녀의 매력을 극대화시켜 관객들이 다시 한번 그녀에게 열광하게끔 만드는 것이 첫 번째.

2) '새로운 세대의 등장'
-> 새로운 영웅들이 등장해 그녀의 빈자리를 메꿀 것을 예고하며 관객들에게 기대를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역할이 두 번째. '매력 발산 타임'이 적어도 한 번 이상은 있어야 할 것이며, 이를 통해 관객들에게 제대로 된 후계자로서 눈도장을 찍어야 할 것이다.

3) '페이즈 3과 페이즈 4의 연결고리'
-> <엔드 게임>이 피날레를 장식하긴 했지만, 페이즈 3를 닫는 '작은 마무리'로서의 역할도 해줘야 한다. 이번 영화의 사건들로 인해 앞으로 어떤 식으로 페이즈 4의 스토리들이 이어질 것인지에 대한 기대감을 주는 것이 마지막이어야 할 것이다.


이렇듯, 만들기 어렵고 까다로운 데다가 해줘야 할 역할 또한 많은 작품인 관계로, 마블은 양 어깨에 한 가득 책임감을 얹고서, 이번 영화를 특별히 더 공을 들여 제작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마블은 시작부터 큰 실수를 저지르고야 말았다.



마블의 '신인 감독 기용 전략', 이 영화에서만큼은 하지 말았어야


마블은 본디 유명 감독을 기용하기보다는 경력이 전무한 신인 감독들을 기용해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애초에 든든한 원작인 '마블 코믹스'를 보유하고 있는 만큼 누구든지 이 원석을 잘 깎아 구성하기만 해도 어느 정도의 퀄리티는 보장이 될뿐더러, 다른 영화사들에 비해 수뇌부의 의견이 개입이 많이 되는 마블 영화의 특성상 그에 반하지 않고 적극 반영해 줄, 이른바 '말 잘 듣는 감독'을 선호하는 마블의 조직적 특성 때문일 것이다(많이들 아시겠지만 옆동네 격인 DC의 경우 그 정도가 너무 심해 홍역을 치른 바 있는 만큼, 마블 역시 그런 부분에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예측해본다). 또한 중요 캐릭터들의 경우 천문학적인 개런티를 자랑하는 만큼 유명 감독을 쓰기엔 지출 부담이 있는 점도 있을 테고.


마블은 이러한 이유에서 이번 <블랙 위도우>에서도 경력이 전무하다시피 한 케이트 쇼트랜드 감독을 기용하며 자신들의 전략을 고수한 듯한데, 이는 현재까지 마블이 저지른 최악의 판단 중 하나가 되고야 말았다. 블랙 위도우가 '상당히 까다로운 소재'인 만큼, 마블을 잘 알고, 영화를 잘 만드는 감독에게 의뢰하는 것이 좋은 선택이 아니었나 생각하는데, 마블은 이에 대한 제대로 된 고찰 없이 초짜 감독에게 너무나 큰 짐을 지웠고, 그 결과 영화 <블랙 위도우>는 지금까지 MCU에서 나온 영화들 중에서는 물론, 히어로 액션 블록버스터 영화들 가운데서도 손꼽힐 만큼 조악한 만듦새는 물론, 빈약하고 사악한 주제의식을 가진 '기준치 미달의 영화'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신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져>를 시작으로 <시빌 워>, <인피니티 워>, <엔드 게임>까지 연타석 홈런을 쳐낸 루소 형제의 저력이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지금부터 필자는 이 초짜 감독과, 그녀를 앞세운 마블이 대체 이 영화에, 그리고 블랙 위도우라는 캐릭터에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서, <아이언맨 1(2008)>부터 마블 영화를 단 한 편도 빼놓지 않고 봐 온 팬으로서 느낀 분노를 담아 말씀드리고자 한다. 글이 굉장히 길어지겠지만 이 점 양해 부탁드린다.








※이어지는 글에는 영화 <블랙 위도우>와 <어벤져스 - 엔드 게임>의 강력 스포일러가 담겨있습니다. 불편하신 분께서는 영화를 본 이후 방문해주셔도 괜찮습니다.








1. 애초에 블랙 위도우는 이 영화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필자가 이 영화에서 가장 분노한 포인트는, 이 영화의 주인공인 블랙 위도우가 '멋도, 무게감도 사라진 반 쪽짜리 주인공'이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다른 멤버들이 세 편씩 솔로 무비를 찍어댈 동안 조연 자리에 머물며 온갖 노고를 자처했고, 기어이 <엔드 게임>에서는 숭고한 희생을 하고 떠난 그녀를 위해서라도, 필자는 이번 영화가 온전히 그녀를 띄워주고, 최대한의 예우를 갖추며 그녀를 보내주는 방향으로 만들어졌어야 한다 생각했는데, 하지만 마블과 디즈니는 이런 팬들의 염원 따위는 뒤로 한 채 계산기를 두드리며 그녀의 손익가치를 따졌고, 그 결과 그녀의 '처음이자 마지막 솔로 무비'를 마블의 차기작을 위한 교두보이자, '그릇되고 뒤틀린 사상'을 선전하는 도구로서 이용했다.




증거 #1. 이 영화는 '나타샤 로마노프'를 조명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제대로 된 영화도 아니지만, '제대로 된 블랙 위도우 솔로 무비'라고도 볼 수도 없다. 블랙 위도우의 기반이 되는 '나타샤 로마노프'라는 캐릭터에 대한 조명을 거의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지 출처 : 다음 영화

스티브 로저스가 있기에 캡틴 아메리카가 있는 것


캡틴 아메리카의 첫 솔로 무비인 <퍼스트 어벤져>는 만듦새가 그다지 좋지 못하다는 평을 듣기는 했지만 참 잘한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스티브 로저스'라는 인물에 대해 충분히, 또 제대로 조명했다는 것.


남들에 비해 허약하게 태어났지만 강한 정신력과 숭고한 의지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스티브 로저스라는 인물에 대해 굳이 긴 시간을 들여가며 관객들에게 보여준 덕분에 관객들은 그가 왜 캡틴 아메리카가 될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왜 그래야만 하는지 충분히 이해하고 그에게 온전히 몰입할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영화 내내, 심지어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이렇게 탄탄한 캐릭터를 기반으로 캡틴 아메리카는 <윈터 솔져>와 <시빌 워> 같은 명작을 연이어 터트리기 시작했고, 결국 아이언맨과 함께 MCU 최고 인기 캐릭터가 될 수 있었다(캡틴 아메리카의 최고 명대사인 "I can do this all day" 역시 <퍼스트 어벤져>에서 만들어진 것을 생각해보면, 공을 들여 캐릭터의 기반을 만드는 것이 얼마나 캐릭터를 탄탄하게 만들어주는지 잘 알 수 있다). 물론 원작에서 캐릭터가 가지고 있었던 인기나, 크리스 에반스라는 배우의 매력 등 여러 가지가 맞물리기는 했지만, 결국 스티브 로저스라는 인물이 있었기에, 캡틴 아메리카라는 영웅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블랙 위도우의 탄생 서사를 '겉핥기' 식으로 조명한 시작부터 이미 잘못되었다


물론 <블랙 위도우>의 경우 단 한 편으로 그녀의 모든 이야기를 압축시켜서 관객들에게 보여줘야 했기에 시간이 압도적으로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퍼스트 어벤져>만큼의 깊이는 되지 못할지언정, 나타샤 로마노프라는 인물에 대해서 더 깊게 파고들기 위해서 과거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더 길게 진행해나갈 필요는 있었다 생각한다.


어린 시절의 나타샤와 옐레나의 스토리를 조명하며 그들이 쉴드의 추적을 받고 탈출한 뒤, 다시 레드룸에 끌려가는 시점까지를 그리는 선택만큼은 분명 나쁘지 않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이 영화는 블랙 위도우라는 캐릭터를 구성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나타샤의 과거사를, 고작 3~4분 남짓뿐인 짧은 오프닝 크레딧에 죄다 압축시켜버리고야 말았다. 미국의 전설적인 밴드, 너바나의 명곡인 'Smells Like Teen Spirits(여성 버전 편곡)'가 장엄하게 분위기를 잡으며 나타샤가 레드룸에 끌려간 이후의 상황들이 나오는데, 이는 느린 템포의 노래에 비해 너무나 빠르고 정신없게 지나가기 때문에 그녀가 블랙 위도우로 성장하는 과정 가운데 겪었을 고초가 관객들에게 제대로 전달되거나, 감정적으로 이입되기에는 택도 없이 부족하다. 이야기해줘야 할 정보는 많아 마음은 급한데, 그 파편과 같은 정보들을 모아서 효율적으로 보여주기보다는 어딘가 기존 첩보영화에서 나올 법한 형식을 그대로 가져다가 비주얼적으로만 멋져 보이게, 있어 보이게 구성하다 보니 관객들은 그저 눈만 어지러울 뿐, 제대로 된 정보를 얻지 못하고 본 이야기로 끌려들어 가는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이 영화는, 나타샤 로마노프를 조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포인트인지 전혀 몰랐거나, 알았는데도 그를 대충 때우고 지나갔다는 것이다(필자는 후자일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그렇게 무려 10여 분을 투자해 보여준 나타샤의 과거 역시 이후 스토리에 이어질 나타샤와 옐레나의 자매 서사와 가족 서사, 즉 '메인 스토리를 구축하기 위한 작업'에 지나지 않는 매우 좁은 하나의 에피소드일 뿐이기에 결코 '블랙 위도우의 탄생 서사'가 조명됐다기엔 너무나도 부족하다. 레드룸으로 끌려간 이후 동생과 헤어지고, 잔혹한 훈련과 학대 속에서 요원으로 길러지는 과정을 통해 나타샤 로마노프가 본디 어떤 인물이었고, 어떤 과정을 통해서 요원들 중의 최고봉인 '위도우'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었는지, 그리고 왜 어벤져스에 합류하게 되었는지 등에 대해 보다 자세히 이야기했다면, 비로소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 맞춰지듯 블랙 위도우라는 캐릭터가 온전히 완성되고, 마블 팬들이 그녀와 아름답게 작별할 수 있는 기반이 세워졌을 텐데... 그래서 아쉽다. 사실 팬들이 이 영화를 통해서 정말 보고 싶었던 것은, 새로운 무언가보다는 그녀가 어벤져스가 되기 이전의 이야기들이었을 테니 말이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해야 할 것' 대신 '잘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을 택한 케이트 쇼트랜드 감독


그리고 이어지는 초반부, 이 영화는 쉴드에 쫓겨 도주해있는 기간 동안 나타샤가 혼자서 트레일러에서 생활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로드무비 식 힐링 드라마를 통해 나타샤의 인간적인 면을 조명하려 들기 시작한다(아까 필자가 이 영화는 나타샤의 과거를 언급하는 중요성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대충 했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불 꺼진 트레일러 안에서 혼자 영화를 보며 과자를 먹는, 어딘지 유명 예능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를 닮아있는 이 구성은 아마 연출자인 케이트 쇼트랜드 본인이 잘하는 드라마식 전개로 나타샤 로마노프를 조명하려는 시도였으리라 생각되는데, 이는 팬들이 알고 싶었던 나타샤에 관한 정보를 전혀 제공해주지 않을뿐더러, 사실 영화의 흐름 상 굳이 없어도 되는 '영양가 없는 장면'에 불과했다(게다가 이는 이미 <엔드 게임>의 초반에서 어벤져스 기지를 혼자 외로이 지키며 자기를 대신해 사라져 버린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에 괴로워하던 그녀의 모습을 통해 더 효과적이고 깊이 있게 그려진 바 있다).


결국, 앞의 오프닝 부분과 초반부만 놓고 보았을 때 케이트 쇼트랜드 감독의 연출은 마블 영화와 블랙 위도우라는 캐릭터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했다기보다는, 자신이 원하고 잘하는 방식대로, 그러니까 제멋대로 이루어진 것에 가깝다 느껴진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블랙 위도우의 탄생 서사가 빠졌음은 물론, 그를 대신해 넣은 자매 서사와 가족서사마저도 매우 성기기 짝이 없기 때문에 결국 영화의 전체적인 흐름을 결정하는 이정표와도 같은 초반부를, 이후 전개에 필요한 요소들을 충분히 배치하지 못한 채 고스란히 날려버렸다는 것.




증거 #2. 대놓고 주인공을 깔아뭉개는 서브 캐릭터의 존재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나타샤 보러 갔다가, 옐레나에게 반하다



한 유명 영화 평론가께서 <블랙 위도우>에 남긴 한 줄 평인데, 다른 평론가들, 많은 관객분들께서도 나타샤보다는 옐레나가 이 영화에서 도드라졌다고 평하고 계시다. 그리고 필자가 보기에도, 옐레나는 조연임에도 불구하고 일부분 주인공을 능가하는 모습과 역할을 보여주는 '오버 밸런스 캐릭터'로 만들어졌다. 물론 조연 캐릭터들이 주연급의 활약을 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으나, 이번 영화의 경우 그래서는 안됐다. 어디까지나 이 영화는 '블랙 위도우의 처음이자, 마지막 솔로 무비'였으니까.



옐레나에게 무게 중심을 너무 일찍, 너무 많이 기울인 마블


원작에는 없는, MCU의 오리지널 캐릭터인 옐레나는 누가 봐도 '제2의 블랙 위도우'가 되기 위해 만들어진 캐릭터로서, 마블이 깔아놓은 레드 카펫을 밟으며 등장했다. 1) 블랙 위도우와 호각을 다투는 신체 능력, 2) 매력적인 외모, 3) 걸 크러시를 불러일으키는 쿨하고 시크한 성격, 4) 동생이라는 부분에서 오는 어린 면모와 그에서 기인하는 귀여운 매력, 게다가 5) 블랙 위도우의 의붓여동생이라는 막강한 설정 아래 옐레나는 관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렇게 좋은 요소라는 요소는 다 담고 있는 캐릭터가 후계자랍시고 스크린에 등장했는데, 관객 입장에서 그녀는 그야말로 '블랙 위도우의 완벽한 대체재'라 인식되었을 것이다. 그동안 이 정도로 대접받으며 등장한 조연 캐릭터는 마블에 없었다.


허나 이렇게 멋진 캐릭터가 이 영화에서 독으로 작용한 이유 역시 거기에 있다. 옐레나에게 무게 중심이 너무 일찍, 그리고 너무 많이 기울어져버린 것이다.



나타샤 로마노프는 이 영화의 기획단계에서부터 버려진 것이 분명하다


필자는 감히 의심한다. 옐레나가 주인공을 뛰어넘는 비중을 가진 캐릭터가 된 배경에는 굉장히 의도적이고, 계산적인 기획이 있었을 거라고. 왜냐하면 이미 전작에서의 블랙 위도우가 사망하며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 캐릭터가 되어버렸고, 마블은 (스칼렛 요한슨의) 블랙 위도우가 더 이상의 상품성이 없는, '쓸모없는 캐릭터'가 되었다는 판단을 내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사실이 그렇다고는 할지언정, 적어도 십여 년 간 그들과 함께 MCU의 기틀을 세운 원년 어벤져스 멤버의 마지막 솔로 무비이니만큼 마블이 그녀에게 최대한의 예우를 갖춰줄 거라 믿었건만...


생각건대, 마블은 아래의 두 가지를 우선순위에 두고 영화를 제작한 것 같다.


1) 어떻게 하면 이후 마블 프랜차이즈를 이끌 새로운 스타를 멋지게 등장시키고, 그를 통해 블랙 위도우라는 '브랜드'의 상품성을 유지할지.

2) 어떻게 하면 이 영화를 통해 '페미니즘'이라는 사상을 더 많이, 효과적으로 전파할지.
(이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글에서 더 자세히 언급하겠다)


폭스가 <로건>을 통해 울버린을 어떻게 보내주었는지 생각해보면, 더더욱 지금의 마블 수뇌부의 우선순위가 '돈', 그리고 '특정 사상 표출'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지는 느낌이 든다. 이 영화가 왜 이렇게 옐레나를 키워놓았는지, 그리고 어떻게 블랙 위도우를 깔아뭉갰는지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이 영화에서 옐레나가 담당하고 있는 역할들을 들여다보자.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1) 블랙 위도우의 대체자 역할

 

옐레나는 엄연히 조연으로서, 나타샤의 영웅적 행보를 서포트하는 사이드킥(주인공과 행동을 함께하고 주로 주인공의 지원을 하는 역할을 하는 등장인물 - 출처: 위키백과) 정도의 역할만 제대로 해줬어도 나타샤의 후계자로 인정받았을 것이다(<아이언맨> 시리즈의 워머신이나,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의 팔콘처럼). 하지만 이 영화는 옐레나를 '미래의 블랙 위도우 유망주'가 아닌, '이미 블랙 위도우보다 더 나은 대체재'로 설정해놓아 블랙 위도우를 알게 모르게 깎아내렸고, 결과적으로 나타샤가 초라해 보이게끔 만들었다.



부다페스트의 은신처에서 재회하면서부터 옐레나의 '블랙 위도우 까내리기'는 시작된다. 우선 1) 무려 '어벤져스'인 나타샤와 호각으로 겨루며 거의 동등한 능력을 가진 캐릭터로 등장하면서 관객들에게 자신이 '블랙 위도우와 동급의 능력을 가진 캐릭터', 즉 '훌륭한 대체재'라는 인식을 심는데, 그것도 모자라서 나타샤가 과거 죽였다고 생각했던 악당, 드레이코프가 사실은 살아있으며, 그녀가 그런 것조차 알지 못했다는 식으로 비꼬며 2) 나타샤의 능력 부족을 관객 앞에서 자랑스레 까발린다. 


이게 뭐 어떻냐 생각하실지도 모르지만, 생각해보시라.

 


세계 최고의 히어로 집단 '어벤져스'의 일원인 블랙 위도우가,

이 장면 하나로 '악당 하나 제대로 처리 못한 퇴물'이 되어버렸다.




우리가 알던 프로페셔널한 킬러, '블랙 위도우'가 이런 실수를 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 불편하고 납득이 잘 가지 않는 설정인 데다가, 그녀의 동생이라고는 하나 새파랗게 어린 후배에게 대놓고 무시를 당한 상황인 것이다. 관객들이 전부 지켜보는 앞에서 주인공의 위엄을 깎아내린 것이다.

(이는 깊이 들어가 보면 사실 드레이코프라는 악당을 설정하기 위해서 억지로 끌어낸 상황 설정이 불러온 부작용이지만, 이런 부작용이 생길 것을 우려했다면 절대 넣지 말았어야 했던 설정이었다)


또 영화 중반에 옐레나가 블랙 위도우 특유의 '멋지게 착지하는 포즈'에 대해서 '너무 멋진 척한다' 비꼬며 웃음을 유발하는 것 또한 스스로의 발등을 찍는 설정이었다. "응? 그 장면은 재미있기만 했는데..."라고 생각하실 수 있겠지만, 주인공을 웃음거리로 만들면서 다수를 웃기려는 이런 시도는, 블랙 위도우라는 캐릭터가 가진 성격과, 한 캐릭터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솔로 무비에서 사용되기에는 부적절하기에 짝이 없다. 필자가 다소 진지하다 느껴지실 수 있겠으나, 필자는 블랙 위도우의 상징과도 같은 포즈를 욕보인 것은 곧 블랙 위도우라는 캐릭터 그 자체를 욕보인 것과 마찬가지라 생각하며, 이 영화가 마블 팬들에게 있어 블랙 위도우가 어떤 의미를 갖는 캐릭터인지에 대한 고려 따위는 전혀 없이 제작된 아주 무성의한 영화라는 증거 중 하나라 생각한다(참 웃긴 것이, 그렇게 블랙 위도우의 착지 포즈를 비꼬던 당사자가 앞으로 '블랙 위도우의 후계자' 딱지를 달고 영화를 찍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또 <블랙 위도우>는 영화의 대미를 장식하는 악당을 처치하는 역할까지 옐레나의 손에 쥐어주며 이 영화의 주인공인 나타샤를 홀대했다. 악당을 처치하는 것은 적어도 주인공의 손으로 이루어져야 하는데도, 그걸 굳이 옐레나가 하게끔 한 것은 블랙 위도우를 완벽하게 곁다리 취급했다는 것 아니겠는가?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2) 블랙 위도우를 '여성들의 구원자'로 만드는 각성제 역할


옐레나에게는 숨겨진 역할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블랙 위도우를 여성들만의 히어로로 만드는 각성제 역할.


영화의 초반부, 드레이코프의 정신지배에 당하고 있던 옐레나는 다른 위도우에 의해 해독제를 맞고 자유의 몸이 된 후, 레드룸을 파괴하고 다른 위도우들을 해방하겠다는 목표를 갖게 된다. 이후 은신처에서 재회한 뒤 옐레나는 나타샤에게 레드룸과 드레이코프가 아직 건재하다는 사실과, 아직도 그에 의해 많은 여성들이 착취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달한다. 그리고 나타샤는 굉장한 충격에 휩싸인다.




'아닛...! 아직도 나뿐 아니라 많은 여성들이 착취당하고 있다니...!'




이후 자연스레 나타샤는 옐레나와 함께 레드룸과 드레이코프의 붕괴를 목표하게 된다.


그런데 이 흐름, 과연 자연스럽다 할 수 있을까?


1) 나타샤 역시 과거에 그들과 마찬가지로 레드룸과 드레이코프에 의해 착취를 당했던 입장이기에,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태의 심각성에 대해서 이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영화에서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과거 드레이코프와 레드룸을 한 차례 파괴하고자 시도했던 것 역시 그 때문이었을 것이고.

2) 때문에 후에 나타샤가 옐레나에 의해 레드룸과 드레이코프가 아직 건재하다는 사실을 들었다 한들, 그들이 건재하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만 놀라고 분노할 뿐 그 안에서 일어나는 착취에 대해서는 사실 감정적으로 크게 동요를 할 이유가 딱히 없다. 왜?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이 영화는 이 장면을 통해 이미 '만인의 히어로'였던 블랙 위도우를 굳이, 억지로 끌어내려서 다시 '여성들만의 히어로'로 재구성을 시도하고 있다. 새로운 '페미니스트 히어로'인 옐레나에 의해, '페미니즘을 모르는 구세대 히어로'인 블랙 위도우를 '여성들만의 구원자'이자 '페미니스트 히어로'로 눈뜨게 만드는 것이 이 장면의, 그리고 이 영화의 진정한 목표였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옐레나가 까칠하고 시크한 캐릭터로 설정된 이유마저도 이 '두 번째 역할'을 조금 더 자연스레 수행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도 든다. 레드룸이 파괴된 줄 알고 있던 나타샤에게 '이런 심각한 문제가 일어나고 있었는데 언니는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라는 식으로 책임을 묻고, 그녀가 지금까지 '여성들을 위한 히어로로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는 식으로 책임을 떠넘기는 것으로 블랙 위도우가 지금까지 쌓아 올린 것들을 훼손한 것이다.




블랙 위도우를 억지로 '여성들 만의 구원자'로 만드는 데에서 오는 부작용


그런데 이렇게 블랙 위도우를 억지로 여성들만의 구원자로 만드는 것은 주인공은 물론, 영화의 무게감까지 모두 급격히 추락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스칼렛 요한슨이 이 영화의 소개 영상에서 '<엔드 게임>에서 그녀가 소울 스톤을 위해 희생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 영화가 될 것'이라는 식으로 말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전 인류의 구원자가 될 준비단계라기에 <블랙 위도우>의 스토리는 매우 편향되어있고 협소하기 짝이 없다. <블랙 위도우>에서는 '여성들만의 히어로'를 자처했던 블랙 위도우가 <엔드 게임>에서 갑자기 전 인류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블랙 위도우>대로라면, 나타샤는 이후 세계 각국의 억압받는 여성들만을 구원하러 다니거나, 어벤져스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피켓들고 여성운동가로서 활동하고 있어야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이렇게 중심 주제에서부터 전작과의 충돌이 발생하는 데다가, 전작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임팩트를 가진 주인공과 영화의 어디가 무게감 있게 느껴지겠는가(심지어 <엔드 게임>의 블랙 위도우는 주연이 아닌 주조연이었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혹여 '온전한 대관식'이 이루어졌다 착각 말기를


이번 영화를 통해 마블은 옐레나를 본인들의 프랜차이즈를 존속시켜나가기 위한 아주 매력적인 수단 중 하나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옐레나는 아직 많이 부족한 캐릭터임에 분명하다. 연출진과 마블 수뇌부들이 그들의 무능과 탐욕으로 조연 캐릭터를 주제넘게 날뛰게 만든 것이 첫 번째 이유요, 옐레나 역의 플로렌스 퓨가 주어진 역할을 상당히 멋지게 소화하긴 했다만 아직 액션 부분에서는 과거 <아이언맨 2>에서의 스칼렛 요한슨의 첫 등장에 비해 다소 둔하고, 임팩트가 부족한 것이 두 번째 이유이다(그녀를 자세히 보면 '최연소 킬러'라는 영화 내 설정에 걸맞지 않게 액션을 매우 버거워하고 있다는 것이 온몸에서 느껴진다). 제 아무리 나타샤의 동생이라는 설정을 부여받았다 한들, 필자는 이런 이유에서 옐레나라는 캐릭터가 그리 곱게 보이지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시선들이 곳곳에 존재하는 한, 이번 <블랙 위도우>가 옐레나와 플로렌스 퓨에게 결코 온전한 대관식이 되었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능력에 비해 과분한 자리에 앉은 만큼, 앞으로 이 캐릭터가 모든 팬들에게 사랑받는 제2의 블랙 위도우가 될지, '제2의 캡틴 마블'이 되어 일부에게만 맹목적인 찬양을 받는 반푼이 히어로가 될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2. 참혹하디 참혹한 연출력

 

사실 앞서 이야기한 부분들은 어찌 보면 마블 수뇌부의 의견이 강력하게 작용할 여지가 있는, 감독 입장에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이 영화의 형편없는 연출만큼은 오로지 케이트 쇼트랜드 감독의 능력 부족에서 기인한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 영화를 생각보다 좋게 보신 분들이 많은 걸로 알지만, 이 영화를 '액션 영화'라 생각하고 다시 들여다보면, 생각보다 문제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2-1. '히어로 액션 블록버스터' 장르에 대한 이해도가 너무나도 부족한 감독


이 영화는 솔로 무비로서도 점수를 줄 수 없지만, 히어로 액션 블록버스터 장르 영화로서는 마이너스 점수를 받아 마땅하다. 주인공이 맨몸 액션의 대가인 '블랙 위도우'인 영화에서, 액션이 제대로 나와주지 않는데 어떻게 주인공인 블랙 위도우가 멋져 보일 수 있겠는가. 이 영화에서 블랙 위도우가 멋이 없어지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 역시 '액션 블록버스터 장르의 특성을 잘 살리지 못하는 연출'에 있다.


케이트 쇼트랜드 감독은 히어로 액션 블록버스터 장르에 대한 이해도가 정말, 정말 많이 부족한 감독이다. 이는 그녀의 경험 부족에서 오는 한계일 수도 있지만, 애초에 그녀의 성향 자체가 액션 블록버스터 영화와는 전혀 맞지 않는 데에서 오는 부분이 훨씬 크다 생각한다. 우선 초반의 드라마적인 부분에서만큼은 나름 볼만 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는 점과, 하나둘씩 액션이 가미되기 시작하면서 점점 영화가 어색해지기 시작하는 점, 그리고 모든 것들이 응축되어 폭발해야 하는 결말 부분에서 '내가 이걸 왜 보고 있나...' 하는 생각을 들게 만드는 빈 깡통같은 영화가 되어버린다는 점을 생각했을 때, 케이트 쇼트랜드 감독은 아마도 액션 블록버스터 영화를 그저 크게 깨부수고, 터트리는 것 만으로 충분하다고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서로 던지고, 넘어지고, 깨지고, 폭발하는 등 뭔가 큼직큼직한 장면을 충분히 집어넣었는데도 멋과 임팩트가 전혀 살지 않는 것을 보면 더더욱 그렇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카피'도 실력이 돼야 제대로 할 수 있다


그리고 본인의 능력 부족을 채우기 위해, 케이트 쇼트랜드 감독은 가장 쉬운 방법인 '카피'를 선택한 것 같다. 관객분들께서 느끼셨을지 모르겠으나, 이 영화의 대부분의 액션 씬들은 기존의 마블 영화들을 비롯해 많은 영화들을 참고해서 만들어졌다. 옐레나와 나타샤의 격투 장면, 차량 추격전, 마지막 공중에서의 액션까지 모두. 문제는 그런 요소들을 거의 변형 없이 그대로, 무성의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점과, 그렇게 하는 감독이 액션 영화 연출력이 너무나도 부족했다는 것.



#1. 옐레나와 나타샤의 격투


옐레나와 나타샤의 격투 씬은 앞서 말했듯 '옐레나를 나타샤와 호각을 다투는 캐릭터로 멋지게 등장시키기 위한' 장면인데, 이는 사실 <캡틴 아메리카 - 시빌 워>의 초반부에 추격을 피해 도망치고 있던 버키(윈터 솔져)의 은신처에 잠입한 캡틴 아메리카가 격투를 벌이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이미지 출처 : 다음 영화

<시빌 워>에서는 캡틴이 비브라늄 방패로 수류탄을 덮어 폭발을 무효화시킨다든지, 버키가 강철의 왼팔을 이용해 총알을 막거나 층계 아래로 철제 난간을 잡고 뛰어내리며 기계팔의 이점을 충분히 활용하는 등 액션 하나에도 각 캐릭터만의 특색이 살아있으며, 액션이 길게 이어짐에도 불구하고 그 긴박감이 계속 유지되는 연출로 맛이 잘 살아있다. 양과 질적인 면에서 모두 충분하고 적당한 연출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블랙 위도우>는 어떨까. 캐릭터에 대한 설정이 그렇게까지 깊게 이루어져 있지 않다 보니 두 캐릭터 간 액션의 특색이 거의 없을뿐더러, 액션 시간도 굉장히 짧아 보는 입장에서 시시하고 무미건조하다는 생각이 든다. 뭐 이런 부분이야 그렇다 쳐도, 정말 심각한 것은 뭔가 온몸으로 깨부수고 넘어지기는 하는데 그게 보는 입장에서 그다지 멋지거나 무게감이 있다는 느낌이 적고, 애초에 옐레나와 나타샤가 싸운다는 설정 자체가 딱히 명분이 없는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 느껴지기에 작위적인 느낌이 너무 강하다는 것.



#2. 차량 추격 장면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다음으로 차량 추격 장면. 긴박한 상황과는 달리 카메라 워크가 너무 여유롭고 성기게 이어지고, 멀리서 전체적인 상황을 조망하는 와이드 샷을 남발해 보는 입장에서 위기감이 생기려다가도 없어지는 상황이 반복되는데,  음악마저도 잔잔했다가 갑자기 뜬금없는 부분에서 빨라지는 등, 여러 부분에서 굉장히 엉성하고 밋밋한 만듦새가 관객의 흥을 깨는 데에 일조한다(심지어 그 음악마저도 다니엘 크레이그의 <007> 시리즈와 <미션 임파서블 - 폴 아웃>의 그것과 흡사하다). 게다가 추격전의 마무리는 태스크 마스터가 쏜 발사체가 날아와 차 하부에서 폭발하며 차가 뒤집히는 것으로 끝나는데, 이는 엄연히 <윈터 솔져>에서 닉 퓨리의 차가 윈터 솔져에게 요격당해 뒤집히는 장면을 거의 그대로 가져다가 사용한 아이디어이다(윈터 솔져의 경우 대전차용 요격기를 이용했지만, 태스크 마스터는 화살에 달린 폭탄으로 차를 저격했다. 물론 전자가 훨씬 개연성 있게 느껴진다).



#3. 공중 요새에서의 액션


하늘에 비밀리에 숨겨져 있던 레드룸 요새에서 이루어지는 액션 또한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져>의 설정을 많이 가져온 장면 중 하나. 허나 이는 앞선 맨몸 격투나, 추격신은 아기처럼 보이게 만들 정도로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다. 애초에 액션 그 자체는 물론이거니와, 그 이전에 최종 무대로서의 설정 자체도 비교도 안될 정도로 헐겁게 되어있고, 현실성도 매우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미지 출처 : 다음 영화

먼저 <윈터 솔져>의 클라이맥스 무대는 하이드라에 의해 띄워진 요격용 항공모함인 헬리 캐리어인데, 이 헬리 캐리어는 엄연히 이 영화의 흑막인 하이드라에 의해 명백한 목적을 가지고 하늘 위에 띄워진 것이다. '졸라 알고리즘'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하이드라의 사상에 반하는 이들을 상공에서 요격해 제거하고, 하이드라의 영향력을 미국과 전 세계로 퍼뜨리는 것.


그리고 이에 맞서는 캡틴 아메리카 일행 역시 각자 명확한 역할과 목표를 가지고 이번 미션에 임한다. 캡틴 아메리카와 팔콘은 세 대의 헬리 캐리어의 메인 칩을 모두 교체해 프로젝트 인사이트 알고리즘을 무효화시키고, 이와 동시에 블랙 위도우와 닉 퓨리는 하이드라의 수장인 알렉산더 피어스의 행동을 저지하고 늦추는 양동작전이 동시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관객 입장에서는 두 시점을 번갈아 보는 재미도 있고, 긴장감 역시 팽팽하게 유지되는, 아주 영리한 연출이 담겨있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이 뿐만이 아니다. 이 헬리 캐리어라는 공중 요새는, 팔콘이라는 '비행 유닛'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무대라는 점에서도 이점을 갖는다. 이처럼 <윈터 솔져>는 조연 캐릭터에게마저도 한정된 출연 분량 내에서 자신의 능력에 걸맞는 활약을 할 무대를 설정해준, 기획단계에서부터 매우 치밀하게 설계된 영화였다는 것이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이제 <블랙 위도우>를 보자. 레드룸이 하늘에 떠있는 이유는, 그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활동하기 위해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애초에 굳이 하늘에 떠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명백한 목적도 없을뿐더러, 그런 대형 조직이 '하늘에 숨어있었다'는 설정 자체가 황당하기 그지없다. 어두운 밤에, 먹구름 속에 요새가 숨어있다는 식으로 설정을 해놓았는데, 그러면 맑은 날, 낮에는 어떻게 그 커다란 요새가 숨겨질 수 있다는 말인가. 그 정도의 규모라면 전 세계를 감시하고 있는 어벤져스가 발견하지 못했을 이유가 없으며, 하다 못해 근처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농부의 눈에라도 띄었을 것이다. 이런 대형 조직을 숨겨놓을 거면, 애초에 하늘이 아닌 지하나 해저, 혹은 남극이나 북극에 숨기는 것이 오히려 맞는 설정이었을 것이다(케이트 쇼트랜드 감독은 <윈터 솔져>를 너무 감명 깊게 본 나머지, "어머! 마지막 액션씬은 무조건 공중 요새 안에서 해야 해!"라고 생각한 것이 분명하다).


어디 이 뿐인가. 레드룸에서 벌어지는 싸움은 전부 실내에서 이루어졌기에 공중 요새라는 설정은 애초에 액션을 치르는 무대로서는 거의 활용되지 않고 낭비되었으며, 후반부에 요새가 폭파되며 이루어지는 활강 액션 또한 너무 비현실적으로 그려져 있어 영화를 보는 데 방해가 될 뿐이다. 레드룸이 하늘에 떠있다는 설정 자체가 애초에 '비 능력자'인 블랙 위도우에게 맞지 않는 무대였다는 것이다.

왜 히어로 영화에 현실성을 따지냐?"라고 하실 수 있겠지만, 제 아무리 히어로 영화라 한들 적당한 선에서의 현실성은 유지되어야 관객 입장에서 영화에 제대로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는 만큼, 관객 입장에서 '아... 너무 비현실적인데...?'라는 생각이 든 순간, 그 설정은 실패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이 정도의 고도에서 떨어졌으면 설령 캡틴 아메리카라 한들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을 것이며, 실제로 <윈터 솔져>에서 헬리 캐리어는 이 정도로 높게 떠있지도 않았다).


본인의 오리지널 아이디어는 전혀 없이, 다른 영화들을 참고한답시고 '이거 멋있는데? 이거 그대로 쓰자!'는 식으로 대충 설정만 가져와서 제대로 된 액션 블록버스터 영화를 만들려고 했던, 케이트 쇼트랜드 감독의 대담함과 우매함에 혀를 내두를 뿐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 영화의 '저질 액션'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블랙 위도우>의 배우들은 너무 느리고, 약해 보인다


보통 우리는 일반인인 블랙 위도우에게서 초인인 캡틴 아메리카만큼의 강력하고 빠른 액션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허나 이들이 영화 내에서 '위도우'라 일컬어지는 강력한 살인 병기로 설정된 이상, 일반인 남성은 가뿐히 초월하고도 남는 민첩함과 파워를 갖춘 액션이 영화 내내 나와줘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어도 여성 배우들 가운데서도 뛰어난 피지컬을 갖춘, 파워와 스피드를 겸비한 이들을 기용해 과거의 블랙 위도우가 보여줬던 만큼의 강함을 보여주며 관객에게 레드룸이라는 조직이 얼마나 위험한 조직인지에 대해 어필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 영화의 배우들에게서는 그러한 강력함이나 스피드는 찾아볼 수가 없다. 앞서 말했듯 옐레나 역을 맡은 플로렌스 퓨는 물론, 레드룸 요원들 역시 하나같이 야리야리하기만 하고, 느리고, 약하기 짝이 없다. 오로지 인간 치고는 대단한 신체 능력에 기반한 볼거리를 바탕으로 한 액션을 주무기로 하는 영화에서, 그 부분을 제대로 된 준비하지 않고 대체 어떻게 영화를 만들려 한 것일까.


그리고, 만약 배우들이 그런 부분에서 부족했다고 한다면 그런 단점은 가리고, 여성 히어로 특유의 유연성과 컴팩트한 액션의 장점은 살리는 형태의 편집은 필수적으로 해야 했고, 하다 못해 그런 처리가 될 수 없는 부분들은 배속을 해서라도 빠르게 편집하는 식으로 처리하는 성의라도 있었어야 했는데, 이 영화는 그런 것조차 하지 않았기에 단점이 마치 맑은 물속의 고기모냥 훤히 비친다. 이 정도면, 연출자가 자신의 액션씬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전혀 몰랐거나, 애초부터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었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그녀는, 그리고 마블 수뇌부들은 대체 어디까지 액션 영화와, 그걸 보는 관객들을 무시했던 걸까.




2-2. 말도 안 되는 상황 전개 + 성의 없는 문제 해결 방식


만일 단점이 액션뿐이었다면, 필자도 이 영화를 '블랙 위도우를 제대로 대접해주지 못한 형편없는 액션 영화' 정도로 평가하고 끝낼 수 있어 좋았을 것이다. 허나 애석하게도 케이트 쇼트랜드 감독은 자신이 액션뿐 아니라 다른 부분에서도 형편이 없으며, 메이저 영화의 감독이 되기에는 아직 한참 모자란 수준의 연출자라는 것을 기어이 증명해내고야 만다. 이 영화, 중반부 이후에 산적해있는 문제들이 한두 개가 아니다.



관객들의 물음표를 자아내는 뜬금없고, 말도 안 되는 상황 전개


필자가 본격적으로 '이 영화가 망해가고 있구나...'하고 느꼈던 지점은, 중반에 나타샤가 가족끼리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기 시작한 뒤, 서로 간의 해묵은 감정을 굳이 터트리며 '가족 영화' 느낌으로 갑자기 흐름을 틀어버렸을 때였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생각건대, <블랙 위도우>에서 '굳이' 가족을 다시 뭉치게 만든 목적은 크게 두 가지 정도였을 것이다.


1) 나타샤 일행을 레드룸의 수뇌부인 멜리나와 만나게 해서, 레드룸에 들어갈 수 있게끔 만들기 위해.

2) 케이트 쇼트랜드 감독 본인의 강점인 '감정적인 드라마적 연출'을 통해 나타샤가 자신의 가족과의 유대감을 되찾고, 영화의 말미에 훈훈한 모습을 연출할 수 있게 만들 명분을 심기 위해.


레드룸에 들어가기 위한 '수단'으로서 가족이 다시 만나는 첫 번째 의도는 괜찮다. 하지만 문제는 두 번째, 감정적인 연출 시도에 있었다. 이런 감정적인 장면들이 다시 등장하면서 이제 조금씩 결말을 향해 무르익기 시작했던 텐션이 급격히 떨어졌고, 결국 영화 전체의 리듬이 파괴되고야 말았기 때문이다. 레드룸을 찾으러 바로 가도 모자랄 판에, 애초에 제대로 관객 입장에서 감정이입도 제대로 되지 않았을 과거의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자기들끼리 북 치고 장구 치며 감정을 터트린다 한들, 그 감정이 어떻게 관객들에게 닿겠느냐는 말이다.

(굳이 감정선을 넣고 싶다면, 이런 것들이 멜리나에게 레드룸을 파괴해야 할 명분을 심어주는 식으로 이루어진 뒤, 함께 작전을 세우고 레드룸으로 비행선을 타고 쳐들어가는 형식으로 만들어졌다면 보다 담백하고 개연성 있게 그려졌을 것 같다. 긴박함도 그대로 유지가 될 것이며, 레드 가디언이나 멜리나 같은 캐릭터 역시 더 좋은 방향으로 활용이 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능력은 안 되는데, 하고 싶은 것만 너무 많아서 문제


이렇게 이 영화에서 말도 안 되는 상황들이 갑작스레 전개되는 이유는 하위 장르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1) 나타샤가 혼자 생활하는 모습을 통해 '로드 무비'

2) 옐레나와 나타샤 둘의 멋진 호흡을 보여주는 '버디 무비'

3) 가족의 소중함이라는 메시지를 담은 '가족 영화'

4) 블랙 위도우다운 '액션 영화'


하고 싶은 것이 많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이걸 다 같이 딱딱 맞아 들어가게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메인 장르를 정하고, 그 메인 장르를 기반으로 서브 장르들을 설정해 그 무게 배분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허나 메인 장르 설정을 제대로 하지 못했음은 물론, 개별 장르들의 역할 분배 역시 제대로 못하니 서로 아귀가 맞아떨어지지 않음은 당연한 것일 뿐. 만약 그게 어렵다면 차라리 잘하는 것에 무게를 두고 그 하나에 몰입하는 것이 나았을 텐데, 그렇게 되면 블랙 위도우를 가지고 힐링 로드무비를 찍어야 하니 원...



어설프고 허접하기 짝이 없는 반전과 그 사용 방식


꼬인 실타래를 하나하나 풀어가려 하지 않고 실타래 자체를 가위로 싹둑! 잘라버리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아주 나쁜 태도 역시 이 영화의 특징. 나타샤 일행이 레드룸으로 가서 악당인 드레이코프를 처치하는 과정에서 넣어놓은 반전들이 그 좋은 예시인데, 문제는 이 반전들이 이미 '클리셰'가 되어버린 지 오래라 전혀 충격적이지도 않은 데다, 굉장히 성의 없게 구성되어 있고, 그마저도 두세 개 씩 연달아 등장하기에 극 전체의 김이 빠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1. 아군인 줄 알았던 멜리나가 레드룸에 밀고해 나타샤 일행을 레드룸으로 끌려가게 만든다!

2. 감옥에 갇힌 줄 알았던 나타샤가 멜리나와 얼굴을 바꿔치기하며 드레이코프 앞에 등장! 알고 보니 멜리나는 아군이었고, 그들의 레드룸 파괴 공작을 돕고 있었던 것이다!

3. 하지만 알고 보니 나타샤는 드레이코프를 공격하지 못하게끔 만드는 정신지배 하에 놓여있었다!

4. 위기에 처한 나타샤...인 줄 알았지만 멜리나가 이미 나타샤에게 그녀가 정신지배에 놓여있음을 미리 알려주었고, 이미 해결방법을 알고 있었던 나타샤는 정신지배에서 쉽게 벗어나 멋지게 드레이코프를 처리한다!


위의 네 가지가 바로 이 영화의 말미에, 그것도 한꺼번에 등장한 반전들이다. 정말 기가 막힌다.


'믿고 있던 아군의 배신'은 뭐 그렇다 쳐도, 얇은 가면을 사용해서 얼굴을 바꿔치기하는 장면은 이미 <윈터 솔져>에서 등장했던 장면이라 반전으로 쓰기에는 식상하기 짝이 없거니와(굳이 <윈터 솔져>가 아니어도 다른 작품에서도 숱하게 등장한 장면이긴 하지만, 이 정도면 케이트 쇼트랜드 감독이 <윈터 솔져>를 모델로 두고 이 영화의 액션을 기획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나타샤가 드레이코프를 공격하지 못하는 정신지배에 놓여있었다는 설정 역시 관객 입장에서 아예 예측이 불가능했던 범위의 것은 아니기에 관객 입장에서 그리 놀라운 반전이 아니다(그리고 이 설정대로라면 나타샤가 애초에 레드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사실부터가 말이 안 되는데, 이런 설정 상의 구멍은 너무 많으서 더 이상 언급하면 길이 너무 지저분해질 것 같아 자제하겠다). 한 번 반전을 주는 것은 이미 업계 내에서 시시해진 것 같으니 그 위에 반전에 반전, 그 위에 반전을 또 덧발라서 뭔가 있어 보이게 만들려고 한 것 같은데, 초반부부터 공들여 구성되지 않고 그냥 대충 손바닥 뒤집듯이 바뀌는 얕디 얕은 허접한 반전에 경악해줄 만큼 관객들은 멍청하지 않을뿐더러, 그 와중에 관객들이 이 반전만큼은 몰랐을 거라 확신하는 듯 열심히 연기를 하고 있는 배우들 덕에, 필자는 한층 더 기운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가장 심각한 마지막 반전. 이미 멜리나가 나타샤에게 그녀가 드레이코프의 정신지배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고, 나타샤가 멜리나에게 "나 그거에서 벗어나는 방법 알고 있어"라고 말하는 과거 회상 장면 이 나온 뒤, 바로 나타샤가 책상에 박치기를 하며 "신경을 파괴하면 되지!"라는 멋진 대사(?)를 날리며 정신 지배에서 완벽하게 벗어나는, 그야말로 대형 사고가 벌어지고야 만다. 맙소사.... 박치기 한 번에 사람의 정신을 조종하는 신경세포가 완벽하게 파괴된다는 터무니없는 설정과, 이를 관객들이 고작 회상 장면 하나로 순순히 납득해줄 거라는 믿음은 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무성의하게 구성된 반전, 너무나 성의 없는 문제 해결 방식까지. 미안하지만 케이트 쇼트랜드 감독은, 액션은 물론이거니와 기본적인 극 연출 수준 자체가 아직 메이저 감독이라 불리기에는 한참 모자라보인다.




이 영화에서 최고로 뜬금없었던 장면, 옐레나의 '자살기도'


레드룸이 폭발하고 드레이코프가 탈출하려는 찰나, 이 어처구니없는 영화에 어울리는 피날레를 장식하려는 듯 갑작스레 옐레나가 "재미있었어!"라고 뜬금없는 대사를 외치더니 드레이코프의 탈출선을 폭파시키고 생을 마감하려 한다. 


이야... 이보다 더 최악일 수는 없을 줄 알았는데... 분명 옐레나는 영화 내에서 생의 의지를 잃을 정도로의 고통을 겪었던 적이 없을뿐더러, 충분히 목숨을 부지하며 임무를 완수할 수 있는 상황이기에 이런 극단적 선택을 할 이유가 전혀 없지만, 아마도 케이트 쇼트랜드 감독은 영화의 말미에 보다 극적인 상황을 연출해 관객들에게 억지로 감정적인 고양을 이끌어내기 위해 이런 연출을 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충무로식 신파극의 '억지 눈물 짜기' 연출을 많이 비판하고는 하지만, 이건... 도저히 눈물을 짤 수 있는 수준에조차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나타샤가 마치 이런 상황이 벌어질 것을 위해 준비된 것처럼 바로 옆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낙하산을 들쳐 메고 옐레나를 구하러 간다는 것이다.


1) 영화 스태프가 '이따 옐레나 떨어질 때 가져다 쓰세요~'하고 가져다 놓지 않고서는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낙하산이,

2) 그것도 공중 요새가 폭파되어 모든 것이 날아가고 떨어지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3) 나타샤가 가져다 쓰기 아주 좋게 놓여있다는 설정이, 대체 말이나 되는 것이냐는 말이다.


'이게 과연 마블이라는 메이저 영화 집단에서 나올 수 있는 연출인가?' 싶어서,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이 잔혹극이 현실인가 싶어서, 필자는 그저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디까지 관객을 무시했기에 이런 식의 연출을... 깜냥도 되지 않으면서 덥석 이 영화의 감독직을 수락한 케이트 쇼트랜드 감독은 물론, 이 영화의 상태를 보고도 개봉을 승인한 마블 수뇌부 모두 관객들에게 사죄해야 마땅하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기껏 초반에 심어놓은 '떡밥'들마저 쉬어버렸다


그렇게 무사히(?) 작전을 마치고 지상에 내려온 두 자매. 하지만 그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기쁨을 나누는 장면이나, 어린 시절 주고받던 자기들만의 '휘파람 사인'을 한 차례씩 나누는 장면들은 허술하기 짝이 없는 연출로 인해 진즉에 그 빛을 잃었음은 물론, 매우 같잖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초반부에서 두 자매의 사이가 그렇게 애틋하게 느껴질 정도로 연출되지도 않았고, 레드룸과 드레이코프라는 악당, 그리고 그 해결 방식마저도 말도 안 되고 별 볼 일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지나온 과정이 관객들에게 충분히 힘들고 가치 있는 것이었다고 어필되지 못한 것이다. 그 외 마블 영화의 잔재미 중 하나인 이전 작품들과 작품 별로 연계가 되는 요소들마저 영화 자체의 보잘 것 없음으로 인해 그저 그런 수준에 그치게 되어버렸다.


메인 디쉬가 상한 지 오랜데, 옆에 놓인 사이드 디쉬라고 멀쩡할 수 있었겠는가.





3. 빈약한, 그리고 사악한 캐릭터 구성 방식(Feat. 페미니즘)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마블은 디즈니 산하에 들어간 이후로 본인들의 영화에 페미니즘 사상과 PC주의를 조금씩, 꾸준히 주입하고 있다. 필자가 기억하는 한도 내에서, 문제라 느꼈던 부분에 대해서만 나열해보겠다.


1. <닥터 스트레인지(2016)> - '에인션트 원' 캐릭터의 여성화 및 화이트 워싱 논란
마블 코믹스 원작에서 티벳의 남성 고승으로 나오는 캐릭터인 에인션트 원을 '백인' '여성'으로 설정해 논란을 빚었다. 사실 이는 화이트 워싱만으로 잠시 논란이 되었을 뿐, 남성을 여성 캐릭터로 바꿨다는 점은 거의 논란이 되지 않은 채 묻혔다.

2. <스파이더맨 홈커밍(2017)> - 여주인공인 MJ 캐릭터의 블랙 워싱 논란
원작 코믹스 및 전작의 스파이더맨 시리즈에서는 백인이었던 MJ를 흑인으로 설정해 논란이 되었다.

3. <어벤져스 - 인피니티 워(2018)> - '미니 걸벤져스 어셈블'
와칸다에서의 전투 가운데 블랙 오더의 수장 격인 여성 빌런, 프록시마 미드나이트와의 전투에서 블랙 위도우가 위기를 맞자 같은 여성 히어로인 오코예와 스칼렛 위치가 '갑자기' 나타나 '여성은 여성이 돕는' 장면을 연출.

4. <캡틴 마블(2019)>
1) 영화 외적인 부분
캡틴 마블 역의 브리 라슨이 페미니스트인 것과, 그러한 사상을 기반으로 공적인 인터뷰 자리 등에서 매우 날이 서있고 불편함을 대놓고 드러내는 등 논란이 될 법한 행동들을 계속하며 인성 논란이 거셌음.
2) 영화 내적인 부분
어벤져스와 쉴드의 수장, 닉 퓨리가 눈을 잃은 이유가 겨우 고양이에게 앞발로 긁힌 것이라는 보잘것없는 설정을 추가해 그동안 닉 퓨리가 쌓아 올렸던 위엄을 한 방에 실추시킴
(원작에서는 전쟁 중 수류탄에 피격되는 사고로 인한 것으로 나올뿐더러,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져>에서 이미 한쪽 눈을 드러내며 카리스마 있는 장면을 연출한 바 있기에 기존 마블 작품들과의 연계성을 생각해서라도 절대 넣지 말았어야 할 설정이었다. 그저 '남성' 캐릭터의 권위를 실추시키기 위함이었다고 밖에는 볼 수 없는 장면).

5. <어벤져스 - 엔드 게임(2019)>
1) '걸벤져스 어셈블'
타노스와의 최종 전투에서 서로 친하지도 않고, 심지어 일면식도 없었던 모든 여성 히어로들이 한데 뭉쳐 싸운다고 하는 불필요하고 작위적인 장면을 연출해 마블 팬들 사이에서 논란이 됨.
2) '대포가 기우는 장면'
캡틴 마블이 전투에 뒤늦게 참전하며 타노스의 비행선을 격추시키는 과정에서 캡틴 마블을 요격하려 높게 솟아있던 대포들이 일제히 고개를 떨구는 장면을 '굳이' 관객들에게 보여줌. 남성성의 실추를 연상시키는 장면을 통해 캡틴 마블이 명백히 여성 우월주의적 페미니스트 히어로임을 드러낸 장면.


이렇듯, 마블은 조금씩, 점진적으로 그들의 작품 속에 페미니즘과 PC주의를 심으며 점점 그 강도를 높여나가기 시작하더니, 결국 이번 <블랙 위도우>에서 확실히 그들의 본색을 드러냈다. 이 작품은 아예 대놓고 페미니즘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판을 깔아놓고 그들의 사상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전과 마찬가지로 무섭도록 은근하면서도 티 안 나게, 그들이 비난받지 않을 정도로만 조절을 해가며 그들의 사상을 주장했다는 점에서는 이전 작품들보다 훨씬 영리하고, 교묘해졌다고 할 수 있겠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히어로물의 탈을 쓴 페미니즘 영화, <블랙 위도우>


앞서 이 영화에서 블랙 위도우가 '반 쪽짜리 영웅'이 되어버렸다는 표현을 썼는데, 이는 이 영화의 진(眞) 주인공이 사실 페미니즘 그 자체라고도 볼 수 있을 정도로 영화 내에서 블랙 위도우의 존재감보다는 페미니즘의 메시지가 보다 강렬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블랙 위도우라는 주인공을 세워놓고, 그 주인공을 돋보이게 만들기보다는 중심으로 삼은 주제인 '페미니즘'에 대해 주장하는, '히어로 영화라는 탈을 쓴 페미니즘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 영화의 가장 큰, 근본적인 문제는 사실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1)'히어로 영화로서의 정체성'이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우선 필자는 한 명의 마블 팬으로서 이 영화의 주인공이 온전히 블랙 위도우, 그리고 나타샤 로마노프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영화 <블랙 위도우>는, 히어로 영화로서의 본분을 저버린 채 히어로를 주인공으로 세우지 않고, 그들의 뒤틀린 사상을 선전하는 도구로 취급하고 내다 버렸다. 이 영화에서 주장된 페미니즘이 잘못되었다는 사실 이전에 이 영화가 나타샤 로마노프라는 인물과, 블랙 위도우라는 히어로가 갖는 숭고함을 온전히 돋보이는 용도로 이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는 점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물론 히어로 영화 속에 나름의 주제의식을 내포하는 것이 잘못되거나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그런 영화를 만들 작정이었으면 더 연출력이 뛰어난 감독을 기용했어야 했다).



2)이 영화는 선한 메시지 뒤에 조악한 퀄리티와 사악한 속내를 숨겼다


<블랙 위도우>의 후반부는 전 세계적으로 극단적 남성주의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아동) 여성 착취에 경각심을 갖고, 그들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메시지로 강렬하게 장식되어있고, 이는 분명 이 영화의 메인 주제로서 관객들에게 매우 강한 어조로, 분명하게 주장되고 있다. 이것만 놓고 봐서는 좋은 메시지임에 틀림이 없지만, 그럼에도 이걸 필자가 물고 늘어져야 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메시지가 좋은 것과 그 영화가 좋은 영화인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이동진 평론가께서 과거 위안부 문제를 다룬 영화 <귀향>을 평하며 하신 말씀을 빌리겠다. 물론 과거부터 전 세계적으로 일반화되어있던 가부장적인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여성들은 봐도 되지 않아도 될 억압과 피해를 받은 부분은 사실이고, 현재까지도 이런 여성에 대한 잘못된 시각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또한 아직도 극단적인 남성주의가 만연해있는 무슬림 국가들에서는 영화 <블랙 위도우>에서보다 훨씬 심각하게 아동 여성들에 대한 착취가 만연하고 있는 만큼, 이런 부분에 대해서 이 영화가 꼬집어준 것만큼은 긍정적인 요소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긍정적인 메시지 하나를 딸랑 넣어놓은 것 만으로 이 영화의 조악한 퀄리티가 모두 용서받을 수는 없다. 또한 이 영화에 담긴 다른 메시지들은 사실 위처럼 '정상적인 페미니즘'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만 한다. '아동 여성착취에 대한 경각심 고취'와 그들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긍정적인 메시지만이 주장되었다면, 필자는 이 영화에서 주장된 페미니즘에 '뒤틀린'이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았을 것이다.




캐릭터에서 명확히 드러나는 이 영화의 뒤틀린 페미니즘


이 영화의 캐릭터 구성 방식은 현재 '마블이 주장하는 페미니즘'이 그릇되고, 편향되었다는 아주 좋은 증거가 되어준다. 오로지 성별만을 기준으로 아주 이분법적으로, 그리고 악의적으로 설정된 캐릭터 구성 방식으로 인해 남성 캐릭터들은 대부분 '멍청하고 악한 존재'이자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로 낙인찍혔고, 여성 캐릭터들은 일방적인 피해자로 설정해 남성들에 대한 형체 없는 피해의식과 혐오감을 증폭시키는 데에 이용하고 있다.



은근하지만 분명하게 이루어진 '남성 비하 및 혐오 유발'


페미니즘의 그늘이 영화계에 드리우기 시작한 때부터 등장한 몇몇 잘못된 페미니즘 영화에서 두드러지는 포인트가 있다면, 여성 우월주의에 기반한 남성 비하 및 혐오가 아주 은근하고도 분명하게, 그리고 공공연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고스트 버스터즈(2016)> 등이 좋은 예시이지만, 망작이므로 굳이 보진 마시기를).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1) 알렉세이 로마노프(레드 가디언) - '다운그레이드 버전 드랙스'


나타샤와 옐레나의 양부이자 러시아의 비밀 요원인 알렉세이는 어딘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리즈의 '드랙스'와 비슷한, 쉽게 말해 '힘은 세지만 우스꽝스러운 캐릭터'로 등장한다. 하지만 드랙스의 경우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1,2>, <어벤저스 3,4>를 통틀어 이렇게 찬 밥 취급받거나, 얻어맞고만 있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고, 레드 가디언은 가족들과 관객들에게 모두 '혐오의 대상'으로 낙인찍혀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과거 시점부터 그는 어린 옐레나와 나타샤를 드레이코프에게 팔아넘기는 '악역'으로 등장한다. 현재 시점으로 돌아와서는 나타샤가 레드룸의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 그를 감옥에서 꺼내 주며 다시 스크린에 모습을 비추는 데, 갑자기 팔씨름으로 모든 죄수들을 넘기는 초인 캐릭터가 되어 관객들에게 앞으로 뭔가 대단한 활약을 보여줄 듯 은근한 기대를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등장해놓고서 이 캐릭터가 영화 내내 하는 역할이라곤 시답잖게 떠들면서 웃기지도 않는 농담을 던지거나, 지저분하고, 우스꽝스럽고, 꼴불견인 모습을 보이며 '가족'들에게 무시를 당하는 것뿐. 그러다 기어이 영화 후반에 가서는 신나게 얻어맞기만 하는 '무쓸모 캐릭터'로 확실히 자리매김한다(그것도 '여성' 캐릭터에게).


이렇게 설정이고 나발이고 무시하고 그냥 멍청이로 만들 거면, 애초에 관객들에게 '오... 그래도 저런 슈퍼 솔저가 우리 팀에 있어주면 그래도 크게 힘이 되겠네'라는 기대감 자체를 불어넣는 연출 자체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 어디서 본 방식으로 캐릭터를 멋지게 등장은 시켰는데, 그걸 제대로 활용할 생각은 없고 오로지 혐오 프레임만 씌울 생각뿐이니, 캡틴 아메리카처럼 혈청을 맞은 초인 캐릭터라는 설정은 저만치 날아가버리고 '머저리'만 남아버린 것이다. 레드 가디언은 좁게는 가장(家長) 남성, 넓게는 남성 그 자체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고, 여성에게 남성이 굴복당한다고 하는 '일부 여성들'의 판타지를 충족시키기 위한 캐릭터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더 심각한 부분은 사실 따로 있다.



이미지 출처: 나무위키 '블랙 위도우'

2)드레이코프 - 영화 역사상 최고로 수준 낮은 '저질 쓰레기' 악당


악역 캐릭터인 드레이코프는 레드 가디언보다 더욱 처참하다. 레드 가디언의 경우 비중 없는 사이드 캐릭터에 불과하지만, 드레이코프의 경우 악역으로서 아주 비중 있게 다뤄져야 할 인물이었다. 허나 드레이코프라는 캐릭터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늙고 배 나온, 어린 여자애들을 착취하고 이용하는, 그리고 여자들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아저씨'에 불과하다. 본인이 할 줄 아는 것은 없고, 어린 여자아이들을 잡아다가 세뇌시킨 뒤 훈련시켜 철저하게 그 능력에 기대어 세계를 조종하고자 하는 정말 1차원적이고 못난 악당. 능력, 생김새, 포스 등 모든 부분에서 보잘것없는, 지금껏 영화에서 등장했던 악역들 가운데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수준 낮고, 무능한 악역이 바로 드레이코프인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치명적인 부작용이 생긴다.



악역이 보잘것없으니,

주인공도 보잘것 없어지고,

영화 또한 보잘것 없어졌다.




기본적으로 선악 구도의 컨텐츠에서는 악역이 강한 만큼 주인공이 멋지게 그려지는 법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역작, <다크 나이트>가 현존 최고의 히어로 영화 중 하나로 꼽힐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악역이 '조커'였기 때문이었다. '저 미친놈을 대체 어떻게 잡지...?' 싶을 정도로 신출귀몰하고, 무자비한 데다가, 그 어떤 약점조차 찾아낼 수 없는 '혼돈 그 자체'인 인물. 때문에 자연스레 배트맨이 조커를 잡으려 애쓰는 과정들은 관객들에게 굉장히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고, 영화의 무게감 역시 차원이 다른 수준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물론 故히스 레저의 연기가 명품이기도 했지만, 악역 캐릭터를 잘 만드는 것은 이러한 이유로 영화의 성패를 가르는 매우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허나 가장 기본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이런 구조 역시 <블랙 위도우>에서는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영화의 꽃이라고도 볼 수 있는 악당 캐릭터의 무게감이, 오로지 '남성 = 악'이라는 일차원적이고 편견 가득한 생각을 가진 이들에 의해 밑바닥 수준으로 곤두박질쳤고, 자연스레 블랙 위도우의 노력 또한 하찮게 느껴지면서 영화 자체의 무게감도 크게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본인이 할 줄 아는 것은 없고, 그저 어린 여자아이들을 잡아다가 세뇌시킨 뒤 훈련시켜 철저하게 그 능력에 기대어 세계를 조종하고자 하는,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숨어서 요원들이나 가끔씩 보내다가, 영화 말미에 잠깐 등장해서 세계를 정복하겠다고 하는 악당의 어디가 관객에게 위협적으로 느껴지겠는가. '아 그냥 그러고 싶나 보다' 싶지. 만약에 이 영화의 악역이 <윈터 솔져>의 알렉산더 피어스 정도만 됐어도, 아마 영화의 무게감 자체가 꽤 달라졌을 것이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3) 메이슨 - 작지만 페미니즘의 이중성과 한계를 드러내 주는 캐릭터


이 영화에서 그나마 정상적인 남자 캐릭터인 '메이슨'은 나타샤가 전화만 하면 알아서 원하는 물건을 가져다주는 사설 고용 업자 캐릭터이다. 은거할 집, 헬기, 심지어 최신형 초음속 제트기까지도.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이 캐릭터를 통해 '그들'이 생각하는 페미니즘이 얼마나 단편적이고, 이기적이며, 또 한계가 분명한 사상인지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1) 결국 남성 없이는 제대로 뭘 할 수 없는 '그들'

애초에 이런 캐릭터를 만들 거였으면 이 메이슨도 남성이 아닌, 여성 캐릭터로 설정했으면 어떨까. 그렇다면 블랙 위도우를 '남성의 손을 빌리지 않고도 주체적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여성'으로 제대로 승화시킬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주체적인 여성상'을 영화의 메인 주제로 잡았으면, 이런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썼어야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알고 보면 '여성은 여성이 돕는다'는 주제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인물이자, 이 영화가 얼마나 대충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작은 증거.

2) 3D 업종은 죽어도 하기 싫다?

사설 고용 업자는 힘들고, 어렵고, 때로 지저분하기까지 한 완벽한 3D 업종이다. 어쩌면 영화를 만든 그들은 여자가 그런 일을 한다는 것 자체를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애초에 '여성 사설 고용 업자'를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닐는지. 이는 멋지고, 편하고, 쉬운 일만 찾아서 하려는 '그들'의 이기적인 사상을 아주 잘 대변하고 있다. 경찰 공무원은 하고 싶은데 범죄자는 잡기 싫고, 소방 공무원은 하고 싶은데 불은 끄기 싫은.


(그리고 굳이 이런 부분까지 이야기를 해야 하나 싶지만, 여성을 중심으로 그려지는 영화들 중에는 종종 여성들과 매우 막역한 친구 관계인 캐릭터, 즉 '주인공들에게 호의적인 남성들을 굳이 그려야 할 때'에는 미국에서 흔히 '게이'라 놀림받는 특징들을 가진 캐릭터들을 등장시키곤 한다는 것인데, 메이슨 역시 굳이 따지자면 그런 성향을 가진 캐릭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영국식 억양, 어딘지 모르게 중성적으로 느껴지는 외모나 말투, 행동 등은 마초적이고 남성적인 '미국에서 주류를 이루는 남성상'과는 거리가 있고, 실제로 어린 남성들 사이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게이라 놀리는 경우는 빈번하게 일어나기도 한다. 이렇듯, 여성에게 우호적인 남성 캐릭터를 남성 사회에서 약자라 여겨지는 인물로 그렸다는 점에서도 어느 정도 남성 혐오와 비하가 이루어졌다고 봐도 될 것 같다.)



'유명하지만 빈약한' 사이드 캐릭터들


다른 조연 캐릭터들? 사실 언급하기도 민망할 정도이지만 기왕 이야기할 거 다 이야기해보자. 명배우들을 데려다가 영화를 입소문 타게 하는 용도로 사용하고 캐릭터 구성은 온전히 해당 배우에게 맡긴 채 본인들은 제대로 연출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마블의 만행과, 다른 부분을 신경 쓰느라 조연 캐릭터들은 손볼 여지조차 가질 수 없었던 초짜 감독의 엉성한 연출 능력이 엉겨 붙은 '보잘것없는 결과물들'을 소개한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1) 멜리나 로마노프 - 애초에 생명조차 부여받지 못한 캐릭터


레드룸의 최고 요원 중 한 명으로, 나타샤와 옐레나의 의붓어머니 역할을 수행한 러시아의 스파이이자 연구원. 쉴드의 데이터를 빼내 사람을 정신적으로 조종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이 영화에서 가장 빈약한 캐릭터. 오로지 레이첼 와이즈라는 명배우에 기대어, '따뜻한 어머니'라는 설정과, 나타샤 일행을 레드룸으로 인도하는 역할 외에는 연출진이 캐릭터 구성에 그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기에 그 외 영화 내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거나, 어떤 성격적인 특성을 내보일 여지조차 주어지지 않았다고 해도 무방하다. 끝.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2) 태스크 마스터 - '속 빈 강정'


드레이코프의 딸. 과거 블랙 위도우가 설치한 폭탄에 피폭되어 큰 화상 및 정신적 손상을 입은 뒤, 드레이코프의 개조에 의해 인간병기로 재탄생했다. 한 번 본 모든 기술들을 카피해서 사용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라는 것이 이 캐릭터의 특징이건만, 영화 내에서는 그 능력의 반의 반도 보여주지 못한 채 사라지는 비운의 캐릭터이다. 외관 및 위협적인 첫 등장만큼은 어딘지 윈터 솔져의 그것과 매우, 아주 심히 흡사하지만 가면 갈수록 윈터솔져의 발톱 때만도 못한 존재감의 캐릭터로 전락하고야 만다. 한 번 본 모든 기술들을 카피해서 사용하는 강력한 능력은 영화 초반부 등장 신을 제외하고는 전혀 비치지 않았고, 해독제를 맞고 정신 지배에서 풀리자마자 뇌에 큰 손상을 입었던 컨셉은 까맣게 잊었는지 갑자기 제정신으로 돌아와 감정 연기를 선보이는 설정 파괴까지 보여주는 관계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멜리나보다 훨씬 더 영화에 마이너스로 작용하는 캐릭터라고 볼 수 있겠다.


게다가 멜리나와 마찬가지로 할리우드에서 오랜 경력을 쌓아온 배우, 올리비아 쿠릴렌코를 기용했건만 그녀는 항상 마스크를 쓰고 있어 얼굴을 비칠 수 없었던 데다가, 정신적으로 개조된 인간병기라는 컨셉에 의해 거의 연기다운 연기를 보여줄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고가의 횟감인 돌돔을 낚아놓고, 고작 매운탕을 끓여버린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심지어 그 매운탕조차 맛이 없다).





마무리 - '믿고 보는 마블'의 시대는 끝났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엔드게임으로 페이즈 3가 마무리되고, 마블의 최고 프랜차이즈 스타인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가 장엄히 은퇴함과 동시에 많은 마블 팬 분들이 예감하셨을 것이다.



이제 마블도 예전 같지는 않겠구나...



허나 이대로라면, 마블의 내리막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빠르고, 가파르게 진행될지도 모르겠다. 이번에 나온 <블랙 위도우>와 <샹치>의 눈물나는 퀄리티와(이에 대해서는 이후에 바로 리뷰해드릴 예정이다), '마블의 머리'나 다름없는 디즈니에서 나올 예정인 '흑인 인어공주', '라틴계 백설공주' 등을 보시라. 점점 떨어지는 작품의 퀄리티는 물론, 페미니즘과 PC주의를 앞세워 대놓고 원작의 아이덴티티를 훼손하고, 관객들에게 불편함을 주고 있는 작품들이 하나 둘 고개를 들고 있는 상황인데, 앞으로 나올 마블의 작품이라고 그러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남성 히어로들의 빈자리를 '오로지 여성 캐릭터들로만' 채우고, 그를 기반으로 여성 우월주의와 남성 비하 및 PC주의 같은 왜곡되고 그릇된 사상들을 전파해나갈 것이 벌써부터 눈에 선하다(실제로 6명의 원년 어벤져스 멤버들 중 팔콘을 제외한 나머지 5명은 여성화가 예정되어 있는데, 과연 MCU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지...).



컨텐츠 내에 숨어있는 '사악한 의도'를 경계해야 하는 시대


앞서 설명했듯, '그들'은 굉장히 조직적이고 은근하게, 그릇되고 뒤틀려 있는 페미니즘과 PC 사상을 전 세계적로 표출하고 있다. 마블과 디즈니라는, 아주 훌륭한 '선전 도구'를 바탕으로 말이다. 이런 마블의 시도를 우리가 좌시해서는 안될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영화 내적으로는 물론, 외적으로도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1) 영화적으로 큰 해악을 끼친다


필자는 페미니즘이 담긴 영화들이 모두 엉망이라고는 주장하지는 않겠다. 분명 어딘가에는 여성 우월주의, 형체 없는 피해의식, 남성 그 자체에 대한 복수심 등에 치우치지 않고, 그동안의 잘못된 남성우월주의들을 걷어내어 진정으로 평등한 세상을 지향하는, '건강한 생각'이 담긴 영화 또한 존재할 터이니. 허나 필자가 현재까지 봤던 페미니즘과 PC주의 영화들(특히 마블과 디즈니)은 하나같이 큰 실수를 하고 있었다.



너무 대놓고, 부자연스러운 방식으로 페미니즘과 PC주의를 주장한다는 것.



여성들이 영화에서 멋진 신을 독차지 하는 것이 부럽거나 아니꼬와서가 아니다. 그저 그들이 보여주려는 '페미니즘'에 대한 주장이 굉장히 부자연스럽게, 너무 대놓고 이루어지기 때문에 관객들의 자연스러운 몰입을 방해하는 것을 비판하려는 것이다.


<어벤져스 - 엔드 게임>의 '걸벤져스 어셈블'을 예로 들어보자. 서로 그리 친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마지막 전투 전까지는 서로 본 적도 없는 인물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넓은 전쟁터에서, 약속이라도 한 듯이 서로를 돕는다고 모든 여성 히어로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장면은 어떤 각도에서 본들 전혀 자연스럽지 못하다. '그들'은 여성 히어로들이 모여 싸우는 장면들을 통해 스스로의 위대함을 억지로 납득시키려 한 듯 보이지만, 그들은 중요한 사실을 하나 잊고 있다. <매드 맥스 - 퓨리 로드(2015)>의 퓨리오사, <에이리언 2(1986)>의 리플리, <터미네이터 2(1991)>의 사라 코너 등, 지금껏 수많은 '진짜 여성 히어로들'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그들의 능력을 증명하며 전설로 추앙받았다는 사실을.


그런데 한낱 방구석 글쟁이에 불과한 필자도 알고 있는 이런 사실을, 영화계를 주름잡고 있는 마블, 그리고 헐리우드가 과연 몰랐을까. 이렇게 대놓고 페미니즘과 PC주의를 주장하는 것이 영화적으로 해악이 될 거라는 사실을 이미 그들이 알고 있었다고 하면, 그들은 왜, 무슨 목적으로, 누구를 대상으로 이런 장면들을 만들었을까.



2) 진짜 문제는, 이런 뒤틀리고 잘못된 사상들이 어린 관객들에게 주입되고 있다는 것


현재까지 마블 영화는 모두 '12세 이상 관람가'를 고수하고 있다. 스펀지처럼 모든 것을 흡수하는 시기에 있는 어린 청소년과 청년들이 주 관객층이라는 것인데, 이들은 대부분 마블 영화를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즐기기 때문에 자연스레 이 영화들이 내포하는 사상들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무의식 중으로 당연시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우리가 그토록 혐오하는 역사왜곡과 하나 다를 바 없는 행위들이 마블이라는 거대 미디어를 통해서 버젓이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1) 여성은 여성이 돕는다.
-> 반론 -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도움을 줄 수 있다.

2) 남성들은 악이고, 여성들은 피해자이다.
-> 반론 - 모든 남성이 악일 수 없다. 모든 여성이 피해자일 수 없듯.

3) 여성들은 해방되어야 한다.
-> 반론 - 이슬람 문화권 등 종교, 문화적인 이유로 억압받는 세계의 많은 여성들은 분명 해방되어야 함이 맞다. 허나 정작 페미니스트들은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내거나 행동하려 하지 않고, 오로지 그들 자신의 득이 되는 부분에 대해서만 행동하려 하기에 비판받아 마땅하다.

4) 여성은 남성보다 우월하다.
-> 반론 - 우열은 성별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 아닌, 능력의 차이에서 올뿐이다.


필자가 느낀 바, <블랙 위도우>는 와와 같이 그릇되고, 사악한 사상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내포되어있는 영화이다. 피해의식과 열등감으로 인해 차이를 차별로 인식하고, 오히려 그를 기반으로 평등이 아닌 또 다른 차별을 낳는 이런 생각들이 자라나는 어린 세대들에게 스며든다면, 그들이 어떤 사람으로 자라날지, 후대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 세대가 되어있을지는 불 보듯 뻔하다. 때문에 더욱더 영리해지고 교묘해지고 있는 그들의 악행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이제 우리 관객들도 그들이 내놓는 컨텐츠의 내면에 담긴 진의를 꿰뚫어 보고,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이런 시도 자체가 이루어지지 못하게끔 경계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마블이 제 아무리 블랙 위도우나, 어벤져스같은 '멋진 도구'를 가지고 우리를 꼬신다 한들, 더 이상 이전처럼 그들을 우러러보거나,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결국 마블 스스로에게 독이 될 페미니즘, 그리고 PC주의


하지만 마블 영화의 가장 큰 소비자 층이 남성들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봤을 때, 마블과 디즈니의 페미니즘과 PC주의에 대한 추종은 결국 스스로의 발목을 붙잡고야 말 것이다. 이번 <블랙 위도우>의 성공으로 앞으로 마블은 더더욱 강도 높은 여성 우월주의와 남성 비하, 혐오, 피해의식 등 그릇된 사상을 담은 영화들을 많이 찍어내기 시작할 텐데, 관객들은 어느 시점에선가 '어? 이거 원작이랑 너무 달라서 불편한데?', '이거 남성 비하 아니야?'라 느낄 것이고, 그렇게 그들이 마블을 멀리하고, 주요 소비층이 빠져나가기 시작하면 언젠가는 마블의 흥행가도 역시 끝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당분간은 '예전의 인기 비슷한 것'을 누리기야 하겠지만, 어쩌면 그들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그들의 왕국이 무너져내리는 것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필자 역시 마블이 빠른 시일 내로 정신을 차리길 진심으로 바라지만, 이미 뿌리부터 썩어있는 조직에서 그게 어디 그렇게 쉬울지...?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나타샤가 끝까지 대접받지 못했다는 것이 슬플 뿐


필자는 <엔드 게임>에서 그녀의 희생이 아이언맨에게 밀려 빛을 거의 보지 못한 것이 참 안타까웠다. 그녀가 없었더라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뻔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 안팎의 시선은 오직 토니 스타크의 핑거스냅과, "나는 아이언맨이다"라는 그의 마지막 대사에만 가 있었기 때문에. 조촐한 장례식조차 하지 못하고 보낸 그녀를 위해서라도 이 영화가 정말, 정말 잘 만들어지기를 바랐건만... 마블이 이 영화를 통해 증명한 것은 지금의 그들이 예전의 그들과는 많이 다르다는 사실과, 그들이 끝까지 나타샤 로마노프라는 인물을 찬 밥 취급하고 버렸다는 사실뿐이었다.


나타샤 로마노프는 2010년 <아이언맨 2>로 처음 마블에 합류한 뒤, 어벤져스의 원년 멤버인 '블랙 위도우'로서 십여 년 간 온갖 마블 영화를 뛰어다니며 은밀하게 세계의 수호자 역할을 수행해 왔고, 결정적인 순간에 아무런 망설임 없이, 자신의 목숨을 소울 스톤과 맞바꿔 세상을 구하고 정말 조용히, 정말 그녀답게 생을 마감했다. 비록 나타샤 로마노프의 블랙 위도우는 초라하게 은퇴했지만, 필자는 그녀를 모든 인류를 위해 고뇌할 줄 아는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히어로이자, 러시아 출신, 비 능력자, 여성이라는 핸디캡을 핸디캡으로 여기며 불평하지 않고, 당당히 실력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유수의 능력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훌륭한 히어로라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녀의 매력을 축소시켜 '여성들만의 구원자'를 자처하게 만들고 그녀의 가치를 깎아내린 영화, <블랙 위도우>가 마블과 디즈니, 그리고 그 수뇌부를 이루고 있는 페미니스트들이 그 이름만을 빌려 그들의 알량한 이익을 충족시키기 위해 만든, 아주 조잡하고 사악한 결과물이었다는 사실 역시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점점 PC와 페미니즘에 잠식되어가는 할리우드, 그리고 마블의 미래를 생각하면, 영화 곳곳을 뛰어다니며 약방의 감초같은 역할을 수행했던 그녀의 빈자리가 언젠가 문득, 하지만 반드시 그리워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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